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81)
#81
엘븐 킹덤 (1)
몽환적인 분위기가 이어졌다.
수많은 바람의 정령들에게 휘감긴 채 떨어져 내리는 세계수의 열매와, 형형색색 빛나는 온갖 정령들에 둘러싸인 세실리.
그녀의 주변은 몰아치는 바람과 반짝이는 빛무리, 들썩거리는 대지와 빠르게 자라나는 새싹까지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곳을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자연력이 밀집해, 그녀와 가까이 있던 일행들도 자연스레 더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거리를 벌리던 해리스는 알 수 있었다.
어느새 무수히 많은 엘프들이 근방을 둘러싸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하긴 하이 엘프의 개안 의식은 쉽게 볼 수 없다고 했었지. 이번 세실리의 등장도 굉장히 오랜만이라고 하니까.’
그리고 그녀가 있는 방향에서 휘몰아치는 자연력의 폭풍을 온몸으로 맞으며, 그는 불현듯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거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해리스는 정신을 집중하고 크게 심호흡했다.
상쾌한 공기가 폐부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자연력과 정령의 기운이 듬뿍 담긴 아주 영양가 있는 공기가.
그야말로 수련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이번에 고유스킬을 강화하며 아바타의 잠재력과 성장 속도가 한층 증가해서인지, 전보다 기운을 다루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흐읍— 후우···.”
심호흡이 연신 이어졌다.
눈으로는 세실리의 개안 의식을 지켜보며, 신경은 온통 주변에 넘쳐나는 기운을 몸속으로 끌어오는 데 집중했다.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그녀가 열매를 입에 가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라포리가 이쪽을 돌아봤지만, 이전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밀도의 기운에 취한 해리스는 그런 사소한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세실리가 세계수의 열매를 온전히 수습한 순간.
《개체가 조건을 달성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자연 친화」를 획득합니다.》
해리스도 나름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후우···.”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세실리를 살펴보니, 어느새 정신을 잃은 그녀가 일단의 엘프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열매가 매달려있던 싱싱한 세계수의 가지가 꼭 쥐어진 채였다.
“하이 엘프 친위대입니다. 이제 막 개안한 만큼 정신을 차릴 때까지는 안전한 곳에 모실 필요가 있으니까요.”
라포리가 조용히 그에게 다가오며 첨언해 주었다.
“세실리 님은 한동안 계속 잠들어 계실 겁니다. 급격히 늘어난 기운을 안정시킬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렇군요. 하긴 그 엄청난 기운의 유동 한가운데에 있었으니 당연한 거겠죠.”
“해리스 님도 대단하시던데요. 왜 세계수께서 눈여겨보시는지 알 것 같더군요.”
역시 그는 해리스가 뭘 하고 있었는지 눈치챈 것 같았다.
“아, 마침 좋은 기회 같아서요.”
“배운 지 얼마나 되셨다고 그 정도 기운 통제라니, 역시 그··· 음?”
연신 칭찬의 말을 쏟아내던 그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해리스의 등 뒤에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뭔가를 봤는지 상당히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기운을 한껏 받아들이느라 예민해진 상태였건만, 자신의 감각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라포리의 반응에 순간 오싹해진 해리스가 급히 뒤를 돌아본 순간···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나뭇가지 하나를.
“······?”
초록 이파리들이 무성하게 매달린, 아주 싱싱한 나뭇가지였다.
“허, 확실히 세계수께서 해리스 님에게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이런 선물까지 따로 챙겨 주시다니.”
‘선물?’
자세히 살펴보니 아까 세실리의 손에 들려 나간 가지처럼 내부에 충만한 자연력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차이점이라면, 이 가지는 처음부터 열매가 맺혀있지 않았다는 것 정도랄까.
“세계수께서 직접 내려주시는 가지는 특별하지요. 보통은 개안 의식처럼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그 당사자에게만 내려주시는 건데···.”
그리고 그것은 무기나 장신구로 가공되어 일종의 성물이나 다름없는 성능을 발휘한다고 한다.
그런 것인 만큼 하이 엘프조차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귀물이라는 것 같았다.
해리스는 자신의 앞에 둥둥 떠 있는 나뭇가지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러자 그곳에 내재된 기운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내가 기척을 느끼지 못한 거구나.’
마치 자연 그 자체를 쥔 것처럼 자연스럽게 환경과 동화되는 듯한 느낌.
안 그래도 의식의 여파로 주변에 자연력의 농도가 높은 상태였으니 알아채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득 한 가지 호기심이 생겼다.
“그럼 라포리 님께서도 개안하실 때 세계수께 이런 가지를 받으신 건가요?”
“물론이지요. 저는 그 기운을 압축시켜서 한 쌍의 장신구로 만들었지요.”
그 감회에 젖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순간적으로 마음이 불편해졌다.
해리스는 슬쩍 자신의 팔목에 걸린 팔찌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마 그게 이 팔찌는 아니겠죠?”
“하하, 그건 아닙니다. 저는 반지로 만들어 청혼하는 데 사용했으니까요.”
부담감이 덜어진 대신 뭔가 미묘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지금 자기 손에 들린 가지로 만든 장비는 이 팔찌 이상의 물건이 된다는 뜻이니, 또 나쁠 것은 없는 이야기였다.
“역시 결혼을 하셨군요.”
“아, 제가 말을 하지 않았었나요? 제법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반지를 끼고 계시지 않은데···.”
“제 반지는 딸에게 물려줬지요. 이제 저보다는 그 여린 아이에게 더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라포리는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표정이 되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보기 좋네.’
가족을 생각하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그를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해리스 님도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자마자 세계수께 인정받으시는 모습을 보니, 저도 마지막으로 보람찬 일을 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군요.”
“마지막이요?”
“저도 슬슬 은퇴할 나이가 되어서 말이지요. 이번 이온 대륙 행이 제 마지막 공식 일정이었습니다.”
해리스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매끈한 피부를 가진 30대 초반의 미청년이었다.
“아, 물론 일손이 부족한 만큼 바로 물러나진 않을 겁니다. 다만 이제 전면에서 일을 주도하는 일은 없어지겠지요.”
그런 해리스의 시선을 오해했는지, 그는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마침 새 하이 엘프가 탄생해서 한시름 놓았습니다.”
“그···렇군요. 정말 다행이네요.”
물론 그것에 대해 대놓고 지적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자신 또한 동안의 일족인 엘프 중 하나였으니까.
***
엘븐 킹덤이 있는 에나멜 대륙은 그들이 건너온 이온 대륙의 오분지 일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우테리카에서 이온 대륙이 과하게 클 뿐이지, 에나멜 대륙도 절대 작은 편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북서쪽에 위치한 것이 바로 엘프들의 나라인 엘븐 킹덤이었다.
‘뭔가 생각하던 것과는 느낌이 다른데.’
지구 매체의 영향 탓인지, 엘프라고 하면 숲의 요정 같은 이미지가 강했다.
자연을 벗 삼아 나무 위에서 생활하는 채식주의자들 같은 고정관념이 있었는데···.
‘여기도 상당히 문명이 발달했단 말이지. 길거리 공연 같은 것도 많고.’
물론 처음 이미지대로 나무 위에 세워진 목조 건물들도 상당히 많았지만, 땅 위에 지어진 석조 건축물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것들도 전부 자연 친화적인 건축양식을 하고 있는 게 대단하긴 하네.’
처음 엘븐 킹덤에 발을 디디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확실히 깨닫긴 했지만, 이곳은 유독 세련된 건축물들이 많았다.
‘수도니까 당연하려나.’
이곳이 바로 엘븐 킹덤의 수도, ‘드라샤’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커다란 세계수를 둘러싸고 형성된, 숲과 문명이 어우러진 도시는 묘한 이국적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해리스는 지금 한 커다란 건축물 안에 있었다.
세계수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지구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크기의 나무와 한데 어우러진 건물이었다.
뿌리 부분을 둘러싼 넓은 석조 건물과 자연적으로 형성된 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목조 건축까지.
하나의 예술 작품과도 같은 이 건물은 바로···.
“해리스 씨라고 하셨죠? 이번에 세실리 님과 함께 이온 대륙에서 오셨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요?”
“그곳은 도저히 살 곳이 못 된다던데요. 이번에 세실리 님도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셨다고···.”
“아, 저도 들었어요. 라포리 님께서 가시지 않으셨다면 큰일 날 뻔했대요.”
옆에서 어린 엘프들이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이곳이 바로 엘븐 킹덤의 교육기관 중 하나, 드라샤 아카데미였다.
‘하나같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이기는 하지만, 엘프들의 기준에서는 어린 게 맞겠지.’
그 외견은 십 대 중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 각양각색으로, 드라샤 아카데미는 유년기를 지난 엘븐 킹덤의 유망주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성장해서 나라의 대들보가 될 이들이 교육을 받는 곳.
해리스는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의 정석을 밟게 된 셈이었다.
“아하하··· 네, 네. 그럼요···. 아 전 괜찮았습니다. 좋은 동료들이 많았거든요. 예.”
지금은 과한 관심에 부담스러울 뿐이었지만.
책이나 이야기로만 바깥세상을 접한 이들이었으니, 그 호기심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단순히 다른 지역에서 온 것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대륙에서 바다를 건너온 이가 갑자기 나타났으니 뭐라도 묻고 싶겠지.
하물며 그들은 이제 같은 교육생 신분이 아닌가.
“전 용병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정령을 다루는 법도 알지 못했던 터라, 주로 몸을 사용해서 싸움을 했었는데···.”
이론 교육이 끝난 직후의 쉬는 시간, 원활한 대인관계를 위해 해리스가 적당한 에피소드를 풀어놓으려고 한 순간이었다.
탕—!
한순간 들려온 소음에 모두의 눈길이 그쪽으로 향했다.
양손으로 책상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선 푸른 머리의 여성이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에도 위축되지 않고, 도도하게 턱을 추켜올리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끄러워서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는데, 좀 조용히 해 주시겠어요?”
그녀의 말은 해리스의 주변에 모인 이들 모두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그 파란 눈동자는 정확히 그만을 직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절대 호의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눈빛이었다.
‘뭐야, 저 여자는?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자신 때문에 소란스러워진 게 마음에 안 들었다 하더라도, 반응이 좀 과한 면이 있었다.
어째서 초면인 상대에게 저런 시선을 받아야 하는지 그가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앗, 저희가 너무 떠들었나 보네요···.”
“흠흠···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해리스 씨, 다음에 다시 얘기해 주세요.”
그 와중, 해리스의 옆에 몰려있던 이들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확실히 지금이 더 편하기는 했지만, 갑작스럽게 흘러가는 상황에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저 여자가 상당히 영향력 있는 모양인데.’
다시 시선을 돌려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든 여성을 바라보았다.
공들여 손질한 듯한 푸른 장발과 치켜 올라간 날카로운 눈매, 도도함을 넘어 오만함이 느껴지는 표정까지.
‘음, 어딜 어떻게 봐도 귀한 집 따님이로군.’
그것도 상당히 까탈스러워 보이는 귀족 아가씨였다.
지금까지 만난 엘프들이 대부분 온화한 성품을 가진 인격자들이었기에 오히려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교육이 끝난 직후.
“흐흥—”
해리스의 앞을 지나던 그녀가 잠시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시선이 그의 팔목에 걸린 팔찌에 잠시 머물렀지만, 그녀는 곧 코웃음을 치며 몇 명의 패거리와 함께 고상한 발걸음으로 강의실을 나섰다.
‘뭐지?’
그가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고 있던 도중, 주변 사람들에게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샤피론 실베스티.
예상했던 대로 상당한 명문가 출신이었다.
하이 엘프를 제외하면 신분의 차이가 없는 엘프들이었지만, 오래된 가문은 그 역사만큼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에나멜 대륙으로의 대 이주 당시부터 엘븐 킹덤을 세우는데 한몫한 가문이면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그녀에 대한 정보 중에서 해리스가 놀랄만한, 예상치 못했던 사실이 하나 포함되어 있었다.
‘이건 진짜 예상외인데.’
왜냐하면 그 아가씨가 바로.
그와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하이 엘프 ‘라포리 그랜우드’의 외동딸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