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86)
#86
피카올 대신전 (1)
로셀리아 대신전의 한 훈련장.
“하압!”
챙—!
이제는 은퇴한 전 팔라딘 루터스는 자신의 앞에서 검을 휘두르는 청년의 공격을 쳐내며 내심 감탄했다.
‘성장 속도가 더 빨라졌다.’
안 그래도 교단에서 특혜를 줄 정도의 잠재력을 지닌 인재라 나름대로 주목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그 성장에 가속도가 붙었다.
도저히 그 한계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하인리히 랜드가드···.’
교단의 윗선과 성녀까지 직접 나서 그를 지원하는지라 딱히 내색하진 않았지만, 루터스는 그를 밀어주는 상황을 내심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잠재력과 가능성은 인정한다만, 이제 성기사로 서임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햇병아리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운다고 생각한 것이다.
‘성기사에겐 신성력이 전부가 아니지.’
물론 그 믿음의 증명은 충분히 존중하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뒤에서 보호받는 사제도 아닌 최전방에 서야 하는 성기사에게는 일신의 무력이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사실 처음부터 하인리히의 무력이 부족하지도 않았다.
단장급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지간한 상급 성기사 수준은 됐었으니까.
“흡—!”
그의 검이 한순간에 무리한 방향으로 꺾이며 루터스의 명치로 찔러 들어왔다.
손목에 어마어마한 부담이 가해지는 방법이었지만, 하인리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채앵—!
아무렇지 않게 이어진 방어에 튕겨 나간 검이, 그 반동까지 이용해 반원을 그리며 곧바로 다리를 베어들어 갔다.
루터스는 그 공격마저 어렵지 않게 쳐냈으나···.
‘가볍다?’
공격에서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걸 느낀 즉시, 그는 자리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후웅—!
그의 발목이 있던 자리를 철퇴처럼 매섭게 훑고 지나가는 금속 덩어리.
갑옷으로 전신을 감싼 하인리히의 다리였다.
그 공격에 루터스의 눈가에 이채가 띠었으나, 하인리히는 혀를 차며 아쉬워할 뿐이었다.
‘내가 당한 대로 써먹어 봤는데, 안 통하네. 상대가 좋지 않은 건가?’
갑옷으로 꽁꽁 둘러싼 그의 무게 탓도 있으리라.
이 기술을 처음 사용했던 브로코슬락의 진혈 프리지아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빠르고 가벼웠으니, 그 전투 방식에 차이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하인리히의 검술 교관을 맡은 루터스는 생각보다 더 훌륭한 그의 센스에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확실히 예사롭지 않아. 지금 당장도 베테랑 성기사 못지않겠군. 이 정도면 정말 몇 년 이내에 팔라딘까지 도달할지도.’
그는 내심 하인리히를 인정하면서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괜히 잘하고 있는 인재에게 헛바람을 넣지 않기 위해서였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하지.”
“감사합니다! 교관님!”
그렇게 몇 시간의 훈련이 끝나고, 루터스는 흐뭇한 표정으로 먼저 훈련장을 나섰다.
‘자고로 체력이야말로 모든 힘의 근원이지. 과연 싹수부터 남다르군.’
언제 봐도 압도적인 하인리히의 체력에 교육 시간을 꽉 채워 매우 밀도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 후배를 키우는 것을 낙으로 삼는 그로서는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루터스가 떠난 자리에 혼자 남은 하인리히는 천천히 몸을 풀며 훈련장을 정리했다.
성녀에게 성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그간 그가 한 것이라고는 그저 훈련이 전부였다.
온갖 전투술에 성법 훈련, 거기에 개인 단련까지.
‘편하게 강해지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건 좋긴 하지만.’
고유스킬을 강화하며 추가된 성장 속도 가속 덕분인지 이제는 하루하루 성장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고, 성과가 곧바로 나오니 당연히 훈련이 재밌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가 만족스러운 환경에서 훈련에 매진한 지 보름가량이 지난 어느 날.
리에스타 성녀가 하인리히를 호출했다.
똑똑—
“성녀님, 하인리히입니다. 부르셔서 왔습니다.”
“네! 들어오세요!”
성녀의 집무실은 책장에 가득 꽂힌 책과 교단의 상징을 조각한 장식품들을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 검소한 집무실을 가볍게 둘러보던 순간···.
‘음.’
책장 구석에 꽂힌 책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못 본 척했다.
소녀의 프라이버시는 존중해 줘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하인리히의 배려를 눈치채지 못한 성녀는 앉아있던 집무실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를 반겼다.
그가 들어오기 전까지 끙끙거리며 들여다보던 서류는 이미 안중에도 없이 책상 위에 내팽개쳐둔 채였다.
대부분의 일들은 추기경들이 결정한 대로 실무자가 처리하는 편이었지만, 성녀의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 이렇게 숙제처럼 그녀에게 넘어오는 업무들이 있었다.
방금까지 그녀가 보고 있던 것도 그런 골치 아픈 문제가 담긴 서류였는데, 하인리히가 들어온 것을 기회삼아 냅다 때려치워 버린 것이다.
물론 지금 내버려 둔다고 일이 해결되진 않으니, 단순히 뒤로 미루는 것일 뿐이었지만···.
성녀는 일단 골치 아픈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나중 일은 나중의 자신에게 맡기면 될 테니!
“안녕하십니까, 성녀님.”
“안녕하세요, 하인리히 경! 이야기할 게 많으니, 일단 앉으세요.”
하인리히는 응접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소파에 앉아 성녀와 마주했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까다로운 교관님들도 많으신데, 하인리히 경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칭찬이 자자하시던데요?”
“별말씀을요. 전부 가르쳐 주시는 분들이 훌륭하신 덕분입니다.”
그렇게 칭찬과 겸양의 말이 오가길 잠시, 곧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다른 분들의 평가를 들어보니, 이제 슬슬 성검의 시련에 도전해도 될 것 같아요.”
“성검 말입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군요.”
하인리히가 그녀에게 성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집중 수련에 들어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아무리 그의 수준이 급격히 성장했다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수련해야 할 줄 알았는데···.
“사실 좀 더 시간을 두고 차분히 준비했으면 좋겠지만,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서요.”
“느낌이요?”
“곧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랄까? 확실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불사왕이 조만간 뭔가 일을 벌이려는 것 같아요.”
“아··· 그런가요?”
성녀의 예감은 예지에 가깝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헛짚은 것 같았다.
한스는 아직도 지구에서 자원봉사에 매진하는 중이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교단 차원에서 경계수위를 올리고 모든 사태에 대비 중이에요. 다른 세력들에게도 곧 경고가 도착할 거고요.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으니, 만반의 대비를 취해 두라고.”
하지만 확신에 가득 찬 성녀의 모습을 보니 뭔가를 느끼긴 한 모양이었다.
그것이 한스 때문은 아니겠지만, 무언가를 감지했으니 그녀가 저렇게까지 하는 거겠지.
“그럼 성검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대륙 서부의 피카올 대신전에서 언제든 시련을 시작할 수 있다고 연락이 왔어요.”
약 300년 전, 대륙 서부에서 발호한 2대 불사왕은 그곳에서 위세를 떨치던 사르브 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결사대가 불사왕을 물리친 후,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이 바로 사르브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는 4개의 나라로 구성된 왕국 연합이었다.
탈리아, 샤로티, 툴크, 레스크 왕국은 오랜 시간의 노력 끝에 마침내 불사왕 전쟁의 상흔을 지우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 여파로 각각의 국력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서로 연합해 도움을 주고받는 식으로 나름의 발전을 도모한 것이다.
‘그 왕국 연합 중에서도 남쪽의 레스크 왕국에 세워진 대신전이 바로···.’
피카올 대신전.
3백 년 전 전후 복구 과정에서 지어진 가장 최근에 건축된 대신전이자, 성검이 봉인되어 있는 장소였으며···.
전대 용사를 비롯한 결사대가 2대 불사왕을 쓰러뜨린 장소였다.
“하지만 불사왕을 토벌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그 심장을 제대로 봉인하지는 못했죠.”
그리고 그 여파 때문인지, 단순히 놈이 죽기 전에 뭔가 수작을 부린 탓인지, 불사왕이 쓰러진 자리가 심연에 물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정화하기 위해 전대 용사와 주신교단은 그 자리에 성검을 꽂아 봉인한 후, 바로 위에 대신전을 건설했어요.”
그것이 바로 서부를 총괄하는 피카올 대신전이었다.
서부에 존재하던 기존의 대신전이 사르브 제국과 함께 몰락하면서, 마침 필요성이 대두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럼 그 성검을 뽑으면 봉인이 풀리는 것 아닙니까? 제가 뽑아 와도 되는 겁니까?”
“벌써 3백 년이나 지났으니까요. 당시에는 그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충분히 정화되었으니 성검이 없더라도 문제없어요.”
그래서 전 세대부터 주기적으로 성검을 회수하려는 시도를 해 왔다고 한다.
성검은 한곳에 가만히 방치해 두기엔 너무 아까운 무기이지 않은가.
물론 그 결과는 뻔했다.
“전부 실패했지요.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닌가 봐요.”
성녀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성검의 주인이 되기 위해선 여러 가지 까다로운 시련을 통과해야 하는데, 같은 사람이 여러 번 도전하면 회차가 쌓일 때마다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고 한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첫 번째 시도 만에 성검의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가 곧바로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하인리히 경은 불사왕을 물리칠 대적자니까요!”
눈을 반짝이며 대답하는 성녀의 말에는 한 치의 의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올곧은 믿음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하인리히가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그쪽으로 넘어가면 되겠습니까?”
“당장이요!”
“네?”
“미리 게이트 쪽에 말해 놨어요! 지금 바로 가시면 곧바로 피카올 대신전으로 이동하실 수 있을 거예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대답한 성녀가 뿌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뭔가 자신의 빠른 일 처리에 상당히 만족한 듯한 몸짓이었다.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자, 그녀는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만 깜빡였다.
‘뭐, 딱히 준비할 것도 없으니 바로 가도 상관없기는 하지.’
하인리히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론 그러면서 성녀에게 한 마디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저는 지금 바로 가 보겠습니다. 성녀님께서도 남은 일거리 잘 마무리하시길.”
“앗! 아아···.”
잊고 있던 과제가 떠올랐는지 화사하게 피어올랐던 성녀의 표정이 급격히 시들어갔다.
저런 반응까지 보일 정도라니, 어지간히 골치 아픈 문제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성녀의 집무실을 나온 하인리히는 곧바로 게이트 룸으로 향했다.
대륙 서부의 피카올 대신전으로 이동하고.
불사왕을 무찌를 성검을 손에 넣기 위해서!
***
휘이잉—
[흐음··· 이제 얼추 정리는 된 것 같은데.]한밤중의 고층 빌딩 옥상.
시커먼 어둠에 둘러싸인 채 도심을 내려다보는 존재가 있었다.
한국의 다크 히어로, 범죄자 사냥꾼, 비공식 최강.
그리고 이세계 아우테리카의 재앙이자, 심연에서 찾아온 죽음.
불사왕 한스였다.
‘확실히 조직의 힘이 더해지니까 한결 일이 편하네. 한스 혼자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절대적인 강자 한 명보다 그럭저럭 쓸 만한 다수가 도움이 될 때도 있는 법.
헤테로시스를 비롯한 혈맹이 함께하니 업무의 효율이 크게 증가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정보 수집 능력부터 차이가 나니까.’
한스는 감지망에 걸린 현행범만을 노릴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운 좋게 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전국으로 발을 넓히는 중인 혈맹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정제혈정」 덕분에 전보다 훨씬 강해진 헤테로시스가 놈들을 사냥한다.
그리고 그들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상대는 한스를 통해 정리하면 끝.
완벽한 업무 분담이었다.
[이제 크게 신경 쓸 거물은, 딱히 없는 것 같군.]한스는 하인즈 2세의 업무용 대포폰을 조작하며 다른 정보가 들어왔는지 살폈다.
하지만 요 며칠 바쁘게 움직였더니, 더는 그가 직접 나설 만한 건이 보이지 않았다.
[흐흠··· 정말 없나? ···그렇다면 이제, 돌아가 볼까? 크흐흐흣.]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고향에 가깝다고 해야겠지.
‘안 그래도 성녀의 말이 신경 쓰이던 참이었으니. 그거에 대해서도 좀 알아볼까.’
그렇게, 대륙의 공포 불사왕이 다시 아우테리카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