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455)
멸망한 세계 (2)
일단 한 번 위치가 포착된 이상, 그 장소로 이동하는 건 한스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건 지옥보다 더한 이 극한의 환경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생명 반응이 감지된 곳으로 빠르게 날아 이동하던 그가 슬쩍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순식간에 휙휙 지나가는 경관은 하나같이 비슷한 풍경들뿐이었다.
파괴된 건물, 무너진 지반, 황폐해진 자연 등···.
‘이게 진짜 멸망한 세계.’
한 차원의 종말.
그동안 위기에 직면한 세상을 적잖게 마주해 온 그로서도 완전히 끝장나버린 세상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용심이 뜯겨나가 멸망 수순을 밟던 강환계도 그렇고, 얼마 전의 디보어 또한 최소한의 회생 가능성 정도는 있었으니까.
‘차원 전체의 생명체가 한 번에 몰살당했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수가 죽어 나갔다는 소리지?’
죽음의 지배자라고 자부하던 한스도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희생자의 영혼이나 최후의 사념, 죽음의 기운 같은 것들이 남아있었다면 모를까, 그 모든 것들이 모조리 씨가 마른 상태였던 것이다.
위장에서 녹아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멀쩡하게 남은 시체를 찾을 수 없기도 했고.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적어도 억 단위 이상의 사람들이 이 일로 목숨을 잃었으리라는 것.’
그것도 인류로만 한정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동식물을 비롯한 차원 내의 모든 생명체가 이 일로 인해 절멸했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대체 뭘 노리는 거냐, 번천회주.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지금처럼 멸망한 세계가 이곳 코시야스 뿐만은 아닐 것이다.
지구에 신비를 싹틔우기 위해서라는 미명하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세상도 적지 않을 터.
그 어마어마한 악업을 쌓으면서까지 이루고자 하는 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도착했군.]그런 생각과 함께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달한 그가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이 수색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이 장소도 다른 곳의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전엔 빈민촌이라도 되었던 건지, 무너져버린 움막의 잔해들이 한데 모여 있다는 것과 생전에 인간이 입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후줄근한 옷가지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는 점만 빼면.
‘여긴가.’
지상에 내려선 한스는 그중 하나의 움막 잔해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가볍게 한 손을 내저으며 섬세하게 마력을 내뿜었다.
쿠구궁—
그와 동시에 일제히 허공으로 떠오르는 잡동사니들.
무중력 상태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앞에 둥둥 떠 있던 잔해가 뿔뿔이 흩어지며 내부에 있던 무언가를 그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찾았다.]한스가 자신의 코앞으로 다가온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를 이곳까지 불러들인, 지금 이 순간에도 미약한 생명 반응을 내뿜는 존재.
두 손에 무언가를 꼭 쥐고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십대 초반의 소녀···가 잠들어있는 반투명한 푸른 수정을.
***
그녀는 꿈을 꾸고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언제까지 계속될지도 알 수 없는 기나긴 꿈.
-“#%@—!!”
자신을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와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만이 그녀를 반겨줄 뿐.
그녀는 다시 쪼그려 앉은 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괜히 생각을 하려고 해봐야 머리만 아파질 뿐이니, 그냥 평소처럼 이대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자기가 누구인지, 대체 왜 이러고 있는지도 모두 잊은 채.
-“#%@—!!”
하지만 이번엔 뭔가가 달랐다.
원래 이렇게 무시하면 금방 사라지곤 했던 목소리가 재차 뇌리에 울려 퍼졌던 것이다.
그것도 이전보다 더욱 커진 소리로.
그녀의 양손이 관자놀이를 움켜쥐었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머릿속이 간질간질해지며 뭔가가 떠오르려 했으나, 직후 바로 뒤따라온 찌르는 듯한 고통이 그것을 방해하길 반복했다.
‘싫어.’
아픈 건 싫다.
그냥 이대로 모든 걸 잊고 잠들고 싶었다.
어떤 고통도 괴로움도 없는 세상 속에 깊게 잠긴 채로.
평소처럼 자기 혼자서···.
‘혼자?’
머리를 움켜쥐던 그녀의 움직임이 우뚝 멈춰 섰다.
이어서 더욱 강한 고통이 그녀를 괴롭혔지만 이미 한 가지 화두에 꽂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점점 그녀의 사고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싫어. 혼자는 싫어. 난··· 나는···!’
그리고 다음 순간.
-“라뮤—!!”
머리를 뒤흔드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오빠!”
반짝 눈을 뜬 그녀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어?”
생전 처음 보는 깨끗한 방 안에서.
이런 게 존재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부드러운 이불에 감싸인 채로.
눈을 깜박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 여긴 어디···?”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그녀가 얼떨떨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쓰레기장에서 태어나 평생을 폐허에서 살아온 그녀가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화려한 실내.
홀린 듯 그것을 살펴보던 그녀의 시선이 문득 어느 한 곳에 고정되었다.
“아!”
방 한편에 자리한 커다란 창문 너머.
그곳에는 동화책에서 본 뒤 상상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설마 저게···.”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시리도록 맑고 투명하게 느껴지는 저것이 그동안 이야기로만 접했던.
바로 그 ‘푸른 하늘’이라는 것을.
“아, 일어났구나.”
그렇게 멍하니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의 뒤쪽, 방문이 있는 방향에서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그에 잔뜩 경계하며 그쪽을 돌아본 그녀가 이불을 꼭 움켜쥐었다.
아직 머릿속이 어지러워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만큼은 분명했으니까.
그런 그녀의 한마디엔 상대의 정체는 물론 무엇을 원하는 건지, 자신은 대체 왜 여기에 있는지 등의 의문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었다.
“아, 나 말이야?”
그런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물과 죽 등이 담긴 쟁반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온 사내는 그것을 침대 옆 탁상에 올려놓곤 턱을 긁적였다.
그리곤 잠깐 뭔가를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으음, 자세한 이야기는 복잡하니까 앞으로 차차 하도록 하고. 일단 나는···.”
식량 수급이 어려운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건장한 체구에 말끔한 피부, 귀해 보이는 고급 원단으로 만들어진 의복과 고위층의 전유물이라는 안경까지.
소녀의 길지 않은 삶에서 완전히 처음 보는 타입의 사내가 성실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훈’이라고 불러.”
세상에 태어난 후 처음으로 하는 자기소개를.
***
소녀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온 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리곤 천천히 실내를 거닐며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다시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명색이 집주인이었지만 사실 이 집에 직접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지라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도 미리 대비해 놔서 다행이지. 역시 뭐든 미리미리 준비해 둬서 나쁠 건 없다니까.”
이 집은 그가 따로 준비해 두었던 비밀 안가였다.
온갖 방비를 해둔 서울 외곽의 본진 저택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적당한 2층 크기에 아담한 정원까지 포함해 있을 건 다 있는 주택.
‘그리고 앞으론 이 아바타, ‘훈’의 거점이 될 곳이기도 하지.’
-개체명 : 훈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위대한 정신」, 「초회복」, 「명경지수」, 「괴력」, 「신경과민」, 「혜안」, 「제노글로시」, 「튼튼함」, 「수중 호흡」, 「아공간 수납」, 「한계돌파」, 「흉내내기」
-개체 특성 : 「정신감응」
-특이 사항 : 한성현의 열세 번째 아바타. 「정신감응」을 이용해 타인과 사고를 연결할 수 있다.
한차례 뒷머리를 긁적인 그가 거실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고 앞으로의 계획과 함께 지난 일들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그때 한스가 저 아이가 들어있던 수정을 발견한 뒤로···.’
한스는 손에 넣은 수정을 가지고 여러 시도를 해 보았다.
어쨌든 뭐라도 정보를 얻으려면 안에 있는 인물을 깨워 대화를 나눠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작업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괜히 함부로 손을 댔다가 안에 있는 아이가 잘못될 수도 있으니.’
그 수정은 일종의 생명 유지 장치였다.
멸망한 세계의 환경 속에서 그녀의 목숨을 끝까지 붙들어 주었던.
그런데 수정을 깨고 안에 있던 소녀를 억지로 꺼냈다가 자칫 적대적 환경에 노출이 되어 버린다면···.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순 없지.’
아무리 한스라도 그것을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 끔찍한 환경은 세계를 구성하는 법칙 자체가 비틀리면서 생겨난 것이었으니까.
각성자이자 언데드인 한스야 큰 상관이 없었으나, 세계의 법칙에 구속받을 수밖에 없는 원주민을 지키기 위해선 그것을 거스를 수 있을 정도의 대비가 필요했다.
그렇게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며 방법을 강구하던 도중.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녀가 들어있는 수정을 다른 차원으로 옮길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안전한 지구에서라면 굳이 과하게 조심할 필요도 없었으니.
그렇게 수정에서 소녀를 꺼낸 후에 이어진 것은 「개체 투영」을 이용한 성자 하인리히의 신성력 치료였다.
푸른 수정도 완벽한 건 아니었는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쇠약해진 상태였기에 응급처치라도 하려고 했던 건데···.
그때 알 수 있었다.
소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단순히 그 수정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 몸 상태, 강환계의 ‘용의 아이’와 굉장히 흡사했지. 탄생 단계에서부터 초월적인 존재의 개입이 있었다는 점이.’
물론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용의 아이가 면역이 없던 신성력을 받아들임으로써 탈이 난 것에 가깝다면, 그 소녀는 타고난 그릇이 너무 커서 몸이 버티지 못한 쪽이라고 볼 수 있었으니까.
어쨌든 그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저 아이였어. 코시야스 차원의 주신이 안배한 멸망에 대한 대책이. 그것도 용의 아이처럼 수동적인 방식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적을 쓰러뜨리기 위한 비수로서 준비된.’
패망을 앞둔 주신이 직접 손을 쓴 만큼 품고 있던 가능성도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여럿으로 분산되어 있던 용의 아이와는 달리 여력이 집중되기도 했을 테고.
하지만 딱 거기까지.
세계는 소녀가 껍질을 벗고 성장할 때까지 버티지 못했고, 결국 그녀 혼자만을 남겨둔 채 완전히 멸망해 버리고 말았다.
실패한 세상.
채 꽃피우지 못하고 시들어버린 가능성.
결국 주신조차 내버린 세계에서 홀로 외로이 사멸해 갈 수밖에 없었을 운명.
그런데 그것이 지금.
‘내 손안에 들어왔단 말이지?’
훈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존재의 근간 자체가 번천회주에게 대항하기 위해 태어난 대적자다.
이미 당첨이 결정된 복권이나 다름없다는 소리.
그런 게 땅바닥에 버려져 있는데 어찌 그냥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후우, 졸지에 보모가 되게 생겼네. 완전히 다른 세상에 적응할 때까진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지.”
혈맹 등의 휘하 조직에 맡기는 것도 생각해 봤으나, 저런 원석을 함부로 타인의 손에 맡겨둘 순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제대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케어가 꼭 필요한 상황이기도 했고.
‘타이밍 좋게 새로운 아바타를 생성할 수 있게 되지 않았으면 본체가 직접 관리할 생각도 있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슬슬 활성화될 때도 됐다 싶었던 『고유스킬 강화』가 다음 단계로 넘어간 건 가히 운명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아무리 본체 또한 강해졌다고 한들 그의 입장에선 리스크가 최대한 적은 선택을 하는 게 유리했으니까.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그때 가서 따져 봐야겠지만.
‘게다가 지구에서 벌여놓은 일이 워낙 커서 그걸 관리할 아바타도 필요한 상황이었으니. 겸사겸사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필요하면 언제든 다른 데에 투입할 수도 있는 거고.’
어깨를 으쓱인 그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배려해 혼자 있을 시간을 주고 있었으나, 그녀를 언제까지고 저대로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묻고 싶은 게 많기도 하고.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려면 사전 준비 정도는 미리미리 해둬야겠지.’
번천회주에게 복수한다는.
‘우리’의 염원을 위해서는 말이다.
***
형형색색의 연기가 자욱한 실내.
“···왜곡이 더 커졌구나.”
물담배를 손에 쥐고 흐릿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오라클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이런 일을 벌일 만한 세력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또 마스커레이드인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놈들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한국을 뒤흔드는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 중이었다.
최대한 인과율에 큰 영향을 주지 않도록 주의하느라 시간이 조금 걸리고 있긴 하지만, 몇몇 작전은 이미 실행 단계에 접어든 지 오래였다.
그런데 하필 이런 상황에서 호수에 커다란 바위가 떨어진 듯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으니···.
“···불길하군. 큰 문제는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녀가 입에 문 담뱃대를 신경질적으로 잘근잘근 씹어댔다.
저도 모르게 예언자답지 않은 속내를 드러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