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60)
#60
폭풍전야 (1)
창문 하나 없는 지하실.
빛 하나 없이 캄캄한 공간의 한가운데에는 돌로 만들어진 화로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시간이 되었군.”
인기척 하나 나지 않았던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내 그 장본인은 발걸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히 화로 쪽으로 다가가 거리를 두고 섰다.
그 순간.
화르륵—
화로에서 보라색 불꽃이 삽시간에 천장에 닿을 듯 솟구치더니, 이내 서서히 모닥불 정도의 크기로 줄어들었다.
그로 인해 보랏빛이 감도는 공간에는 어느새 화로를 둘러싼 대여섯 명의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모두··· 모였나.] [그래, 이번에 뒤진 얼간이만 빼고.]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서로 대화를 나누는 그림자들.
[뭐가 그리 급해? 서로 안부부터 묻고 천천히 하자고? 키키킥.] [넌 제발 닥쳐라. 입을 찢어 버리기 전에.]“모두 이번 소식은 들었나 보군.”
워낙 개성이 강한 이들이 모였다 보니 회의의 진행이 빠르지 않았다.
서로 친목을 다지고자 마련된 자리가 아닌 만큼, 빨리 이야기를 진전시키기 위해선 쓸데없는 말은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게 좋았다.
[아아, 들었지.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더군.] [크히힛~ 나도 그래. 세계수의 가지까지 가져가 놓고 그렇게 어이없이 뒤질 줄이야. 크킥킥.]마침내 제대로 진행되는 정기회의.
그들은 지난 일들에 대해 서로 아는 정보들을 교환했다.
“그럼, 교단과 하이 엘프가 어떻게 누라베를 찾아내 습격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군.”
[하! 세계수가 개입한 게 아니겠나? 그 멍청한 놈이 제물에게 제대로 목줄을 걸지 않았나 보지.] [흐흠~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 노인네, 저한테 봉인구까지 제대로 받아 갔는걸요?]다시 여러 의견이 오갔지만,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는 만큼 바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좀 더 조심할 필요가 있다···.] [불사왕의 파편을 독점하겠다고 혼자 지랄하던 마르코스에 이어서, 나름 잘 숨어 지내던 누라베까지. 이거 너무 긴장이 풀어진 거 아니야?]“그 불사왕과 관련해서 말인데···. 요즘 교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다시 이어지는 정보의 교환.
[그 불사왕의 후예. 우리가 이용할 수는 없을까?] [크히힛! 마르코스야 이미 뒤져버린 걸 어쩌겠어? 뜻만 맞는다면 손잡는 것도 나쁘지 않지!]보랏빛의 공간에서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의견 제시, 반박, 대안, 합의 등이 한참 동안 오간 후···.
“그 건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럼 다들 그 외의 별다른 안건은 없는 거겠지?”
[그럼요~ 제국은 언제나 평안하답니다.] [동부도··· 이상 없음···.]결론이 도출된 동시에, 역천의 서약의 정기회의가 종료되었다.
***
“진소란, 이것들도 전처럼 처리하도록.”
하인즈가 여러 업무를 보고 있던 진소란의 사무실에 찾아와 여러 가지 물건들을 잔뜩 늘어놓았다.
아공간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비롯한, 하나같이 값비싼 마도구들.
잠시 당황하던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빛냈다.
“와··· 로드, 이런 물건들은 어디서 계속 가져오시는 거예요?”
이미 이전에도 몇 번이나 봤었지만, 그녀는 재차 감탄사를 터트리며 그가 내놓은 물건들을 살폈다.
마도구는 귀환자들만 얻을 수 있다 보니 그 공급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 방법이 있지. 그보다 저번에 준비하라고 한 건 어떻게 됐지?”
“아, 후추요? 일단 사람들 시켜서 전부 다시 포장하고 보관해 놨어요.”
역시 부릴 사람이 있으니 편했다.
지시만 내리면 자잘한 문제들은 알아서 처리하니까.
‘플라스틱이나 비닐에 담긴 물건들을 그대로 팔 수는 없으니, 번거롭지만 한 번 더 손을 거칠 필요가 있지. 그래봐야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비하면 그 정도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구에서 후추는 별로 비싼 것도 아니었지만, 아우테리카에선 달랐다.
나름 고급 향신료인데다 주 생산지와 거리도 멀어 마진도 만족스러운 수준.
교역의 시작품으로 더할 나위 없었다.
‘처음엔 지구에서 만들어진 인공 보석 같은 걸 팔아볼까도 생각했는데.’
현대 기술로 만들어진 인공 보석은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구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오히려 불순물이 적어 깨끗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니, 그걸 세일즈 포인트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지구에서 만들어졌다 보니 마법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게 치명적이지.’
아우테리카에서 보석이 비싼 이유는 단순히 미학적인 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마법 실험이나 결계, 마도구를 만드는 등 신비를 보조하는데 다양하게 쓰이는 재료로서의 가치가 포함된 것.
그런 상황에 신비에 사용할 수 없는 불량품, 단순히 예쁘기만 한 보석을 팔았다가는 괜한 분란에 휘말릴 수 있었다.
‘사업을 시작하는 지금 괜히 시선을 끌어서 위험을 부담할 필요는 없지. 그건 나중에 자리를 잡고 나면 프리미엄으로 판매해 보자.’
물론 그 좋은 사업 아이템을 사장하기도 아까웠다.
그런 특이한 특성 또한 개성 있는 차별점으로 둔갑시켜 팔아치우는 게 장사 아닌가.
돈 많은 이들은 오히려 그런 희소성에 가치를 부여해 열광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지?”
생각을 정리한 하인즈가 주변을 둘러보며 진소란에게 물었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 확연히 줄어든 인원들.
대충 절반 이상이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아, 인천 쪽에 잠깐 문제가 생겨서요. 진석 씨가 직접 갔으니까 금방 정리될 거예요.”
헤테로시스가 몸집을 키우며 많은 이들이 그 그늘에 새로 합류했다.
기존 강경파는 물론 온건파와 중립파에 속해 있던 이들까지.
그중에는 강경파의 간부였던 진석이라는 감마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순종적이란 말이지.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으면 혈정으로 만들어 버리려고 했는데.’
지방 쪽을 담당하느라 별장에 오지 않았던 그는, 나중에 하인즈가 직접 찾아갔을 때 곧바로 그 자리에서 꼬리를 말고 충성을 맹세해왔다.
생존 본능에 충실한 그 덕분에 이후 강경파의 흡수가 빨라진 덕도 있어 나름 흡족하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알파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지 못한 건 여전히 아쉽지만. 놈도 이 정도로 보이지 않는다는 건 역시 이미 한국을 떴다는 의미겠지?’
8레벨의 흡혈귀로 추정되는 기존 강경파의 수장, 알파.
기회가 될 때 처리해 두려고 했는데 놈의 행적은 그날 이후 줄곧 오리무중이었다.
혈맹을 집어삼키면서 그 영향력으로 계속 수색하고는 있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태였다.
“정말 로드 덕분에 혈맹의 사정이 많이 나아진 것 같아요. 당연히 그를 주도하는 우리 헤테로시스의 발언권도 점점 커지고 있고요.”
하인즈로부터 비롯된 무력과 자금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한 헤테로시스는 혈맹을 주도해 급격하게 세를 불렸다.
물론 직접적으로 규모를 부풀리면 가디언이나 이능관리국에서 경계할 수밖에 없으니, 암중에서 뒷세계의 조직들에게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식의 은밀한 작업이었다.
‘그때 금괴를 팔았던 놈들도 휘하에 들어왔었지.’
마도구의 판로를 물색하는 데에 제법 쓸 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던가.
확실히 그때 거래할 당시를 떠올려 보면 나름대로 능력 있는 놈들이기는 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이사도 가고 해야 하는데···.’
그동안은 번천회를 알게 된 후, 그에 대한 계획을 세우느라 머리가 복잡해 사치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조금 여유를 부려도 될 테니 지금부터 천천히 준비해도 되리라.
‘물론 당장은 말고.’
“인천 쪽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지? 당장은 할 일이 없으니 내가 직접 가 보지.”
최대한 빨리 혈맹을 안정화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아우테리카를 뒤흔들 빅 이벤트를 코앞에 둔 상태.
이 이벤트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안방극장 : 마왕과 용사’ 작전이 시작되고, 하인즈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테니까.
***
하이 엘프 라포리의 불사왕 탐색이 시작된 지 보름째.
우선순위에 따라 그동안 제법 많은 숲을 탐색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하인리히는 하나의 후보군을 전부 훑은 후에 마련된 중간 회의에 동석해 진행 상황을 함께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이제는 그도 이번 작전에 깊게 관련된 만큼, 성기사단의 업무보다 이쪽을 우선하게 된 것이다.
‘그래봤자 뒤에서 참관하면서 수발을 드는 게 전부지만.’
라포리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조사가 끝난 지역의 서류를 정리했다.
“···흠, 가장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 지역들은 전부 훑었는데도 결과가 따라주지 않으니, 자신만만하게 나서 놓고 얼굴을 들 수가 없군요.”
민망한 듯한 라포리의 말에 성녀와 대주교는 그렇지 않다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라포리 님이 이렇게 노력해 주시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애초에 탐색 순서를 정한 것도 저희 교단 측이었고요.”
“사실 숲이 없는 완전히 다른 지역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지역을 크게 좁힐 수 있으니, 나쁜 일만은 아니지요.”
“덕분에 지금도 교단의 수색대는 숲이 없는 지역을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으니까요. 효율이 크게 증가한 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죠.”
그들의 말대로, 계속해서 운용 중이던 수색 인원은 사막이나 황무지를 비롯한 지역을 위주로 파견되었다.
물론 아직 숲의 탐색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였지만, 교단 측에선 미리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라티우스 대주교는 벽에 걸린 대륙 전도와 우선순위가 정리된 서류를 살폈다.
“그럼 다음 순위의 후보군을 살펴볼까요. 어디 보자··· 이번엔 대충 30% 전후의 지역들이군요.”
“하아, 이제 와선 그 확률도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지만요.”
“흠흠, 그야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성녀님.”
“앗! 그렇죠. 그것도 많은 분들이 노력한 결과일 텐데. 제가 너무 무신경했네요.”
성녀가 자책하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성과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 심적으로 조급해진 모양이었다.
“그럼,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내일부터는 이 지역들을 차례로 훑어보겠습니다.”
“아! 잘 부탁드립니다, 라포리 님. 피곤하실 텐데 이만 들어가 쉬시지요.”
그렇게 자리가 파해지고, 한스 수색 작전의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참관하던 하인리히도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드디어 인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군.’
탐색이 시작된 지 보름째 되는 날, 대륙 서쪽에 위치한 마물의 숲이 다음 후보군으로 포함되었다.
‘그래도 시간에 맞출 수 있어서 다행이야.’
방금 막 연구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하인리히가 숙소로 향한 것과 같은 시간.
[후흐··· 후흐하하핫—! 드디어 성공했다!]한 동굴 속에서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음산한 웃음이 울려 퍼졌다.
[역시, 이 한스 님에게 불가능이란 없는 법.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이런 것쯤은 별것도 아니지.]불사왕의 후예, 아크리치 한스는 검은 로브의 앞섬을 활짝 열어 갈비뼈를 노출하고 있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새하얀 갈비뼈의 허전한 틈 사이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하나의 물건.
마치 심장과 같이 주기적으로 맥동하는 검은 보석, ‘불사왕의 심장’의 파편이었다.
하지만 전과는 크게 달라진 부분이 있었으니.
그 모습이 선명하지 않고 불투명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크크큭···. 이 몸을 이용한 위상 아공간.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써 이 몸은 더욱 완전에 다가섰으니! 크하하핫!]그의 존재와 겹친 공간을 생성해 그곳에 「불사」로 추출한 심장을 넣었다.
쉽게 말해 한스의 몸뚱이 자체를 아공간 마도구로 만들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이었다면··· 아니, 살아있는 존재였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기행.
물론 제대로 된 방식이 아니라 완전한 단절을 포기하고, 공간도 갈비뼈 내부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정도 문제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처음의 목표는 이미 달성했고 말이지!’
몸 자체를 유사 아공간으로 만들면서 파편의 제한을 무시했으며, 흑마력을 수급하기 위한 통로도 원활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 존재도 쉽게 감출 수 있게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전체를 노출시키고 있을 때와 통로 하나로만 연결됐을 때, 그것을 숨기는 난이도가 같을 리가 없었다.
‘거기에 「불사」도 제대로 쓸 수 있게 되었고.’
이제 전신이 가루가 되더라도 통로를 통해 공급받은 흑마력으로 순식간에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선 공간을 통째로 갈라버리는 일격이나, 그것을 다루는 마법이 필수가 된 것이다.
‘그리고 한스가 그런 공격을 순순히 맞아 줄 리가 없지.’
여러모로 뿌듯한 결과.
마물의 숲에 라포리의 탐색이 시작되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