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485)
미혹의 끝 (1)
청해국 재상과 홍산국 대장군의 실종.
그것은 근래 살얼음판과도 같았던 세계 정세에 던져진 커다란 바위와도 같았다.
“황궁이 침범당하고 재상이 납치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면 온 세상이 저희를 비웃을 겁니다!”
“감히 자국의 영토에서 대장군을 해하다니. 이건 우리 홍산국을 무시하지 않고선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절대 가만히 있어선 안 됩니다.”
가장 안전해야 할 황궁 한복판에서 재상이라는 정계의 거두를 지키지 못한 청해국이나, 국가 무력의 상징인 대장군과 그 부하들이 단 한 사람에게 패배한 홍산국이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건 마찬가지였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 바깥에 함부로 공표할 수도 없을 정도로.
···물론 공표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만한 대사건을 숨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알만한 이들은 다 알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할 터.
“그래서 그 흉수가 대체 누구란 말이오?”
“평범한 마도 수행자도 아닌 것 같은데···.”
문제는 그들이 아직까지도 이번 사건의 범인을 정확히 특정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목격자 정보를 토대로 그동안 쌓여온 데이터베이스를 통째로 뒤져보기도 했으나, 용의자에 대해서 파악하기는커녕 의문만 늘어갈 뿐이었다.
마치 일이 터지기 직전에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인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흉수가 누구냐니요? 그거야 뻔하지 않습니까?”
“단순히 마도 수행자들이 이런 일을 꾸밀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분명 뒤에서 이 모든 일을 사주한 배후가 있겠지요.”
그렇게 혼란에 휩싸인 정국에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이런 짓을 할 만한 곳이래야 봐야 홍산국밖에 더 있습니까?”
“청해국. 그 물개 놈들이 기어이 일을 저지른 겁니다.”
어느새 이 일의 배후로 상대국을 지목하며 보복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한 것이다.
과격한 이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그 주장은 은근한 지지를 받으며 어느새 진지하게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상대국 또한 지금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다는 첩보는 그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것쯤이야 오리발을 내밀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라고 몰고 가면 그만이었으니.
“아니, 그렇게 단정 짓고 넘어가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한둘이 아닙니다만···.”
그 인위적인 흐름에 뭔가 이상을 느낀 이들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대세는 이미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주전파 쪽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그들은 오히려 이 사태가 기회라도 되는 양 적극적으로 전쟁을 밀어붙였다.
이런 사정은 굳이 정치판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손을 쓰기라도 한 것처럼, 약속이라도 한 듯 백성들 사이에서도 상대국에 대한 온갖 비방과 유언비어가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툭 치는 순간 곧바로 전쟁이 터질 것 같은 일촉즉발의 분위기.
하지만 정작 일이 이렇게 흘러가도록 주도한 이의 마음도 복잡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쯧,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되어버렸는지.”
어둠 속의 존재가 혀를 찼다.
오랫동안 수양을 이어온 몸임에도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원래라면 지금같이 억지스러운 전개가 아닌, 좀 더 자연스럽고 극적으로 사건이 진행될 예정이었으니까.
‘예의 주시하고 있던 놈은 움직이지도 않고 있는데 말이야. 내 예상이 틀렸단 말인가?’
자신의 불길함을 자극했던 ‘훈’이라는 이름의 이세계인.
그는 그 이방인에 대한 경계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천 윤가를 뒤엎는 과정에서 있었던 습격이 전부가 아니었다.
중요도가 그리 높지 않은 이세계인 숙소에 심층의 마도 수행자를 배정한 것도, 그에게 원한을 가진 이의 욕망을 충동질하도록 만든 것도 시작에 불과했다.
그때의 일로 모든 게 정리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차선책도 언제든 시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놈이 이전처럼 전면에 나선 순간 확실하게 옭아맬 함정부터, 그때 혼자 남겨질 여아를 빼돌릴 준비까지 모두 갖춰져 있었건만.’
그러나 공들여 설계한 그 모든 작전은 정작 훈이 윤가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틀어박힘으로써 무기한 동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가 포로들을 심문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조만간 뭔가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대체 뭐냔 말이다. 그 괴물들은···.”
눈을 지그시 감은 그가 끓어오르는 울분을 애써 삼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근 벌어지는 큼직큼직한 사건 중에서 그의 예상대로 흘러간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등장 직후 청해국의 황궁을 발칵 뒤집어엎은 악마.
그리고 홍산국의 산 하나와 다수의 정예 병력을 통째로 박살 내 버린 괴인.
갑작스럽게 등장한 그 두 존재는 앞서 경계하던 훈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험 요인이었다.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군. 그 둘의 출현에 대한 경고가 훈이라는 놈을 가리키는 거라고 착각한 모양이야. 하필 우연히 시기가 맞아떨어지는 바람에···.’
결국 그는 그렇게 결론내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 셋이 단 하나의 존재에게서 파생되어 나온 개체들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물론 이제 와서 깨달아 봐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젠 어쩔 수 없다. 준비가 부족해 일이 틀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놈들이 뭔가 하기 전에 선수 치는 수밖에.’
재상과 대장군, 흑왕은 각 영역에서 일을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최고 관리자였다.
그들의 신변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에게 넘어간 순간부터 앞으로 계획된 작전들의 성공 가능성 또한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젠 나도 안전하다고 볼 수 없겠군.’
턱밑에 칼끝이 들이밀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이젠 기호지세였다.
놈들이 손에 넣은 말을 이용해 무슨 짓을 하기 전에 일을 벌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잠깐, 뭐라고?”
그렇게 어떻게든 빨리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그였지만.
한 번 손에서 벗어난 운명은 다시 그에게 미소 지어주지 않았다.
“윤가에··· 누가 나타났다고?”
또다시 자신의 예상에서 벗어난 전개.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낀 그가 질끈 눈을 감았다.
***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성천 윤가.
“······.”
“······.”
그중에서도 본가를 방문한 외부인들을 맞이하는 지객당 로비에선 지금 전에 없을 정도로 고요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모여든 인파가 평소의 배는 될 정도로 바글바글했으나, 그들은 숨 쉬는 것조차 조심하며 조용히 한 곳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거 굉장한 관심이구만.’
그 무수히 쏟아지는 시선의 중심.
태연한 태도로 서 있던 헬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허어!”
“크흐음.”
별생각 없이 한 그 행동 하나에 사방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본인들도 민망했는지 금방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하긴 했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 저도 모르게 눈길을 돌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 군중들.
“기다리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저는 이곳 지객당을 책임지는 윤 제이콥이라고 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그 기묘한 상황은 부하의 보고를 받고 서둘러 달려온 지객당주가 직접 오고서야 끝이 났다.
고개를 끄덕인 헬라는 안쪽으로 안내하는 그를 따라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훈으로는 몇 번이고 와 본 길인데 헬라로 방문하니 뭔가 새로운 기분이네.’
그건 아마 주변 반응이 다르기 때문이겠지.
아무리 그 마성을 최대한 억눌렀다 하나, 그녀가 품은 매력은 말 그대로 나라 하나를 기울게 할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그녀에게 홀려 넋을 놓는 것 정도야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내 정체를 알아서인 것도 있겠고.’
그녀가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제이콥을 힐긋 바라보았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그의 목덜미는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윤가쯤 되면 방문하는 이들의 신분이 높은 경우도 드물지 않았기에, 응대의 급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지객당을 책임지는 이의 신분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의 담이 좋아도 한계는 있는 법.
단신으로 일국의 황궁에 쳐들어가 깽판을 치고 유유히 빠져나왔다는 괴물을 상대로 평정을 유지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은연중에 느껴지는 심상에서 어지간한 마도 수행자와는 비교되지도 않는 흉악한 기운까지 넘실대고 있었으니···.
“성천 윤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 장로직을 맡고 있는 윤설영이라고 해요.”
그리고 긴장한 기색을 내비치는 건 지객당주의 안내를 받아 마주하게 된 중년의 여성 장로 또한 마찬가지였다.
장로씩이나 되는 만큼 겉으로는 평온을 유지하며 미소 짓곤 있었으나, 그 정도로는 예리한 헬라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반가워~! 나는 헬라라고 부르면 돼.”
“헬라··· 님이시군요.”
어색하게 웃으며 응대하는 윤설영.
딱 봐도 이 핵폭탄이 왜 여기까지 굴러들어 왔는지 탐색하고자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하지.’
사실상 현재 양국 간에 일어나고 있는 전쟁 기류의 원흉이 아닌가?
그런데 그 당사자가 정문으로 당당히 본가를 방문했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다른 윤가의 수뇌부들도 모조리 소집되어 긴급회의를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일단 먼저 평화적인 대화를 요청했기에 받아주고 있기는 하지만, 당장 바깥에서 은밀하게 주위를 포위하는 전투원들도 그 연장선이겠지.
‘하지만 어쩌겠어? 전쟁을 막기 위해선 이 방법이 최선인데.’
결국 각국의 주전파가 주장하는 요지는 이거였다.
자국에서 일어난 사건이 상대국의 사주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것.
그렇다면 그 전쟁 명분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자신이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정공법으로 간다.’
다른 핑계조차 댈 수 없도록 대놓고 전면에 나서며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뒤이어 올 할리가 확보한 포로들까지 데리고 합세하면 더 확실해질 터.
완벽한 중립 세력인 성천 윤가는 그것을 과시하기 위한 최고의 무대였다.
물론 이건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칫하다간 홍산국과 청해국은 물론, 마도 수행자와 윤가와도 싸우게 될 수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대륙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였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턱을 괸 헬라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이제 와서 그런 사소한 문제를 신경 쓸 리가 없지 않은가?
무력으로 굴복시킬 자신이 있으면 해 봐라.
나는 숨지도 도망치지도 않을 테니.
“···그러니까 헬라 님 말씀은, 저희 성천 윤가를 방패막이로 이용하시겠다는 뜻인가요?”
“어라? 그렇게 표현하니 조금 섭섭하네. 상부상조라는 좋은 말이 있는데.”
“그게 지금 상황에서 쓸 수 있는··· 하아, 아닙니다.”
물론 온갖 어그로란 어그로는 죄다 끌게 되니 무대인 윤가가 다소 피해를 볼 순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배후에 윤가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쪽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명색이 평화의 수호자를 자처한다면 이 정도쯤은 감수해야지. 암, 그렇고말고.’
어차피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건 중간에 낀 그들이 될 게 뻔했다.
그 부담을 덜어준다는 걸 생각하면 이건 오히려 감사를 들어도 모자랄 판이지 않나!
“그걸 저희가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글쎄, 그것 말고 전쟁을 막을 다른 좋은 방법이 있나? 그쪽도 그동안 조사했으면 대충 돌아가는 상황 정돈 파악했을 거 아냐? 그 정도 능력도 없다면 조금 실망인데.”
헬라의 말에 윤설영이 입을 다물었다.
사실 저 말이 사실이라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불과 얼마 전, 식객 중 하나인 ‘훈’이 윤가를 습격한 포로들을 조사한 끝에 정보를 캐내는 데 드디어 성공했던 것이다.
그때 그가 알아낸 사실과 헬라가 주장하는 흑막의 전쟁 조장설이 굉장히 유사했다.
청해국의 재상과 홍산국의 대장군 또한 그때 원흉으로 지목된 인사이기도 했으니, 저 말에 신빙성도 어느 정도 있다고 봐도 되리라.
‘저들이 서로 접점이 있을 리가 없으니 객관성도 어느 정도 보장된 셈이군. 물론 추가적인 검증 정도는 필요하겠지만···.’
얼굴을 찌푸리며 골머리를 싸매는 윤설영을 본 헬라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간 이래저래 신뢰를 쌓은 훈의 증언과 일치하는 만큼 쉽게 무시하긴 힘들 터.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니 양심에 찔릴 이유도 없었다.
‘거기다 여기서 시간을 버는 동안 따로 할 일도 있고.’
사실 지금 여기서 뭘 하든 그건 그저 시간을 끄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끝을 보려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을 반드시 뿌리 뽑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그 미혹의 차크라부터 어떻게든 처리해야 해.’
언제 누가 거기에 넘어가 미친 짓을 하려고 들지 모른다.
눈이 돌아가기 전까진 누가 홀렸는지 본인조차 알 수 없으니, 섣불리 건드려 봤자 무의미한 마피아 게임이 되어버릴 공산이 컸다.
‘공교롭게도··· 내가 그쪽 방면의 스페셜리스트가 아니었다면 말이지.’
이미 미혹을 품으며 정신 방벽이 약해진 이를 홀리는 것 정도야 헬라에겐 누워서 떡 먹기였다.
그렇게 미혹에 대한 통제권을 하나둘 강탈하다 보면 그 인과의 끈이 차크라의 주체와 맞닿는 순간이 반드시 오게 될 터.
그 계획의 시작이 바로 성천 윤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