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74)
#74
브로코슬락 클랜 (1)
해리스는 엘븐 킹덤의 사절단과 함께 며칠에 걸쳐 이온 대륙의 동부로 향했다.
‘확실히 교단의 위세를 통하니 대륙을 횡단하는 것도 별거 아니네.’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영향력을 보이는 주신교단인 만큼, 그들의 보증이 있다면 어느 지역이든 이동을 허락받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몇 개의 신전을 거쳐 동부에 자리한 공화국에서도 가장 동쪽 끝에 도착한 일행은 곧바로 인근의 숲으로 향했다.
“그··· 저희 바다를 건너가야 하지 않나요?”
그 의문의 목적지에 세실리가 의문을 표하자, 라포리가 부드럽게 웃음을 지어주었다.
“직접 바다를 건너면 위험하기도 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습니까. 세실리 양, 기억해 두세요. 세상의 모든 나무의 뿌리는 세계수이시고, 하이 엘프는 그분의 선택을 받은 존재입니다.”
쉽게 말해 하이 엘프는 세계수의 힘을 빌려 어떤 먼 곳에 있는 숲이라도 이동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한스를 탐지할 때도 그렇고, 생각 외로 하이 엘프의 능력이 대단한데? 아니, 세계수의 힘을 이용한 거니까 당연한 건가?’
물론 이동해야 하는 거리가 멀수록 소모하는 힘도 커지는지라, 최대한 거리를 줄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 생각하면 신전의 게이트를 통해서만 장거리 이동이 가능한 주신교단보다 더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 엘프만 쓸 수 있다는 점만 빼면 말이지. 의미 없는 비교였네.’
엘프 전체에서 열 명도 안 되는 그들을 이동에만 써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자, 그럼 지금부턴 제 뒤를 잘 따라오시면 됩니다. 일행과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하세요.”
라포리의 몸에서 시원한 기운이 퍼져나가 그들의 주변을 감쌌다.
그리고 일행은 초행길인 세실리와 해리스가 낙오되지 않게 대열의 중간에 세운 채로, 선두의 라포리를 따라 숲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래도 며칠은 이렇게 더 이동해야 할 겁니다. 이제 급할 것도 없으니 천천히 가도록 하죠.”
올 때야 최대한 빨리 세실리를 구출하기 위해 서둘렀다지만, 돌아가는 길에서도 그렇게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장수종인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느긋한 편이었으니까.
그렇게 그들은 어느새 몽환적으로 변한 분위기의 숲길을 가로질러, 대양을 넘어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
하인즈 2세는 대륙 서부 탈리아 왕국의 수도, 탈라리아에 입성했다.
극한까지 「은폐」를 활성화해 내부의 기운을 감추는 데에만 집중한 터라, 그의 정체를 알아챈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너무 비싼데··· 좀만 깎아 주소.”
“무슨 말씀을! 이 정도면 남는 것도 없수!”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도시의 풍경이었다.
‘곳곳에 뱀파이어들이 있기는 한데··· 과할 정도도 아니고, 그나마도 철저하게 숨겨져 있군.’
하인즈는 길을 걸으며 느긋하게 주변을 훑었다.
그는 초월적인 감각과 훨씬 높은 수준의 뱀파이어라는 점 때문에 알아낼 수 있었지만, 그들의 은신은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수준이었다.
하긴, 아무리 영향력이 크다고 해도 이곳은 주신교단의 신전까지 있는 일국의 수도였다.
어둠의 존재인 뱀파이어들이 대놓고 활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겠지.
‘놈들을 어떻게 흔들지 고민해 봐야겠는데. 곧바로 본거지로 쳐들어가는 건 아직 시기상조니까.’
그곳에 모여 있을 전력도 전력이거니와, 놈들은 오랜 세월 이 왕국의 그림자에서 암약해 온 기득권층이었다.
괜한 소란을 일으켜 봤자 앞으로의 일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터.
결국 바깥에서부터 조금씩 갉아먹어 빈틈을 유도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그들의 내부 사정을 잘 알만한 이를 자신의 편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정제혈정」이 있으니 그 정도야 간단하지. 그럼 일단 적당한 뱀파이어 하나를 회유해 보자.’
그 과정에서 약간의 무력과 강압이 조금 포함되긴 할 테지만, 이는 그 당사자에게도 절대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헤테로시스를 키우며 「정제혈정」을 통한 강화 효과를 몇 번이나 체감했으니까.
그의 피 한 방울은 뱀파이어들에게 영약이나 다름없는 기연이었다.
‘마침 저쪽에 괜찮아 보이는 타깃이 있군. 일단 저 녀석을 시작으로··· 응?’
인기척 없는 주택의 2층 창가에서 뱀파이어 하나가 기척을 죽이고 있는 게 감지되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자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뭔가 익숙했다.
‘무슨 수라도 써 놨는지 흐릿하긴 한데···. 이건 설마?’
애초에 하인즈에게 뱀파이어 지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 아잔투에서 싹 쓸려나갔으니 남은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이런 데서 경계를 서고 있을 만한 인물이라면 역시···.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한 장본인은, 역시 그가 잘 알고 있는 뱀파이어였다.
‘로실리카. 여기에 있었네.’
하인즈 2세가 처음 뱀파이어가 되었을 때 그의 교육 담당이었던 잔혈.
아잔투에서 불사왕의 파편 탈취 사건이 시작된 이후 그 행적을 알 수 없었는데, 어떻게 다시 수도로 배치된 모양이었다.
‘교단과의 충돌로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살아 있었네?’
한때 대대적인 충돌이 있었던 만큼 제법 많은 수의 뱀파이어들이 사살되었다고 들었다.
아잔투에서부터 시작된 여러 고난을 겪고도 기어코 살아남은 걸 보니 명줄 하나는 질긴 듯했다.
하인즈는 조용히 「투명화」까지 사용해 그녀가 있는 건물 내부로 스며들었다.
“하아~ 대낮부터 이게 무슨 신세람. 요즘 피부 거칠어졌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해?”
조용히 주택 내부로 잠입한 그의 시선에 연신 투덜거리는 로실리카의 모습이 들어왔다.
사방이 암막 커튼으로 뒤덮여 어두운 방은 피로 그려진 온갖 종류의 혈마법 결계가 가득한 상태였다.
내부에 있는 이의 기척을 지우는 종류부터 시작해 바깥 감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보조 장치, 거기에 침입자에 대한 경보와 방어 결계는 기본이었다.
‘물론 나에게는 의미 없지만.’
「피의 신비」로 결계를 파악하고 「은폐」의 힘으로 가뿐히 무시하며 로실리카의 뒤로 다가갔다.
‘감시자가 죽으면 발동하는 알림 장치가 있긴 한데, 내부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하는 기능은 없네. 마침 잘됐어.’
그녀의 뒤에서 가볍게 결계들을 훑어보며 「투명화」를 해제했다.
하지만 여전히 기척을 죽인 상태라, 그녀는 하인즈의 등장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창밖만 살피고 있었다.
“낮에는 푹~ 자야 피부가 상하지 않는···.”
“로실리카.”
그녀의 몸이 움찔하며 순간 정지했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입이 방정이라··· 응?”
곧바로 뒤로 돌며 사과하던 로실리카는 하인즈의 얼굴을 보며 흠칫했다.
결계를 무시하고 나타난 데다 그녀의 이름까지 알고 있어서 당연히 상관이라고 생각했는데, 처음 보는 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당황한 눈치였다.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하지만 앞선 여러 요인 때문인지, 그녀는 긴장을 유지하며 경계하는 기색을 비치면서도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전에 함께할 때와는 외모도 체격도 많이 달라졌으니, 그를 몰라보는 건 당연했다.
“하인즈다.”
“하인즈···?”
딱히 이름을 숨길 생각은 없어 솔직히 말했지만, 그녀는 그저 동명이인이라고만 생각한 듯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혹시 저희 클랜의 손님이신가요?”
자신이 어떻게 하지 못할 수준의 강자라는 것을 느꼈을까, 로실리카는 경계하면서도 계속해서 정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 손님이지.”
“아! 그럼 이쪽이 아니라···.”
“초대받지는 않았지만.”
그 말이 끝난 직후.
쉬익—!
그녀의 오른손 끝에서 다섯 줄기의 핏줄기가 하인즈에게로 날카롭게 휘둘러졌다.
동시에 왼손은 이상을 알리기 위한 결계의 한 축으로 뻗어졌지만···.
“크흑?”
이미 사방에서 뻗어 나온 핏빛 사슬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아, 움직임은 물론 마력의 유동까지 철저하게 차단된 후였다.
“말도 안 돼! 설마, 진혈? ···여긴 브로코슬락의 영역입니다! 이건 협정 위반이에요!”
그 절대적인 격차에, 그녀는 하인즈를 다른 클랜의 진혈이라고 생각했는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하인즈는 그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만? 이거 어쩌면?’
마침 성능 좋은 은신의 결계 내부에 있겠다, 그는 「은폐」로 감추고 있던 뱀파이어의 기운을 슬쩍 내비쳤다.
극한의 혈액 통제력과 압도적인 혈마력 제어로 원하는 부분만을 따로 추출해서, 극히 일부만을 노출한 것이다.
그리고 피에 민감한 뱀파이어인 로실리카는 그곳에 담긴 피 냄새를 곧바로 알아챘다.
“어··· 어? 우리 클랜? 아니, 뭔가 다른데···. 어라?”
최대한 집중해서 원본에 가까운 기운만을 뽑아냈는데, 역시 완벽하게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그녀가 혼란에 빠지기에는 충분했다.
그녀의 사고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 하인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브로코슬락의 방계다.”
그리고 항상 해왔던 대로, 여러 그럴싸한 정보를 토대로 입을 털기 시작했다.
뱀파이어의 세계에는 제법 많은 분파가 존재했다.
어떠한 이유로 ‘피의 종속’의 간섭에서 벗어난 이들이 독자적으로 세력을 꾸리며 갈라져 나온 지류(支流).
그 뿌리는 같더라도 세대를 거치며 점점 차이가 나기 시작하고, 끝내 완전히 별개의 세력이 된다.
하인즈는 그들을 떠올리며 적당히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대충 그들은 그저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을 뿐이며, 자신은 그간 박해받아왔던 방계로서 주도권을 쥐고자 할 뿐이라는 얘기였다.
거기에 이건 외부에서의 침략이 아닌 내부에서 벌어지는 경쟁이고, 결코 클랜 전체에 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개소리의 향연.
하지만 일단 있는 사실을 토대로 이야기를 만든 데다, 하인즈가 은연중에 「피의 신비」를 이용해 미약한 암시를 곁들인 터라 큰 의문을 품지 못했다.
‘그런데 또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기도 하지.’
일단 그의 뿌리가 브로코슬락인 것은 맞지 않은가.
“저기··· 저는 일개 잔혈일 뿐인데, 대체 왜···.”
“나를 따르면 너에게 힘을 주마. 너는 그저 약간만 내 일을 도와주면 된다.”
굳이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그녀의 거부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였다.
「정제혈정」의 종속에는 마음마저 절대적으로 충성하게 하는 세뇌 효과는 없었으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그녀가 거절의 말을 꺼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 지금까지 잘 잡고 있던 줄을 놓고 생전 처음 보는 이를 따를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아! 혹시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인데.”
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웃음기 서린 하인즈의 목소리가 그녀의 말문을 막았다.
“너에게 선택권은 없다.”
마음 편히 포기하고 순순히 따르라고 이런저런 말을 꺼냈을 뿐.
일단 「정제혈정」으로 종속이 되면 돌이킬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어서라도 그를 따르게 될 것이다.
하인즈의 손이 떨떠름한 표정의 로실리카에게 뻗어졌다.
***
결국 자포자기한 로실리카에게 순조롭게 협조를 구할 수 있었다.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는 분위기이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정제혈정」으로 강해진 자신의 힘에는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로 인해 얻게 된 브로코슬락 클랜의 내부 정보들.
물론 그녀는 아직 잔혈인지라 고급 정보는 별로 없었지만, 이곳에 오래 머무르고 있던 만큼 제법 쓸 만한 정보들도 건질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수도 탈라리아의 감시망을 총괄하는 진혈, ‘프리지아 브로코슬락’에 관한 정보였다.
“프리지아 님은 특이한 분이셔서요. 낮에 자주 산책하시거든요. 그, 인간들의 관심을 받는 것을 즐기신달까···.”
화려한 차림으로 수도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쇼핑 등을 즐기는 철없는 귀족 아가씨.
그것이 그 진혈이 내세우고 있는 위장 신분이었다.
“그분의 감지 영역은 어마어마하다고 들었어요. 상업지구에 있으면 성문 바깥까지 범위에 들 정도로. 사실 수도의 절반 정도는 혼자서도 감시하실 수 있을걸요?”
듣고 보니 굉장히 익숙한 인상착의였다.
하인리히를 주신교단에 입교시키기 위해 하인즈 2세가 수도에 도착한 첫날.
그때 맞닥뜨리는 바람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진혈이었다.
‘아··· 생각나네. 마안(魔眼)을 사용하던 뱀파이어였지.’
갑자기 뒤에 나타나서 동족 포식을 추궁하던 것을, 다음에 두고 보자고 여기면서 소환 해제로 도망갔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보게 되었네.’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사실 곧바로 피한 만큼 딱히 원한이랄 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감정이 있는 상대도 아니었으니···.
‘우리 오랜만에 얼굴 좀 봅시다.’
하인즈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