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496)
신도 (2)
이온 대륙의 중남부에 위치한 자유 도시 드라칼.
용병 길드의 본거지가 자리 잡은 이 도시는 그야말로 용병들을 위한 작은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든 경제와 사회 시스템은 용병 산업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도시의 시장조차 용병 길드의 뜻에 따라 선출되었으며, 대외적인 외교 또한 온전히 그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런 용병들의 정점에 있는 존재가 바로 용병왕이었다.
드라칼에서 용병왕의 권력과 권위는 감히 대체할 수 없을 정도였고, 그건 그 바로 밑에서 직접적인 실무를 수행하는 사무총장직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드라칼이라는 작은 국가의 재상이나 다름없는 용병 길드 사무총장 패트릭.
그 권력자는 오늘도 평소처럼 자신의 사무실에 출근해 엄숙한 표정으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의식을 행했다.
벌써 일 년 넘게 지속된 행위였지만 할 때마다 매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젠장, 대체 왜 이 세계에는 탈모 치료제가 없는 거지?”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발 상태가 날로 악화되고 있었으니까.
그냥 기분 탓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마법이란 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 아닌가? 망할 연금술사 놈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하던 빗질을 멈추고 누적된 분노를 터트려 봐도 바뀌는 건 없었다.
그저 자신의 무력함을 통감하고 비정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리고 사실 따지고 보면 그의 분노가 향해야 할 방향은 자신의 나약한 모근이나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연금술사들이 아니었다.
탈모의 원인이 된 스트레스의 근원은 따로 있지 않던가?
“또, 또! 대체 어디로 간 거냐! 이 망할 용병왕은—!”
신임 용병왕 할리.
그 방랑벽 짙은 상사가 갑자기 종적을 감춘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그로서는 쓰린 속을 달래 줄 위장약을 달고 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용병왕이 상징적인 존재나 다름없는 데다 그가 모든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무력이 최우선인 이 야만적인 용병계에서 인맥으로 자리를 보전한 그의 지시를 따르게 하려면 상당히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 상황에서 모든 일이 계획대로 잘 풀릴 리가 없었고, 그러면 또 그가 모든 일을 책임지고 뒷수습까지 해야 했으니···.
‘망할 놈들, 정작 그가 돌아오면 찍소리도 못할 거면서 왜 나한테만 지랄인데?’
자신의 갈색 머리를 헝클어트리던 패트릭이 멈칫하곤 조심스럽게 손을 내렸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로 연약해진 아이들을 이 이상 혹사시킬 수는 없었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
지그시 눈을 감은 그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귀환에 필요한 카르마는 이미 모은 지 오래였으니 원한다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깝단 말이지. 곧 일어날 불사왕과의 전쟁은 용병 길드의 사무총장인 내게도 엄청난 기회가 될 텐데.’
원래 용병의 진가는 전쟁터에서 발휘되는 법.
그러다 진짜 불사왕을 토벌하기라도 한다면··· 아니, 설령 용병왕 할리가 전쟁 중 전사하더라도 그에게 나쁠 건 없었다.
챙길 건 다 챙기다가 정 안 되겠다 싶을 때 잽싸게 튀어버리면 그만이었으니.
‘내가 이곳에 온 지 십오 년이 넘었던가? 슬슬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하는군.’
아일랜드 출신의 지구인 패트릭 브라운.
그의 고유스킬은 자신의 생각을 여럿으로 분할할 수 있는 「병렬 사고」였다.
잘만 이용한다면 수십 수백 개의 고위 마법을 동시에 발현할 수도 있는 대단한 능력이었으나···.
“후우, 내게 조금만 더 재능이 있었더라면.”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마법에 대한 자질이 정말 개미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이 이럴 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 처참하게.
애초에 마법이라는 학문은 배워야 할 것도 많고 적성도 많이 타서 신비 중에서도 유독 위로 올라가기 까다로운 분야였다.
아무리 스테이터스를 강화하고 시스템 보정이 더해진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싸움에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결국 남은 건 지구에서부터 줄곧 해왔던 행정직밖에 없었다.
그가 능력을 인정받고 빠르게 승진해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도 다 「병렬 사고」를 이용한 초월적인 일 처리 속도 덕분이었다.
‘···그래, 조금만 더 버텨 보자. 이 정도쯤이야 그동안 내가 겪은 역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비록 스트레스는 받을지언정 그만큼 얻는 것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상념에 잠긴 패트릭이 과거를 회고하던 순간.
콰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무총장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누가 걷어차기라도 한 것처럼 거칠게.
“크하하핫! 이거 오랜만이구만, 패트릭!”
“···할리 님?”
이 용병 길드에서 그런 일을 할 만한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현 용병왕 할리.
마침내 그가 긴 외유를 끝내고 다시 돌아온 것이다.
“에잉, 이거 또 문짝이 망가졌구만. 그냥 손으로 가볍게 민 것뿐인데 말이야. 명색이 사무총장실인데 문 좀 튼튼한 걸로 바꾸지 그래? 남들이 이걸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저번에도 그렇게 말씀하셔서 통짜 합금으로 교체한 겁니다만···.”
그 때문에 패트릭은 물론 이 사무실에 드나드는 이들의 팔뚝이 날이 갈수록 두꺼워지고 있었다.
이런 걸 생활 단련이라고 해야 할까.
이 금속 문조차 열지 못하는 연약한 부하는 그에게 보고하러 올 수도 없었다.
“엉, 그래서?”
“···장인을 물색해 보겠습니다. 찾아보면 더 튼튼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겠지요.”
자유 도시 드라칼은 용병이 많은 만큼 뛰어난 실력의 장인들도 잔뜩 보유하고 있었다.
무기와 갑옷을 만드는 데 쓰이는 기술을 잘만 접목하면 할리의 성에 차는 문짝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왜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런데 또 어디에 갔다 오시느라 연락이··· 후우, 아닙니다.”
어차피 물어봐야 대답해 주지도 않을 터.
이젠 할리에 대해 파악할 만큼 파악한 패트릭은 그냥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기뻐하기로 했다.
“···네?”
그가 새로운 일감을 떠넘기기 전까진.
“아, 그러니까! 명색이 내가 용병왕이잖아?”
“예, 그거야 그렇지요.”
“근데 최근에 보다 보니 영 뭔가 부족해 보인단 말이지? 저기 휴버트 상회는 상회주 이름 걸고 거창하게 뭔가를 하고 있는데, 우리도 그런 거 하나 하면 좋겠다 싶어서 말이야.”
“아니, 그걸 왜 용병 길드가···.”
“어허, 잘 들어봐. 솔직히 대륙 전체에 대한 영향력은 우리 용병 길드도 그리 꿇리지 않잖아? 여기서 확 뭔가를 보여줘서 팍 기선 제압을 하면 얼마나 좋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주장에 패트릭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곤 차마 입 밖으론 내뱉을 수 없는 처절한 절규를 속으로 삭였다.
‘대체 왜 용병 길드가 주 고객인 상회와 경쟁을 해야 하는 겁니까!’
결국 자신의 명성을 퍼뜨리기 위해 용병 길드의 힘을 총동원하라는 소리이지 않은가?
거기다 용병왕 취임식을 간소하게 하자고 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할리 본인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예에, 그럼 바로 계획을 짜 보겠습니다.”
“카하하핫! 역시 패트릭이야. 처음부터 믿고 있었다니까? 그럼 되도록 빨리 부탁한다고!”
하지만 절대 을인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떠나가는 할리의 등을 보며 마음속에 담아둔 사직서의 유혹을 재차 억눌렀다.
‘두고 보자. 내 퇴사하기 전에 반드시 한방 먹이고 만다.’
패트릭은 미처 알지 못했다.
유능한 인재로 낙점되는 순간부터 이미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능력이 썩 괜찮은 친구란 말이지. 지구로 넘어오면 바로 스카우트 해봐야겠어.’
복귀하자마자 부하에게 일을 모두 떠넘긴 할리는 오랜만에 용병 길드의 식당에 들러 폭풍 같은 식사를 시작했다.
‘믿음의 형태는 굳이 신앙이 아니어도 된다. 디아나가 좋은 예시를 제시해 줬으니 쓸 수 있는 방법은 전부 사용해 봐야지.’
휴버트 쪽 작업이 순조롭게 잘 풀리고 있다고 해서 이 훌륭한 장점을 묵혀만 두고 있을 순 없었다.
신성의 수급 루트는 다양할수록 좋았으니까.
“아! 할리 님! 여기 계셨군요!”
그렇게 용병 길드의 식당을 완전히 초토화하고 밖으로 나오던 순간.
할리는 뜻밖의 인물을 마주했다.
나비처럼 날아든 한 여인이 그를 끌어안았다.
남부인 특유의 건강한 구릿빛 피부에 몇 갈래로 땋은 갈색 머리, 흑요석처럼 빛나는 검은 눈동자를 가진 미인.
“아— 이 완벽한 근육··· 으히힛!”
“으잉? 미스티?”
“···핫! 아아! 할리 님! 정말 뵙고 싶었답니다!”
칼코스 부족 연맹의 대주술사이자 전전대 대족장의 딸 미스티였다.
남부에 있어야 할 그녀가 용병 길드가 있는 이곳 드라칼까지 찾아온 것이다.
“아가씨가 여긴 어쩐 일로?”
“아이, 참. 할리 님도. 투왕을 곁에서 보필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마침 지시하신 일도 다 끝나 현황을 보고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답니다.”
“지시한 일?”
잠깐 눈을 끔벅거리던 할리가 퍼뜩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고 보니 전 대족장 판테온의 난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던 남부를 수습하고 다시 체계적으로 잇는 일을 맡겨 두었었지.
그동안 줄곧 떨어져 있었던 바람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거 기회 아닌가?’
그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부족 연맹 쪽에도 휴버트 상회의 분점이 들어서 있었으나, 폐쇄적인 지역 특성상 그 효과는 다른 곳에 비해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투왕의 권위를 가진 자신이라면···.
“으하하핫! 그래, 그럼 슬슬 남부에도 다시 한번 들러봐야겠구만!”
“앗! 정말요? 분명 다들 기뻐할 거예요! 할리 님께 누가 되지 않기 위해 다 같이 열심히 힘을 모았거든요!”
“그래? 의외로구만. 원래 이런 일에는 꼭 분탕을 치는 놈들이 끼어있기 마련인데. 그런 녀석들은 없었나 봐?”
“아··· 말 안 듣고 제멋대로 나대는 종자들이요?”
그 말과 함께 순간적으로 미스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런 기색은 나타나기 무섭게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무렇지 않게 할리에게 찰싹 달라붙은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처음엔 다소 잡음이 있었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한번 날 잡고 진지한 ‘대화’를 나눴더니 다들 저희의 뜻을 이해해 주더라고요.”
“오호? 이거 푸닥거리 한 번 해야 할 줄 알았는데 의외인데?”
“히힛! 괜히 할리 님을 번거롭게 해드릴 순 없죠.”
그녀의 말에 할리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교통 정리까지 다 끝났다면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터.
“크하핫! 아주 마음에 들어! 이거 상이라도 줘야겠는데?”
“사··· 상이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길에 미스티가 얼굴을 붉혔다.
이어서 저도 모르게 침까지 꿀꺽 삼킨 그녀였지만, 할리는 이미 앞으로의 계획을 검토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래, 용병계와 남부 정도만 해도 나쁘지 않아. 규모 면에서는 휴버트 상회에 미치지 못할지 몰라도 믿음의 순도는 더 높을 테니까.’
휴버트처럼 금전적인 이득에 따른 믿음이 아닌, 용병왕과 투왕이라는 이름값에 담긴 신뢰.
그것이 바로 할리가 이때까지 쌓아 온 자산이었다.
“에이, 기분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고기 파티다! 어이, 미스티. 남부에서 같이 온 일행들도 다 불러와! 내가 전부 쏠 테니까! 으하하하!”
“앗! 네, 네!”
기분이 좋아진 할리는 그날 총 다섯 개나 되는 음식점을 거덜 내고서야 도장 깨기를 중단했다.
그 어떤 홍보보다 확실한, 왕의 귀환을 알리는 선전포고였다.
***
“이상 현상?”
“예, 혹시나 싶어 그동안 여러 루트를 통해 정보를 검증했는데 이쯤이면 확실하다고 봐도 될 것 같아요.”
서울 한복판에 세워진 헤테로시스 소유의 건물.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암막이 둘러쳐 진 그 공간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근래 국내에서 신고된 각성 건수가 평소의 세 배 이상으로 폭증했어요. 이능관리국 전송조사과에서도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게 단순히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현상이다?”
“네, 그것도 신고받은 건만 계산했을 뿐이니 실질적으로는 그 이상이라고 봐야겠죠.”
“흐음.”
진소란의 보고에 하인즈 2세가 굳은 표정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막 아우테리카에서 돌아왔다가 별생각 없이 이곳에 방문했거늘, 때마침 접하게 된 예상치 못한 보고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당분간 신도를 늘리는 일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지.’
물론 하인즈 2세의 신도를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따로 뭘 손 쓸 필요도 없이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고 봐야겠지.
‘애초에 모든 뱀파이어들의 정점에 서 있는 게 신혈인 하인즈 2세니까.’
뱀파이어의 세계는 철저한 계급 사회였다.
그런데 기존 혈맥의 시조인 성혈도 아니고 그 위에 군림하는 신혈의 뱀파이어라는 존재는···.
규격 외, 말 그대로 신(神) 그 자체였다.
‘불사왕 한스도 비슷한 경우였고.’
그리고 정도만 다를 뿐 주신의 천사이자 성자인 하인리히, 세계수의 대변자 하이 엘프 해리스, 마계의 16대 마왕 헬라 등도 따로 손 쓸 필요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잠깐, 그러고 보니 이거 일이 터지기 시작한 시점이···.’
그때 문득, 그의 뇌리에 하나의 가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이 신성을 싹틔워 세계의 비밀에 접촉하고 ‘그 존재’를 관측한 시기가 딱 이 이상 현상의 시작점과 맞물린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그럴 리가 없지.’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저 앞으로 닥쳐올 미래를 대비해 최대한 빨리 신성을 키우는 게 최선이었다.
“음?”
그런데 그 순간.
뭔가를 느낀 하인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로드? 무슨 일 있으신가요?”
곁에 있던 진소란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이미 무언가에 깊이 몰입한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볼 뿐.
‘이 신호는···.’
복잡하게 뒤얽힌 신성의 끈 중에서도 유독 굵은 하나에게서 온 반응.
불과 얼마 전에 이세계로 떠난.
강태산에게서 전달된 위기 감지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