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68)
#68
각인 (1)
신전을 통해 해리스의 전언이 할리에게 전달되었다.
사실 필요도 없었지만, 남들의 시선에 따라 지켜야 하는 절차가 있었으니까.
할리는 친우의 여정을 기꺼이 축하해 주었고, 해리스는 엘븐 킹덤의 사절단과 함께 에나멜 대륙으로 향하게 되었다.
물론 당장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불사왕과의 일이 영 찝찝하게 끝난지라, 윗선끼리 아직 해야 할 이야기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절단의 엘프들은 하나같이 엘븐 킹덤의 엘리트들이었으니, 그 와중에도 기본 교육은 착실하게 이뤄졌다.
정령술과 궁술을 비롯해 우아한 숲의 요정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배우기 위한 그 과정에는, 그 혼자 참여하는 것이 아니었다.
“할리 님과 친구분이시라구요?”
북부 산맥에서 할리가 구해주었던 엘프 소녀, 세실리도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만난 기간이 길지는 않지만, 서로 마음이 잘 맞는지라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죠.”
“그래서 그런가? 해리스 씨에게서 뭔가 익숙한 냄새가 나는 거 같아서요.”
순간적으로 익숙한 아이가 오버랩되는 대사에 내심 움찔했다.
‘디아나 같은 말을 하네. 설마 눈치채진 않았겠지?’
라포리도 별말을 하지 않은 걸 보니 하이 엘프로서의 능력은 아닌 듯한데···.
그렇게 속으로 혼자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아! 세계수의 가지에서 느껴졌던 냄새랑 비슷하네요! 제가 그걸 하루 종일 끌어안고 있어 봐서 잘 알거든요.”
‘그 가지, 이 몸의 재료가 되어 사라졌답니다.’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세실리가 기시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흐음~ 그래서 라포리 님이 신경 쓰시는 건가···?”
그리고는 혼자 납득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저희 잘 지내봐요. 할리 님의 친구분이라고 하니, 제가 잘 챙겨드릴게요.”
작은 엘프 소녀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어깨를 활짝 펴고 으스댔다.
아무래도 자기 혼자 교육받다가 새로운 교육생이 오니, 선배인 티를 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하··· 예, 잘 부탁드립니다.”
그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이어진 정령술 강의.
“정령은 정령사와 함께 성장해 나가는 동반자입니다. 계약한 정령은 친화력을 통한 교감과 자연력을 공급받아 성장하죠. 그리고 계약은···.”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왜 그동안 해리스가 정령사가 되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호감이 가는 외모(친화력)와 충분한 재력(자연력)이 있다고 해도 결혼(계약)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절차가 필요한 법이었다.
제대로 상대를 인식하고 서로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야 뭐든 시작할 수 있었으니, 그 과정이 바로 정령술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잘해요? 처음이라면서요?”
그리고 그가 손끝에 자연력을 뭉쳐 다루는 모습을 본 세실리가 경계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옆에 작은 물의 정령을 소환한 채, 뭔가 조언을 하고 싶다는 듯 기대 어린 표정으로 이쪽을 힐끔거리던 얼굴은 어느새 떨떠름해진 상태였다.
그동안 수많은 에너지를 다뤄 온 가닥과 이세계 성장 보정, 아바타 성장 가속, 거기에 「세계수의 아이」의 효과까지.
그에게 이런 기초 중의 기초는 그저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호오, 습득이 굉장히 빠르군요. 이대로라면 곧 두 분의 진도를 맞출 수도 있겠는데요?”
강의를 맡은 엘프는 일이 편해졌다고 좋아했으나, 세실리는 오히려 눈에 불을 켜고 물의 정령을 다루는 데에 더 집중할 뿐이었다.
그녀도 하이 엘프의 자격을 갖춘 만큼 대단히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진짜 하이 엘프는 아닌 만큼 해리스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궁술이나 산악 기동 등 몸을 쓰는 일에 관해서는···.
“과연, 용병 일을 하다 왔다더니 신체를 다루는 건 제법이로군. 활 쓰는 방식에서 인간의 냄새가 나긴 하지만, 그 정도야 많이 쏘다 보면 교정이 되겠지.”
엘프 교관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선 육체파 선배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처음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하인리히의 「무골」과 「종합 무기술」로 궁술까지 미리 습득해 둔 상태였으니, 딴 사람들과는 출발선부터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흐엑··· 헥···.”
활을 들고 나무 위를 달리는 훈련이 끝나고, 세실리는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져 숨을 몰아쉬었다.
“으아··· 이, 이쪽은 제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요. 패배를 인정하죠. 제가 졌어요!”
···그녀의 마음속에서 우리는 언제부턴가 경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렇게 교육을 받은 지 며칠.
《개체가 반복된 훈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정령술」을 획득합니다.》
여러 요인들이 합쳐져 해리스는 빠르게 「정령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파직— 파직—
허공에서 작은 빛뭉치가 스파크를 튀겼다.
최하급 번개의 정령.
모든 정령은 정령사의 수준에 따라 함께 성장한다.
이 아이도 지금은 최하급 정령이지만, 그의 능력이 증가할 때마다 교감을 통해 계속해서 진화해 나갈 것이다.
“···네 이름은 와트다.”
파직— 파지직—!
‘볼트(Volt ;전압)’는 뭔가 흔한 느낌이고, ‘암페어(Ampere ;전류)’는 어감이 좋지 않으니 ‘와트(Watt ;전력)’였다.
그렇게 해리스는 정령사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
한스는 지구에서 범죄자 청소 중이고, 하인즈 2세도 지구의 세력을 다지는 중이다.
하인리히는 부상으로 입원 중이었으며, 해리스는 엘프들에게 교육을 받고 있다.
‘어쩌다 보니 지구에 둘, 대신전에 둘, 타라크에 둘씩 배치가 됐네.’
타라크의 두 아바타는 각자 사업과 사냥을 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휴버트의 후추는 10일에 한 번, 그것도 여유가 생길 때만 이계전송진을 사용할 수 있다 보니 공급의 안정성이 너무 떨어졌다.
그래서 그것은 프리미엄 상품으로 두고, 그간 챙긴 밑천을 바탕으로 「감정」을 이용해 다른 분야까지 발을 넓히고 있었다.
일단 상인에게 물건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사기적인 능력이었으니까.
그간의 장사를 통해 어느 정도 신뢰도도 쌓여서 어렵지 않게 순항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할리는···.
“오! 할리! 드디어 왔구만! 얼른 이리 와봐!”
구레나룻을 비롯해 얼굴에 털이 가득한 남부 전사, 투라바가 단골 주점으로 막 들어서는 그를 격하게 반겼다.
해리스를 대신전으로 보낸 후, 오랜만에 강철의 성채를 넘어 사냥하고 막 돌아온 할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왜 그래? 그동안 무슨 일 있었어?”
휴버트 상회도 한창 성장 중인 만큼 경비를 서는 용병들을 따로 고용하기도 했지만, 믿을 수 있는 이들이 직접 신경 써 주는 게 당연히 더 안전했다.
할리가 이번에 마음 편히 사냥을 다녀온 것도 베테랑 용병인 삼인방이 있어서였는데···.
‘휴버트한텐 별일 없었는데?’
그가 평소와 같이 위압적인 걸음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자리에 앉자, 할리 다음으로 덩치가 큰 근육 돼지 루왕이 그에게 잔 하나를 건네며 실실 웃었다.
“이번에 투라바가 기가 맥힌 걸 발견했다는데.”
“확실히, 할리가 좋아할 것 같긴 했지.”
눈가에 칼자국이 있는 다오도 술을 홀짝이며 맞장구쳤다.
“오? 그렇게까지 말하니 기대되는군! 뜸 들이지 말고 얼른 말해 보라고! 정말 좋은 정보면 오늘 술은 내가 다 살 테니! 하하핫!”
할리는 큰 기대는 하지 않으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 친구들은 다 좋은데 별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 떠는 일이 잦았으니까.
“이거 허리띠 풀고 마셔야겠구만!”
“투라바 덕에 오늘 뒤질 때까지 마실 수 있겄어!”
“거 친구들, 답답하게 설레발은 그만 치고 얼른 이야기나 해 보라고!”
삼인방에게 재차 핀잔을 주고서야 듣게 된 이번 정보는, 진짜로 솔깃한 내용이었다.
“남부 출신의 주술사가 이곳 타라크에 있더군! 저번에 말했지? 각인을 새길 수 있는 주술사에 대해서 말이야.”
남부의 전사라면 반드시 가지고 있다는 여러 종류의 각인들.
가짜가 진짜가 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요소였다.
“그거··· 정말 반가운 정보로군! 좋아! 일단 배터지게 마시며 이야기해 보자고!”
이내 그들은 옆에 술통을 잔뜩 쌓아두고 죽어라 마시며 용케 멀쩡하게 대화를 나눴다.
“흠흠, 내가 요즘 타라크 서쪽 거리에 갈 일이 좀 있었는데 말이지···.”
“이 친구 요즘 그 근처 포목점 아가씨한테 작업 걸고 있잖어.”
돼지가 털보의 말을 끊으며 낄낄거리자, 그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연신 술을 들이켰다.
아무래도 연애 사업은 별로 순탄치 않은 모양이었다.
“크으~ 암튼! 내가 지름길로 가려고 거기 골목을 지나가다 딱 마주치고 말았지 뭐야!”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남부의 주술사가 있었을 줄이야.
“상황을 보아하니 없이 사는 사람들 잔병이나 고쳐주며 겨우 밥벌이 하며 사는 것 같던데. 실력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더군.”
“기껏 주술로 한다는 게 그런 거면 별 볼 일 없는 거 아냐?”
“글쎄? 사람 사정이야 제각각이니 모르는 일이지. 그리고 주술사면 전사의 각인 정도면 새길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의견이 분분해졌지만, 일단 한번 만나 보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할리는 털보 투라바와 함께 주술사가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흐음, 그간 제법 타라크에 오래 머물렀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처음 와 보는 것 같군.”
“우리 같은 용병은 어지간하면 이런 곳까지 올 일이 없으니까. 특별한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빈민가까지는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허름한 것이 도시의 노동자들이 주로 사는 지역인 것 같았다.
“용병들이 여긴 무슨 일이지? 그리고 저 차림새는···.”
“쉿! 못 본 척해.”
“빨리 가자고.”
언제나와 같이 위풍당당한 모습의 할리와 험상궂은 용병 그 자체인 털보가 나란히 길을 걷자, 지역 주민들이 슬금슬금 피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 구역의 건달로 보이는 청년들도 슬쩍 시선을 돌리고는 재빠르게 사라졌다.
“···할리, 그 복장은 정말 계속 그렇게···.”
“응? 이 멋진 차림이 어때서! 진정한 전사의 기개가 느껴지지 않나?”
“···그래, 마음대로 해.”
물론 항상 있는 일이었던 만큼 그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털보는 아직도 조금 민망한 듯한 기색이었다.
“그래서 그 주술사는 어디지? 제법 들어온 것 같은데.”
“다 왔어. 저기 저 골목만 지나면···.”
그리고 골목을 지나고 처음 마주한 것은, 할리에게 굉장히 반가운 장면이었다.
“아~ 노인네 참 말귀를 못 알아먹네.”
“그니까, 치료비를 조금만 높이면 다 해결되는 문제라니까?”
“거 우리가 너무 곱게 대해주니까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야?”
얼굴에 문신이 가득한 왜소한 노파의 멱살을 잡고 위협하는 파락호들.
사건의 냄새가 났다.
“오호라~?”
할리의 입꼬리가 주욱 올라가며 사나운 미소가 지어졌다.
주술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러 온 마당이었는데, 굉장히 좋은 타이밍이 아닌가.
자신의 무력을 과시할 기회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 놈들에게 다가갔다.
“응? 어··· 어?”
“야, 야! 잠깐 멈춰봐···.”
그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파락호들이 일제히 행동을 멈췄다.
눈치 빠른 털보는 어느새 그들이 도망갈 길목을 막아선 채였다.
하지만 할리에게는 아쉽게도, 따로 무력행사할 것도 없이 일은 한순간에 끝나버렸다.
도망도 치지 못한 놈들을 그 위압적인 근육으로 하나하나 어깨동무해 주며 지그시 눈을 마주쳐 주자, 하나같이 오줌을 지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푼돈이나 뜯는 놈들에게 「야성」까지 사용한 건 좀 심했나?’
실력도, 깡도 부족해서 용병조차 되지 못한 놈들이다.
그런 이들이 몬스터 이상인 그의 기세를 코앞에서 버티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니들 얼굴 기억했다? 이 형님들이 저 할매한테 볼일이 좀 있으니까, 알아서 처신 잘해라?”
한쪽에서 털보가 문신이 새겨진 얼굴을 들이대며 그들을 조곤조곤 타일렀다.
자상하게 어깨를 다독여 주는 모습이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고, 파락호들이 달아나면서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 와중에 멱살이 잡혔던 노파는 어느새 태연한 기색으로 집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끌끌끌···, 남부 출신 야만인들이 여기까진 무슨 일로 왔누?”
“거 야만인이라니, 요즘 그런 말 하면 남부인들에게 돌 맞소, 할매.”
“암만 봐도 저치는 모범적인 야만인 그 자체인데, 뭔 헛소릴 하는가? 내 젊었을 적 보던 모습이랑 똑같구먼. 흘흘···.”
“끄응, 저 양반은 그··· 에휴. 그보다 전사가 주술사를 왜 찾아왔겠소? 각인 새기려고 온 거지.”
뭐라 한 소리 하려던 털보가 한숨을 내쉬고는, 얼른 본론을 꺼냈다.
저 복장은 도저히 어떻게 변명할 수 없었으니까.
“흐음, 한 명은 제법 노련한 전사인 듯하고. 다른 하나는 복장은 모범적인 남부 전사 그 자체인데, 몸에 각인 하나 없구먼. 알고 있겠지만, 각인은 아무나 새길 수 없··· 응?”
말을 이어가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노파가 묘한 빛이 감도는 눈길로 그들을 훑었다.
그러다 그 시선이 할리를 향한 순간, 줄곧 태연한 기색이던 그녀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더니 곧바로 떨떠름한 표정으로 변했다.
“뭐야? 이 괴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