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490)
신성 (2)
아우테리카 차원.
이온 대륙 한가운데의 성지에 자리한 로셀리아 대신전.
“오셨습니까, 성녀님.”
“오늘도 수고가 많으시네요, 대주교님. 성자님은 좀 어떠신가요?”
“여전하십니다. 분명 이렇다 할 문제는 없는데···. 왜 눈을 뜨지 않으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 내밀한 곳의 한 숙소 앞에서 만난 두 사람이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갈하면서도 기품 있는 인테리어로 꾸며진 실내.
그 안쪽에 놓인 커다란 침대 위에는 한 명의 사내가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하아, 오늘로 딱 일주일째죠?”
“그렇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군요.”
침대 곁으로 다가선 리에스타 성녀가 한숨을 내쉬며 사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손을 통해서 교단의 그 어떤 성직자보다 선명한 백금빛 광채가 흘러들었지만, 눈을 감고 누워있는 사내— 성자 하인리히는 여전히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이상을 깨달은 것은 일주일 전 저녁 즈음이었다.
최근 이세계를 오가랴 불사왕과의 전쟁을 준비하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하인리히.
그가 어떤 전조도 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나보다 싶었을 뿐.
하지만 그것이 사흘, 나흘이 지나기 시작하자 주신교단에서도 슬슬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혹시 불사왕이 뭔가 술수를 쓴 건 아닐까요?”
“이곳은 성지의 한가운데에 있는 로셀리아 대신전입니다. 그리고 흑마력과 저주는 물론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혹시 모르는 일이죠. 당대의 불사왕은 마음대로 대신전에 침입한 전적도 있잖아요?”
“으음, 부정할 수 없군요. 그럼 좀 더 세밀한 정밀 검사를 진행해 볼까요?”
외부에도 명성이 자자한 로셀리아 대신전 병동 책임자인 대주교의 말에 걱정을 쏟아내던 그녀가 멈칫했다.
그리곤 한숨을 푹푹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일단 조금만 더 믿고 기다려 보죠. 성자님께서 뭔가를 하시는 중이셨다면 저희의 개입이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
사실 이렇게까지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성자에게 정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주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인 그녀가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으니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걸 어떡하란 말이야.’
하지만 이성과 감정이 다른 건 어쩔 수 없었다.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던 전대 교황이 서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기에 더더욱.
침대 옆의 의자에 앉은 리에스타가 하인리히의 손을 양손으로 꼭 쥐어 이마에 맞대며 눈을 감았다.
‘정말 큰 문제없는 거 맞죠? 얼른 무탈하게 일어나 주세요. 너무 걱정시키지 말구요.’
성자의 손을 잡고 조용히 기도를 올리는 성녀.
그것을 따라 뒤에 있던 대주교도 눈을 감고 기도문을 읊었다.
그러나 아무리 간병이라고 한들 성녀씩이나 되는 존재가 계속 이곳에 죽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다시 한번 하인리히의 얼굴을 보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며 자리를 떠났다.
우웅—
그렇게 리에스타가 돌아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가만히 잠들어있던 하인리히의 내면에서 극히 미세하지만 커다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
이번 일을 진행하면서 하인리히와 한스를 비롯해 신성의 씨앗을 품은 아바타들이 일시에 침묵에 빠졌다.
‘약식 절차라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그나마 신성을 보유하지 않은 아바타들은 계속 운용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뭐, 그래봐야 거의 동면에 가까운 상태로 거처에서 두문불출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힘도 없는 녀석들이 괜히 아무 데서나 픽 쓰러졌다간 객사하기 십상이지.’
첫 시도부터 모든 신성을 완전히 융합할 생각은 없었기에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애초에 각기 다른 환경에서 탄생해 단단히 굳어있던 씨앗들을 하나로 합치기엔 아직 자격과 준비 모두 부족하다는 걸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이라도 이렇게 숨통을 틔워 놔야 나중에 더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겠지.’
자신이 하는 일은 신성의 씨앗들이 제대로 개화할 수 있도록 토대를 잡아주는 작업이었다.
단절되어 있던 신성 사이에 길을 터 줌으로써 서로에게 자극을 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해서 아바타라는 한계로 인해 생긴 불완전함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주르륵—
‘음?’
어쩐지 뭔가 찝찝하다 싶더라니, 아까부터 코와 입에서 핏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씨앗들이 반응하기 시작하면서 그 중심이 되는 본체에게 가해지는 부담도 슬슬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직이다. 조금만 더···.’
하지만 지금 그만두기에는 아까부터 반응을 보이고 있는 씨앗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특히 그 한가운데에 자리한 본체의 신성은 금방이라도 안에서 뭔가가 깨어날 것처럼 격렬하게 흔들리는 중이었다.
‘거의 다 됐는데. 진짜 조금만 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 이때를 놓친다면 언제 또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알 수 없다는 걸.
절대 그냥 흘려보낼 수 없었다.
그런 마음으로 「위대한 정신」에 의지해 악착같이 정신줄을 붙잡고 있던 순간.
“크흡!”
목구멍에서 넘어온 핏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내면의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툭 터지는 느낌과 함께, 알 수 없는 전능감이 전신을 휩쓸고 머리 꼭대기로 치솟기 시작했다.
《조건을 달성하여 가능성을 개화합니다. 특수스킬「미약한 신성」을 획득합니다.》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문구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머리의 중심— 백회혈(百會穴)로 솟구친 전능감이 앞을 가로막은 장막을 꿰뚫고 높은 하늘로, 드넓은 우주로, 세상을 아우르는 차원 전체로 뻗어나갔다.
‘아아.’
영혼 전체를 관통하는 깨달음.
이런 걸 두고 전지(全知)라고 하는 걸까.
세상 모든 이치와 법칙들이 한눈에 들어왔으며, 복잡한 운명의 흐름과 인과 역시 숨 쉬듯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현재 상태로는 이 순간도 그리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것과.
그 시간이 끝나는 즉시 모든 깨달음이 허상처럼 사라지리라는 것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온갖 진리들이 뒤죽박죽 섞여 흐르는 가운데.
나는 이 상황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다.
그 어느 때보다 전지에 가까워진 지금.
자신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가장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안건은 어떤 것인가?
‘번천회주.’
끝없이 확장된 의식이 놈이 세상에 남긴 인과를 타고 올라갔다.
자신의 원수이자 기필코 멸해야 할 숙적.
단순히 놈에 대해 알아내는 것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얻은 정보를 지금의 각성 상태가 끝난 후에도 확인할 수 있도록 제대로 남기는 것이 중요했다.
‘···이건?’
다행히 그러기 위해 필요한 재료는 이미 갖춰져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처음부터 자신의 손안에 들어와 있었다.
‘신화의 열매.’
세상의 인과를 훑고 나아가던 의식이 하나의 지점에서 멈춰 섰다.
하인리히가 판테온에서 ‘신화의 열매’를 접한 뒤에 얻은, 그동안 줄곧 물음표로만 표기되어 있던 특성.
무수한 차원에서 유래한 신성들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기적의 증거.
「신화의 기록」
그것이 강한 존재감을 발산하며 의식을 잡아끌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그 내부로 파고들었다.
‘이게 열쇠였던 건가.’
그렇게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주위로 수많은 세상의 단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었다.
이건 말 그대로 세계의 역사가 담긴 기록이었다.
다양한 차원의 신들과 그들이 다스리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잠깐, 이거 설마 아카샤 시스템의···.’
그쯤 되니 진리에 맞닿은 의식이 본능적으로 해답을 도출해 냈다.
지구를 포함한 모든 차원을 아우르는 아카샤 시스템.
이 「신화의 기록」은 그것이 기입된 아카식 레코드(Akashic Records)와 이어주는 단말기나 다름없었다.
비록 그 용량엔 한계가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했다.
어쩌면 절대적인 법칙으로까지 여겨졌던 시스템마저 우회할 수 있을지도.
‘이런 걸 만들고 있었다니. 번천회주 그놈은 대체···.’
그 순간.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단상에서 익숙한 풍경들이 비치기 시작했다.
나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
‘지구?’
미국, 중국, 일본, 루마니아··· 그리고 한국과 그 외의 나라들까지.
다양한 장소와 시간대의 풍경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었다.
‘아니 잠깐, 뭔가 이상한데?’
하지만 확장된 의식 덕분에 곧 그 세상이··· 세상‘들’이 모두 내가 아는 지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줄기가 되는 과거는 분명 하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여러 갈래로 분화하기 시작한 세계는 곧 제각각의 방향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현실의 지구는 그중 하나에 불과할 뿐.
‘서기 2천 년.’
어떤 신비도 존재하지 않았던 지구에서 ‘이세계 전송’이라는 이상 현상이 발생하던 시점.
그때 그 순간이 바로 이 세계 분화의 특이점이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세계들을 관측하던 나는 곧 그 현상의 중심에 누가 존재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회귀자. 번천회주.’
단순한 평행 세계가 아니었다.
미처 해소되지 못한 업과 어지러이 뒤엉킨 인과.
이건 누군가가 하나의 세계를 몇 번이고 되감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현상이었다.
‘미친, 대체··· 대체 몇 번이나 시간을 되돌린 거지?’
자연스레 그동안 내가 꾸었던 꿈의 정체도 알 수 있었다.
신화의 열매를 통해 아카식 레코드와 접촉하면서 이전 세계의 잔재를 꿈이라는 형태로 경험하게 된 것일 터.
즉, 그 모두가 내가 실제로 한 번 경험했던··· 경험해야 했었던 세상이라는 뜻이었다.
‘······.’
나는 조용히 흘러가는 세상들을 바라보았다.
꿈속에서 보았던 부모님의 미소가 아른거렸다.
평범한 대학 생활을 보내던 순간도, 프리랜서 영상 편집자로서 일찍 사회에 뛰어들었던 순간도.
그리고 지금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시간 속의 자신들도.
‘잠깐.’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강타했다.
‘그것들이 전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면···.’
주위로 무수히 많은 세계선의 지구가 스쳐 지나갔다.
여러모로 같은 듯하면서도 달라진 부분들이 많은, 현재와 비슷한 시간대의 지구들.
하지만 그 세계선이 일제히 ‘끝’에 도달한 순간.
판에 박은 듯 똑같은 광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수히 분화한 세계의 끝.
나는 수많은 지구의 하늘을 가득 채운 눈동자들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새하얀 공간.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번천회주가 번쩍 눈을 떴다.
‘누군가가 세계선에 접촉했다. 아직 제대로 신좌의 영역에 닿은 것 같진 않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인과의 법칙에 의해 눈과 귀가 멀고 전신에 족쇄가 채워진 상태라 할지언정, 그는 이 지구에서 유일하게 신성을 꽃피운 ‘지구의 신’에 가장 가까운 존재였으니까.
“역시 대적자인가?”
지금으로썬 그쪽이 가장 유력했다.
여태까지 거쳐 온 수많은 지구에서 온전한 신성을 이룩한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가능성이 있다면 이번 시간선의 변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대적자가 유일하겠지.
그게 하회탈인지, 팬텀인지, 이계의 성자인지는 모르겠지만.
“···하! 기어코 여기까지 왔군.”
시간을 되돌리면서 그가 강해지는 만큼 앞을 막아선 상대 역시 더욱 강해진다.
그가 발버둥 치면서 누적된 업이 회귀하는 순간 고스란히 대적자에게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래도 그간 신성의 씨앗을 품은 경우는 종종 있었으나, 그것을 싹틔우는 단계까지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인과율의 제약으로 인해 온전한 힘을 쓸 수 없는 그에겐 그만큼 힘든 상대가 될 터.
‘아니, 아직은 괜찮다. 그만큼 대계 역시 그 어느 회차보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니까.’
그동안 예기치 못한 변수들로 계획이 많이 틀어진 건 사실이었다.
설마 모든 경우의 수를 파악해 미리 ‘가장 완벽한’ 대처를 해 두었는데도 이렇게까지 큰 피해를 볼 줄은 몰랐으니.
하지만 그것까지 감안해서 철저하게 준비한 만큼 전체적인 상황을 보면 그리 나쁘지만도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끝낸다.’
시간을 계속 되돌리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아무리 다른 차원의 에너지를 갈취하고 수많은 인명을 제물로 삼더라도 결국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본인이었으니까.
그가 신성을 품은 천사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
‘세계선에 접촉했다면···. 모든 진실을 알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자신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인 그 ‘눈’과도 대면하게 될 것이다.
“과연 진실을 알게 된 네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참으로 기대되는구나.”
나직이 읊조린 번천회주가 다시 눈을 감고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자신의 영육과 신성을 휘감아 제한하던 족쇄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