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451)
이계 정벌기 (3)
디보어를 지배하는 악마들의 수준은 천차만별이었다.
초월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부터 시작해서 대악마의 바로 아래 단계로 성장한 개체까지.
악마는 자신의 이명과 관련이 있는 업과 공포에서 힘을 얻기에, 능력을 키우는 데는 노력뿐만이 아니라 타고난 권능도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본인이 아무리 열심히 활동해봤자 이명이 ‘도둑질’ 같은 거라면 더 위로 올라가기엔 한계가 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황폐해져 부정적인 감정이 넘쳐흐르는 지상은 그동안 대우받지 못하고 있던 악마들에게는 기회의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약 백 년 전.
이 세상에 지옥문이 열렸을 때.
지옥 밑바닥에 처박힌 채 변변찮은 계약자를 통해 찔끔찔끔 푼돈이나 받아먹던 하위 악마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지상으로 튀어나왔다.
그렇게 나온 지상에선 굳이 마음에 들지 않는 계약자에게만 의존할 필요도 없었다.
악마들은 직접 세상을 활보하며 마음껏 자유를 만끽했고, 그 과정에서 벌어들이는 업과 공포는 그대로 그들의 힘이 되어주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이 멸망한 세계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악마들의 놀이터이자 양분을 쥐어짜 내기 위한 양식장.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인간 따위야 언제든 멸종시킬 수 있었으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불멸성을 잃는 등 지상으로 나오며 감수해야 했던 페널티는 이제 와선 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막 지옥문이 열린 초창기나 최후의 저항 세력이 항전을 벌이던 중반쯤이라면 모를까, 모든 인간이 가축이나 다름없이 전락한 지금 감히 악마에게 저항하려는 이는 남아있지도 않았으니.
촤악—!
“끄윽!”
그랬기에 현재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커다란 이변이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의 군대의 습격에 하나둘 죽어 나가는 악마들.
“크아아! 뭐냐? 대체 뭐냔 말이다! 어떻게 언데드 따위가 이런!”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희생자 목록에는 ‘사기의 악마’ 따위의 하위 개체들만이 아닌, 악마 사회에서 나름대로 인정받던 상위 개체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검의 악마라고 해서 조금 기대했는데···. 이거 아주 실망이군. 오랜만에 몸 좀 풀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건장한 성인 남성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검의 악마가 사납게 이를 갈며 자신의 앞에서 낮게 중얼거리는 불청객을 노려보았다.
이질적인 양식의 검은 도복을 입고 한 자루의 장검을 든 중년 사내.
방금 그의 한쪽 손목을 잘라낸 사람답지 않게 평온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내가? 검에 당했다고? 검의 악마인 내가?!’
검을 꽉 쥔 채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잘려 나간 자신의 오른손을 힐긋 내려다본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무리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 검술로 상대했다고 해도 그렇지, 검의 악마인 그가 검을 든 상대에게 당했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악마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앞으로 수백 년간 조롱거리가 되고도 남을 터.
그것도 상대가 인간도 아닌 언데드라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반드시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주마!]거친 기성을 터트린 그의 몸에서 날카로운 예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직후.
그의 절단된 손목에서 거대한 칼날 하나가 솟구쳤다.
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푸화악—! 뚜두둑!
그의 몸이 부풀어 오르며 전신에서 온갖 형태의 검이 튀어나왔다.
대검, 장검, 단검은 물론 톱날이나 낫 모양을 한 기형검까지.
멀쩡한 왼손은 어느새 손가락 대신 다섯 개의 예리한 칼날이 자리하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가늘고 긴 연검이 되어 이리저리 빛을 반사했다.
[이 몸은 검의 악마! 검이야말로 나를 지칭하는 모든 것이니! 너의 공격은 절대로 나에게 닿을 수 없을 것이다!]전신이 날카로운 칼날로 이루어진 6미터가 넘는 거대한 괴물이 지상을 내려다보며 포효했다.
누가 뭐래도 그의 이명은 ‘검의 악마’.
본인도 검의 달인이긴 했지만 그렇게 파생된 검술은 그저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었다.
그를 상징하는 요소는 어디까지나 검 그 자체였으니까.
그리고 검은 인류 역사의 초창기부터 함께해 오며 오랜 세월 공포를 축적해 온 흉기이지 않은가?
그것을 무기이자 갑옷으로 이용하는 검의 악마는 여타 어중이떠중이와는 다른, 악마 중에서도 어엿한 상위권에 속하는 실력자였다.
“흐음.”
하지만 그런 압도적인 위용 앞에서도 중년 무인은 여전히 시큰둥한 기색이었다.
“검의 악마가 이 모양이라면···. 그보다 윗줄이라는 ‘무기의 악마’도 그리 다를 건 없겠군. 아쉬운 일이야.”
그저 가볍게 혀를 차며 예기를 발하는 거구를 찬찬히 훑어볼 뿐.
[건방진! 다시는 살아날 수 없도록 가루로 만들어주마!]그에 분노한 검의 악마가 거칠게 쇄도하며 공간을 난도질했다.
‘아까는 그저 방심했을 뿐이다! 검으로는 절대 이 몸에 상처를 입힐 수 없으리라!’
그 육신을 이룬 검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전승과 얽혀 있었다.
절대로 부서지지 않고, 어떤 단단한 방어도 무시하며, 한 번 찔리면 반드시 죽음에 이르고, 항상 승리를 가져다주며 초월적인 존재들까지 베어내는 등.
그리고 그 모든 능력은 고스란히 그의 힘이 되었다.
그게 바로 오랜 세월 수많은 용사들을 좌절하게 만든, 검의 악마인 그의 자랑스러운 권능이었다.
검을 든 검사인 이상 그 사정은 저 건방진 언데드도 그리 다르지 않을 터.
“쯧, 짐승이 따로 없군. 차라리 방금 전이 더 나은 것 같은데.”
그래야 했을 텐데···.
스아악—
사납게 날뛰던 검의 악마의 몸이 멈춰 섰다.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어?]자신의 상체를 가로지르는,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생소한 빗금.
파삭— 후두둑!
그 균열을 따라서 잘린 칼날들이 하나둘 떨어져 내렸고.
끝내 무게를 이기지 못한 상체가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졌다.
쨍그랑! 와장창—!
단 일격에 판가름 난 허무하기까지 한 승부.
하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커헉! 어떻게! 어떻게 검으로 나를!]검의 악마가 검에 베였다.
그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그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권능을 무시하는 일격이라니?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이런 기초적인 걸 왜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그에 한때 지고의 경지를 넘어 신화경에 닿았던 위대한 무인, 천마가 자기 손에 들린 애검— 천마신검을 가볍게 쓸어 만지며 시큰둥하게 답했다.
“이 몸이 곧 검이고, 검이 곧 이 몸이니. 마음으로 베는 검격의 주체가 실제 검으로 이루어졌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그저 간단한 신검합일(身劍合一)과 심검(心劍)의 응용일 뿐이었다.
수양을 통해 무의 궁극을 추구하는 무인이 아닌, 그저 검의 원론적인 면만을 따질 뿐인 저 괴물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끄아아악! 안 돼! 이건 말도 안 된다! 내가 이렇게···!]검의 악마의 유언은 그게 전부였다.
이어진 섬광과 함께 곧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무수한 검의 잔해.
그것을 뒤로 한 천마가 천천히 손목을 돌렸다.
“흠, 그래도 영 의미 없진 않았나.”
승부 자체는 금방 끝났지만 사실 그 과정이 마냥 쉽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놈이 상극인 건 사실이었던지라, 한계에 가까울 정도로 일격에 최선을 다해야 했으니.
그 과정에서 기억이 손상되며 잃었던 경지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여전히 수준 자체는 생전에 비해 딸릴지 몰라도, 온갖 보정의 도움을 받는 지금 힘의 출력 면에선 그리 밀리지 않겠지.
그렇게 뒤늦게 다가온 부하 언데드들이 전리품인 악마의 잔해를 수습하고 있을 때.
“끝나셨나 보군요. 검의 악마는 제법 강한 개체라고 들었는데 역시 대단하시네요.”
그를 향해 한 명의 여인이 천천히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심연을 뭉친 듯 빛 한 점 비치지 않는 갑주를 입고 마찬가지로 새까만 방패와 전투 해머를 든 여전사.
그녀의 몸에서 피어오른 검은 아우라가 서서히 주변을 잠식하는 것을 보며 천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도 별문제 없이 끝났나 보군.”
그의 동기라고도 할 수 있는 전 성직자, 서기관이었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언데드들도 한바탕 격전을 치렀는지 싸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제 상대야 그리 강한 악마도 아니었으니까요. 덕분에 확실하게 올바른 가르침을 새겨줄 수 있었답니다. 저희의 주께서 친히 이 세상에 강림하셨는데도 ‘불신의 악마’ 같은 불경한 이름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다니요?”
이단에겐 오로지 죽음뿐이라는 말과 함께 어깨를 으쓱인 그녀가 밝게 미소 지었다.
정체불명의 불그스름한 액체가 흥건하게 묻은 거대한 해머를 자랑스럽게 어깨에 걸치면서.
“뭐, 좋아. 어쨌든 이걸로 이쪽 구역은 대충 끝난 건가?”
불사의 군대의 전격적인 습격 작전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었다.
몸속에서 퍼져 나가는 암세포처럼 세계 곳곳에 흩어져 집요할 정도로 타깃인 악마들을 노리는 죽음의 군단.
물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손실도 적진 않았지만, 언데드라는 종족 특성상 그건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원망 어린 죽음이 가득한 이 세상엔 전력을 보충할 재료들이 넘쳐나기도 했고.
“그렇죠. 그럼 다음으로는···.”
그의 말에 답하던 서기관이 일순 말을 멈추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천마도 마찬가지였다.
육안으로는 관측되지 않는 저 먼 곳 어딘가.
거칠게 충돌하던 두 거대한 힘 중 하나가 나머지 하나를 집어삼키며 억지로 찍어 누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끝나셨나 보군요.”
“끝이군.”
둘의 입에서 동시에 짧은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인가?”
“그렇죠. 그쪽이 사실상 메인 디쉬라고 볼 수 있겠네요.”
“기대되는군. 거기엔 좀 더 쓸 만한 놈들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가볍게 말을 주고받은 그들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막 언데드 마법사들이 완성한 이동 마법진이 있는 방향으로.
우우웅—
그런 대대적인 이동은 비단 이들만이 아닌, 이 세상의 언데드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미 단단히 굳어버린 세계의 운명조차 단번에 뒤흔드는 거대한 흐름.
그렇게 비탄의 대악마에 이어 파멸의 대악마와 그 휘하까지 파죽지세로 휩쓴 불사의 군대는.
마지막으로 남은 대악마의 세력에게로 일제히 그 기수를 돌렸다.
디보어의 정점에서 군림하는 최강의 악마.
무한의 악마가 지배하는 장소로.
***
전신의 뼈마디를 돌리며 몸 상태를 확인한 한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왜 대악마를 이 세상의 정점이라 부르는 건지 알겠군.’
가장 처음 사냥에 성공한 비탄과 두 번째로 쓰러뜨린 파멸.
둘 다 까다로운 권능을 보유한 강적이었다.
영역 내의 적들을 무력화하는 동시에 자신에게 향하는 모든 적대적 공격을 무효로 돌리는 비탄의 권능.
그것은 대군전에 탁월한 힘이면서 자기 보신에 특화된 능력이기도 했다.
그 어떤 기운이라도 놈에게 다가가는 순간 비실비실하다가 흩어져 버리니, 도무지 제대로 된 공격을 넣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는 법이지만.]그건 일대의 모든 것을 사멸시키는 권능을 지닌 파멸의 대악마도 마찬가지였다.
휘하의 언데드들이었다면 그들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모조리 녹아내렸겠지만, 어차피 처음부터 부하들의 도움을 받을 생각 따윈 없었던 그에게는 무의미할 뿐이었다.
명색이 죽음의 지배자인 그가 저 대악마들에게 꿀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그건 아쉽네. 죽음의 대악마가 아직도 남아있었으면 나한테도 상당히 도움이 됐을 거 같은데.’
그렇게 대악마 둘을 처치하는 과정에서 그는 기존의 목표도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이 디보어에도 번천회주가 다녀간 흔적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세계의 벽을 파괴해 지옥문을 열고 죽음의 대악마를 비롯한 절대자들을 사냥해 갔다는 존재.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번천회주밖에 없어.’
다만 아쉽게도 원하는 정보를 모두 얻을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비탄과 파멸은 지옥문이 열린 후에 승급한 입장이었던지라, 그 이전의 사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부분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운 좋게 번천회주로부터 살아남아 지금까지 대악마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존재는 이제 무한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 외에도 살아남았던 학살과 공포는 백여 년 전 처형자에게 목숨을 잃었다고 들었으니까.
‘지옥의 대악마들이 놈에게 먹혀서 사라진 게 세계 멸망의 트리거가 된 건가.’
즉, 세상의 균형이 무너진 건 지상이 아닌 지옥 쪽이 먼저였다는 소리였다.
저울의 추가 크게 기운 상태에서 두 세계를 구분 짓던 장벽까지 뚫려 있었으니, 악마들이 지상으로 밀려 나와 활보하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일 터.
사실상 디보어라는 차원의 기본 설계 자체가 완전히 무너진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지상에 넘어온 악마들을 모조리 정리하면 어떻게든 활로가 열리지 않을까? 나머진 이쪽 세상의 관리자가 알아서 하겠지.’
정리 정돈에 앞서 일단 역류한 오물들부터 치우는 게 우선이었다.
디보어의 악마는 세상을 구성하는 부정적인 요소에서 탄생한 존재들.
아마 지금 싹 다 없애더라도 긴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지옥에서 자연 발생하겠지만, 그때는 세계의 장벽도 어느 정도 수복되어 있을 거다.
그 시간을 벌어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충분히 할 만큼 했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그걸 위해선 우선 저것들부터 치워야겠지만.’
한스가 검은 안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평원을 가득 메운 어마어마한 수의 군세.
그 병력은 그의 휘하에 있는 불사의 군대가 아니었다.
[과연, 무한이라···.]악마가 불러낸 지옥의 군단.
단순히 숫자만 뻥튀기 시켜놓은 수준도 아니다.
거기엔 그동안 상당히 까다롭다고 생각했던 고위 악마들까지 잔뜩 섞여 있었으니까.
‘똑같이 생긴 놈들이 굉장히 많군. 이미 죽어서 사라졌을 놈들도. 설마 이미 죽은 악마까지 그대로 복사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
아마 저게 능력의 전부도 아니겠지.
‘무한’이라는 개념은 어떤 식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그야말로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단어이지 않은가?
‘뭐, 상관없나.’
그러나 한스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캬아아악—!”
[죽음의 왕을 위하여!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모조리 도륙하라!]“끄르륵!”
[우우우우——!]그는 이런 대규모 회전에 그 누구보다 특화되어 있는 네크로맨서의 정점.
불사의 왕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