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474)
차크라 (3)
평소 친분이 있던 원로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도 우리 윤가의 후예로 교육을 받았으니 잘 알고 있겠지.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그리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는 걸.”
루세트와의 연락이 끊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한달음에 원로원을 찾아간 윤소회가 들은 말이었다.
윤가의 이름을 내걸고 정식으로 홍산국에 입국했었다면 모를까, 이번 납치 사건의 배후를 추적하기 위해 비밀리에 움직이다가 벌어진 일이었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기엔 조금 곤란한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가만히 손 놓고 있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우리 윤가를 대표하는 수행자의 소식이 끊겼는데 그럴 수는 없지. 다만 홍산국을 무시하고 그들의 영토에 막무가내로 전력을 파견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바천을 양분하는 강대국인 홍산국과 청해국.
그 사이에 낀 성천 윤가가 양측의 균형 유지와 마찰에 대한 중재를 도맡은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국가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그 위세는 가히 대륙 제일 가문이라 칭해도 과언이 아닐 터.
하지만 아무리 성천 윤가의 수행자들이 최정예라 할 만하고, 그들의 세력이 강성하다 한들 정면으로 국가와 대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광활한 영토와 거기에 딸린 인구수에서 나오는 막강한 국력은 고작 도시 몇 개 규모를 다스리는 윤가와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이미 홍산국의 상부와 이야기해 최대한의 협조를 약속받았다. 그쪽에선 현지의 수색대가 조사를 시작했고, 우리도 협의가 끝나는 대로 책임자를 파견할 생각이다. ···물론 어느 정도 홍산국 측의 통제에 따를 필요는 있겠지만.”
그런 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윤가가 현재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던 건 전부 수십 년 전에 뇌제가 직접 맺은 ‘평화 조약’과 더불어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적대국의 존재 때문이었다.
아무리 국가에 비할 바는 못 된다 하나, 수많은 정예 수행자들을 거느리고 전략적 요충지까지 점하고 있는 그들이 상대편에 붙는 것만큼 큰 위협이 또 없지 않은가?
결국 그간 누려온 그들의 권위는 어느 정도 상대의 존중과 양보 위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고, 그건 이쪽이 아쉬운 소리를 할 때 그만큼 더 물러서야 한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원래 그런 게 국제 외교라는 것이었으니.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루세트가 어디 그리 쉽게 당할 아이더냐? 어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잠깐 연락이 끊겼을 뿐, 머지않아 다시 연락이 올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그저 만약을 위한 대비일 뿐이지.”
그렇게 말하는 원로도 원론적인 말이나 해야 하는 스스로가 답답하다는 기색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그런 이유로 윤가의 일원들은 협의가 끝날 때까지 함부로 나설 수 없소. 우리 윤가를 건든 배후가 홍산국 내부에 있다는 확실한 증거라도 있다면 모를까, 그것을 잡기도 전에 누님이 실종되어 버렸으니···.”
훈에게 대략적인 사정을 설명한 윤소회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도 가문의 사정은 충분히 이해했다.
젊은 나이에 심층에 도달한 루세트도 물론 중요한 인사긴 하지만, 이런 국제 관계를 소홀히 했다가 그게 불화의 씨앗이 되어버리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그렇게 쌓인 갈등이 전쟁까지 비약되어 버리면 그 책임은 누가 진단 말인가?
“···하지만 외부인인 그대는 다르지.”
그게 바로 윤소회가 급하게 훈을 찾은 이유였다.
물론 그도 식객의 신분이긴 하나, 아직 가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대외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다.
‘무엇보다 다수의 상층 수행자들을 한순간에 쓰러뜨릴 정도의 강자이기도 하고. 그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뭔가 더 숨기고 있는 한 수가 있는 듯하니···.’
적임도 이만큼 적임이 없었다.
그가 눈을 빛내며 외치듯 말을 끝맺었다.
“누님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모르는데 마냥 지금처럼 어영부영 시간을 보낼 순 없는 노릇. 내 이번 일을 도와준다면 크게 사례하겠습··· 사례하겠소! 부디 부탁하오!”
떨리는 말끝과 꼭 움켜쥔 채 잘게 떨리는 두 주먹.
훈은 턱을 쓰다듬으며 그런 윤소회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심층의 수행자가 어떤 언질도 없이 연락이 끊어졌다라···.’
그가 몇 차례 마주했던 루세트를 떠올렸다.
극의에서도 제법 높은 수준에 속하는 능력자인 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가 이미 제압을 당했든 아니면 어떻게든 몸을 숨겼든, 그런 일을 벌이려면 그만한 대비가 갖춰져 있어야 했다.
‘함정에 빠진 건가?’
어쩌면 천문을 연 초월의 강자가 직접 나선 걸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이 사건이 사바천에 큰 파란을 일으킬 거란 건 분명했다.
‘쓰읍, 그냥 내버려두자니 뭔가 찝찝한데.’
그동안 여러 차원을 거치며 가는 곳마다 혼란을 수습해 왔기 때문일까.
그는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환란의 징조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라뮤도 있는데 이런 일에 선뜻 나서긴 좀···.’
그런 훈의 망설임을 느낀 듯 윤소회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지금이 아니면 다신 기회가 없을 게 분명했다.
“만약 루세트 누님을 무사히 데려와 주신다면···!”
목소리를 높였던 그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멈칫했다.
그리곤 뭔가를 망설이듯이 입을 뻐끔거렸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마음에 순간적으로 망설임이 밀려왔던 것이다.
‘아니, 나중 일은 나중 일. 뭐가 됐든 일단 누님을 구하는 게 우선이야.’
이미 한 차례 납치를 당했던 그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분명 예삿일이 아니라고.
여기서 망설이면 나중에 크게 후회할 일이 있을 거라고.
결국 눈을 질끈 감은 그가 재차 승부수를 던졌다.
“···그 대가로 우리 윤가 비전의 차크라 운용법— 전륜도(轉輪道)를 알려 드릴게요.”
“응? 전륜도?”
그 생소한 말에 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게 있다는 말은 교육 때도 들어보지 못했으니.
“···물론 비공식적으로요. 원래 남에게 알려주면 안 되는 거라···.”
애늙은이 같은 컨셉도 잊은 윤소회가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숙였다.
뭔지는 몰라도 어지간히 중요한 것인 모양이었다.
‘호오? 그런 걸 숨겨두고 있었단 말이지? 비전이라···.’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한 것이기도 했다.
누가 뭐래도 성천 윤가는 사바천 전체를 통틀어서도 한 손에 꼽힐 정도의 거대한 세력.
오직 자기들만 사용하기 위해 꼭꼭 숨기고 있던 비장의 한 수가 있다는 거야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오케이, 콜.”
어차피 어찌할지 고민하던 참이다.
평형을 그리던 저울에 무게추 하나가 더 추가되었으니 더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일단 좋아 보이는 건 다 챙기고 봐야지. 그런 게 있으면 차크라를 더 빨리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될 테니.’
윤가의 후예가 직접 챙겨 준다면 라뮤의 안전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더불어 실전을 통해 차크라의 숙련도 증진 또한 꾀할 수 있을 터.
윤가 내에 틀어박혀 똑같은 수련만 반복하는 것보단 그쪽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이참에 이 세계의 다른 지역을 한번 둘러보기도 하고.
“교통편은 제공해 주겠지?”
“다, 당연하··· 크흠! 물론이오!”
“아참, 나 무일푼인데.”
“우린 성천 윤가요! 경비도 확실하게 지원해 드리겠소!”
윤소회가 원로들을 어찌 잘 설득했는지 훈의 홍산국 행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균형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 때문에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을 뿐, 그 대안이 직접 나서준다면 굳이 사양할 필요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루세트의 실종 소식이 전해진 지 고작 한나절도 채 되지 않아.
한 명의 이계인이 홍산국으로 배송되었다.
***
쾅!
네모난 상자의 뚜껑을 박찬 훈이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그 안에서 기어 나왔다.
“끄응, 과연 차크라인가. 세상에, 별의별 능력이 다 있네.”
윤가의 영역에 있던 그가 국경을 넘어 사건 발생 지역에 도착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건 정말이지 ‘총알 배송’이라는 단어 외엔 뭐라 설명할 수 없었다.
‘택배 업계의 초신성이로군. 저 능력만 있다면 지구에서도 굶어 죽을 걱정은 없겠어.’
살아있는 생물을 운송하는 데엔 썩 적합하지 않은지 최대한 육체를 강화한 상태였음에도 온몸이 욱신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육로로 갔다면 일주일은 걸렸을 거리를 반나절도 되지 않아 주파했으니 뭐라 불평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보다 여기가 거기란 말이지?”
숨을 고르며 컨디션을 최대한 끌어올린 훈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그스름한 잎을 가득 매단 나무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산의 숲속.
낙엽이 지기엔 한참 멀었음에도 화려하게 눈을 현혹하는 그 정경은 왜 이곳이 홍산국(紅山國)이라고 불리는지 단번에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넓네.”
그리고 근처의 나무 위에 올라 사방을 훑어본 그는 왜 수색이 지지부진한지 역시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끝과 끝이 아득하게 보일 정도로 커다란 산지.
이 드넓은 곳 어딘가에 남아있을 한 사람의 흔적을 찾는 게 그리 쉬울 리가 없었다.
하물며 그 흔적마저 흉수의 손에 의해 깨끗이 지워져 버렸다면···.
‘자칫하다간 시간 내에 못 맞출 수도 있겠는데.’
그만한 실력자가 자신의 흔적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는 건 지금도 썩 긍정적이지 못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소리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생존 확률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있다고 봐야 하리라.
“그렇게 내버려둘 순 없지.”
물론 훈은 그걸 그대로 넘길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일을 맡지 않았으면 모를까, 기껏 여기까지 와놓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애초에 그는 이 일을 길게 끌고 갈 생각이 없었다.
“후우, 자··· 그럼.”
깊게 심호흡한 훈.
그와 동시에 내면의 소우주가 열리고.
「이상의 뿌리」를 통해 하나의 심상이 끌려 올라왔다.
“시작해 보자.”
우우웅—
그 말과 함께 몸에서 옅은 진동이 새어 나왔다.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무섭게 부드럽게 흩어지면서 산천초목에 스며들어 가는 차크라.
‘자연’의 힘이 깃들어 별 모양으로 변한 눈을 몇 차례 깜박거린 훈이 가만히 주변을 관조했다.
‘···으음, 역시. 이거 효율이 영 좋지 않네.’
그러다가 그것을 얼마 유지하지 못한 그가 눈을 질끈 감고 미간을 꾹꾹 주물렀다.
심상의 주인인 하이 엘프 해리스였다면 이 한 번으로 산 전체를 스캔할 수 있었을 텐데.
고작 하나의 봉우리 인근을 살핀 것만으로 한계에 다다른 훈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성과는 있어.’
아무리 온전히 베껴오지 못했다 한들 자연과의 일체로 초월에 이른 존재의 심상이다.
이렇다 할 흔적을 발견하진 못했지만, 순간적으로 이곳 일대와 동화되어 바람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던 그는 다음으로 어딜 살펴봐야 할지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확실한 것 같구나. 누군가가 수작을 부린 낌새도 있고.’
그의 눈길이 옆쪽의 봉우리로 향했다.
···아니, 그 시선은 근방의 봉우리를 넘어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내로 끝내는 건 힘들지도.”
구름과도 같이 가벼운 그의 발걸음이 표홀히 흘러갔다.
자신을 이 먼 땅까지 오게 한 원흉이 자리한 곳으로.
***
기이할 정도로 고요함이 맴도는 한밤중의 숲속.
어두운 밤의 등불이 되어줘야 할 달과 별들이 모조리 모습을 감춘 탓에 빛 한 점 비치지 않는 지상엔 을씨년스러움만이 가득했다.
평소라면 고아한 멋을 풍겼을 나무는 기괴하게 뒤틀린 얼굴을 가진 괴물과도 같았고, 부드러운 풀줄기를 가졌을 식물들은 날카로운 가시를 세운 덩굴이 되어 희생자를 노리는 올가미처럼 늘어졌다.
거기에 더해 칼처럼 예리한 바위들과 호시탐탐 발을 잡아채는 끈적한 늪, 머리가 띵해지는 혈향까지 진득하게 어우러지고 있었으니.
말 그대로 이곳은 귀신의 숲 그 자체였다.
“하아, 하아···.”
그 귀림(鬼林)의 한복판.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묶어 정리한 한 여인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최대한 숨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젠 정말로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이 위화감···. 역시 시간 축이 뒤틀려있어. 바깥에선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이곳에서 버틴 것만 해도 벌써 열흘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쉴 새 없이 이동을 거듭한 그녀였지만, 이 귀림에서 벗어나기는커녕 떠오르는 햇빛 하나 볼 수 없었다.
‘···방심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깊게 개입해 있었을 줄이야.’
그녀, 루세트가 이런 처지가 된 건 전부 윤소회 납치 사건의 배후를 추적하다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올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철저하게 짜맞춰진 함정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건 가문 내부에··· 그것도 상당히 고위층에 첩자가 있지 않고서야···.’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던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그녀로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추측이었다.
그렇게 숨을 고르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을 강구하고 있을 때.
“이번엔 여기까지인가? 슬슬 지쳐가나 보구나.”
이제는 익숙해진 가느다란 사내의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잘라냈다.
루세트가 이를 갈며 기척이 느껴진 곳을 돌아보았다.
“부령 장군···!”
깡마른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키, 염소 같은 수염을 기른 사내.
홍산국을 대표하는 장군 중 하나가 초췌한 그녀와는 달리 멀끔한 얼굴로 히죽 미소 지었다.
수많은 동심원이 자리한 초록색 눈을 빛내면서.
“끄끅, 그 이름 높은 뇌호도 여기까지인가? 그래도 제법이었다. 설마 여기까지 버틸 수 있을 줄은 몰랐거늘. 하여튼 윤가 놈들은···.”
콰르르릉—!
느긋하게 이어지던 그의 말은 채 끝마쳐지지 못했다.
루세트에게서 시작된 거대한 빛줄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몸을 통째로 날려버렸던 것이다.
“···성격도 참 급하구나. 아직까지 이 정도 힘이 남아있었나?”
하지만 반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되어 온 일이었기에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후읍, 후으.”
루세트는 애써 숨을 고르며 눈앞의 내시 출신 장군을 노려보았다.
저 사내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심층에 도달한 수행자, 부령 장군.
같은 조건에서 마주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밀리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녀의 전투적인 특성을 생각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상대가 공들여 꾸며놓은 함정에 빠진 순간부터 승산은 바닥까지 떨어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저자 하나뿐만이 아니야. 최소 다섯 이상의 상층 수행자들이 이 절진을 보조하고 있다. 그 이하까지 내려가면 얼마나 더 있을지 몰라.’
함정에 빠진 것부터 불리한데 일대일조차 아니라니.
그녀로서는 이 상황 자체가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대로 그냥 당해줄 것 같아? 죽을 때 죽더라도 어떻게든 한방은 먹여주마.’
하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불평을 토하는 대신 분노를 끌어올렸다.
이를 악문 그녀의 눈동자에서 번갯불이 튀어 올랐다.
이 사태의 원흉인 함정과 첩자에 대해서는 물론, 아까부터 자꾸 머릿속을 비집고 나오는 동생의 얼굴까지 애써 흐트러뜨리며 오직 상대에만 집중했다.
지금은 다른 쪽에 신경을 할애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전의를 날카롭게 고조시키던 순간.
[아, 아. 여보세요? 잘 들립니까?]그녀의 뇌리에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음? 연결은 잘 됐는데···. 안 들리나? 나 훈입니다.]앞서 몇 번이나 대화한 적이 있는 사내의 목소리.
그 뜻밖의 음성에 애써 끌어올린 집중이 흐트러진 그녀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