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87)
#87
피카올 대신전 (2)
“오!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하인리히 경. 과연, 듣던 대로 훌륭한 인재로군!”
“과찬이십니다, 추기경님. 바쁘실 텐데, 이렇게 직접 반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성검에 관한 일이 아닌가. 거기다 성녀님께서 직접 추천하셨다니, 이렇게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지! 허허헛—”
하인리히는 피카올 대신전에 도착해 숙소를 배정받은 뒤, 곧바로 이곳의 책임자인 도노반 추기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연륜이 담긴 주름에 길게 기른 흰 수염, 인자한 미소까지 더해진 그의 첫인상은 ‘이웃집의 친절한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그 인상은 얼굴을 마주한 찰나에 뇌리를 스쳤다가, 목 아래를 보고 곧바로 사라져 버렸다.
‘와··· 어깨가 무슨.’
그 몸이 절대 평범하지 않았으니까.
“허허, 역시 젊어서 그런지 훌륭한 근육이구만. 이거 원, 늙으니까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나도 왕년에는···.”
자애로운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떡 벌어진 어깨와 꼿꼿한 허리, 움직일 때마다 불끈거리는 근육은 그 얼굴과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대단했다.
‘이분도 팔라딘 출신이라고 했던가.’
인망이 두터워 추기경까지 올랐다고 들었는데, 그 자리에 오르고도 단 한 시도 단련하는 것을 잊지 않은 듯했다.
60이 넘었을 텐데도 근육이 저렇게 빵빵한 걸 보니.
“그래, 하인리히 경? 성녀님의 개인 호위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어찌 일은 할 만한가?”
“아, 지금까지는 그분의 지시로 성검의 시련에 대비해 훈련으로 대부분을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성녀님께선 성지 내에서만 머무시는지라.”
“그렇군. 그분은 잘 지내고 계시고? 뵌 지도 제법 되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계실지 모르겠군. 얼마 전에 큰일도 있었는데···.”
불사왕의 대신전 습격 사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왠지 성녀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이 아니었는지 곧 그의 넋두리가 시작되었다.
간단히 말해, 자신이 얼마나 성녀와 친분이 깊은지를 과시하는 내용이었다.
“후, 성녀님을 뵌 지도 3년이 넘은 것 같군. 이 정도 지위까지 오르면 함부로 자리를 비울 수도 없단 말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추기경직을 맡는 게 아니었는데.”
그런데 그 수준이 좀 과한 것 같았다.
아주 어린 나이에 현 교황 하티아누스 2세의 양녀로 입적한 성녀는 성지에서 자라며 교단의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았다.
작고 귀여운 아이가 해맑은 미소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 그것을 아니꼽게 볼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당시 팔라딘이었던 도노반 추기경도 마찬가지였다.
“경은 아는가? 성녀님이 그 자그마한 손 위에 지렁이를 올려놓고 이것 보라며 내밀던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그···그렇군요. 왠지 알 것 같습니다.”
결혼은 했지만 자식이 없었던 그에게 리에스타 성녀는 딸이자 손녀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막 교단에 들어온 그녀의 성장을 지켜본 지 십 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
도노반은 추기경으로 추대받아 이곳 피카올 대신전의 책임자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가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란 말일세. 왕국 놈들이 도무지 협조를 하지 않으니, 여유가 생길 턱이 있나.”
그나마 대신전이 위치한 레스크 왕국은 나은 편이었지만, 다른 왕국들은 저들끼리 똘똘 뭉쳐 교단의 세력이 정도 이상으로 커지지 못하도록 은연중에 견제하고 있었다.
물론 그중 유독 심한 곳이 바로 하인즈 2세가 있는 탈리아 왕국이었다.
그런 추기경의 말에 하인리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마치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는 듯이.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거지?’
상급자가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으니 무작정 동조하고 있긴 한데, 왜 그런 사정들을 자신에게 늘어놓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가 내심 의아해하고 있을 때.
꽈아악—
도노반 추기경이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하자, 그 두툼한 팔 근육이 서서히 하인리히의 숨통을 조여 왔다.
“추···추기경님?”
“그래, 하인리히 경. 난 말일세···.”
그 상황에서도 그의 인자한 표정과 다정다감한 말투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성녀님의 그 밝은 웃음이 머릿속에 너무 선해서, 도무지 그분이 슬퍼하는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네.”
하인리히의 목에 둘러진 팔에서 핏줄이 서며 근육이 더욱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그분은 어릴 적부터 성지에서만 자라왔던 지라,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시지 않은가? 그래서 앞으로 괜한 상처를 받으실까 봐 걱정된다네. 그래, 예를 들면··· 어떤 놈팡이가 순진한 그분을 꼬시려 든다거나.”
씹어 뱉듯이 말하는 추기경의 얼굴에는 이제 미소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이글거리는 눈빛이 하인리히의 눈을 마주해 왔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네, 물론입니다. 제가 ‘개인 호위’로서 철저하게 성녀님의 주변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팔불출 할아버지 앞에서 더 뭐라 대답하겠는가.
얼른 원하는 대답을 해 주는 게 낫지.
이젠 완숙에 달한 연기력으로 당당하게 눈을 마주하자,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추기경의 표정에 다시 서서히 미소가 돌아왔다.
“허허헛! 그래, 교단 최고의 유망주인 경이 성녀님의 곁을 지켜준다면 든든하지. 부디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네! 그게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눈 것도 잠시, 겨우 짬을 내서 그를 만나러 온 추기경은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만 돌아가 봐야겠군. 부디 경이 성검의 주인이 될 수 있기를 바라겠네. 불사왕이 부활한 이상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그렇게 도노반 추기경이 떠나가고, 그 뒤를 이어 성검의 봉인을 담당하는 대주교가 다가왔다.
“준비는 이미 다 마쳐두었습니다. 언제 가시겠습니까?”
“여기까지 와서 지체할 이유는 없지요. 지금 바로 도전하겠습니다.”
성검이 봉인 결계의 핵이었던 만큼, 그것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데에도 상당히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그래서 한 해에 도전할 수 있는 횟수에도 제한이 있었는데, 이번엔 하인리히가 도전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내로라하는 팔라딘들도 실패했다고 하니, 나도 좀 부담스럽긴 한데···.’
그래도 그에게는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래봬도 자신은 주신님과 나름의 친분이 있는 유착관계가 아닌가.
이번에도 아마 어련히 잘 챙겨주시지 않을까?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앞으로 더 잘할게요!’
하인리히는 대주교의 뒤를 따르며 주신께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아주 약간의 사심을 담아서.
***
탈리아 왕국, 브라이트 공작 저택.
“그래, 아직은 별다른 정보가 없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불사왕과 관련해서 교단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덕에, 근방에 굵직한 흑마법사 세력은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정보 조직을 꾸리는 건?”
“일을 진행하고는 있으나 아직 먼 곳의 정보를 파악하기에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상황입니다.”
하긴 그게 그렇게 쉬운 일 일리가 없었다.
애초부터 좀 더 장기적으로 봐야 하는 문제였지만, 그래도 당장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알았다. 일단 잔챙이더라도 파악한 흑마법사가 있으면 따로 보고하도록. 아, 일을 진행하는 데 방해되는 놈들도. 이쪽에서 처리해 놓을 테니.”
“···알겠습니다.”
뮬로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나가자, 하인즈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스는 아직 일을 벌일 생각이 없는데 무슨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다른 놈들이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뜻일 텐데···. 어떻게 정보를 얻을 방법이 없군.’
역시 세력을 좀 더 빨리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그에게는, 대륙 최고의 인적 자원이 있었다.
펄럭—
달빛마저 구름에 삼켜져 어둠에 잠긴 밤하늘.
한스는 심연에 물든 동공으로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당장은 따로 할 일도 없으니 하인즈나 돕도록 하면 되겠지.’
덤으로 마음껏 부려 먹을 수 있는 노예··· 아니, 엑스트라 겸 스태프들을 모집할 생각이었다.
물론 불공정한 계약은 아니었다.
보수로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을 지불할 생각이었으니까.
‘목숨’ 말이다.
‘업무상 발생하는 사고에 대해서는 책임져 주지 못하지만··· 그래도 운 좋으면 살 가능성이 있는 게 어디야.’
지금 바로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크흐흐흣··· 저기, 한 놈 숨어있구나.]마(魔)에 속한 존재라면, 그의 「심연의 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성지와 인접한 아제리온 제국.
“어! 신호 잡혔다!”
나름대로 잘 꾸며진 방 안의 안락의자에 앉은 채, 죽은 듯이 누워있던 금발의 사내가 눈을 번쩍 떴다.
“세상에, 설마설마했는데 역시 살아 있었군. 이번 대의 불사왕에 대해서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그동안 왜 신호가 잡히지 않았던 거지?”
그의 고유스킬인 「궤적 관측」은 정보 탐색에 최적화된 능력이었다.
무려 과거를 읽어낼 수 있는 스킬이었으니.
이전에 로셀리아 대신전에서 큰일이 있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자세한 내막을 파악하기 위해 그쪽을 파다가 불사왕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불사왕이 직접 나타났던 장소엔 어마어마한 결계가 깔려있어 직접 확인하진 못했지만, 정보란 원래 주변 탐문이 기본이지.’
그와의 전투에 동원되었던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고, 그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비교적 수월한 편이었다.
그들이 방심해서 무심코 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정보였으니까.
물론 그것도 그간 온갖 일을 벌이며 카르마를 수급해, 고유스킬을 세 번이나 강화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씁, 그런데 역시 거물이라 그런가. 그렇게 많이 강화했는데도 관측이 안 되네. 예상은 했지만.”
물론 그의 능력에도 여러 가지 제한이 있었다.
관측하고자 하는 대상의 상세한 정보가 있어야 했고, 너무 격이 높은 상대에 대해서는 읽을 수 없었다.
불사왕 정도 되면 그의 능력으로 관측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
그런데 그가 이렇게 반응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전에 혹시 몰라 「궤적 관측」을 발동했었을 때, 나온 결과가 영 이상했다.
능력이 부족해서 ‘알 수 없다’는 게 아니라, 애초에 대상이 되는 존재가 없어서 ‘할 수 없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래서 혹시 로셀리아 대신전에서 죽은 건 아닐까 우려했는데, 그의 동료들은 전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정말 불사왕이 온전히 부활했다면, 겨우 그 정도로 죽을 리가 없다면서.
그날 이후 하루 한 번 습관적으로 불사왕의 존재를 관측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 결과가 ‘알 수 없음’으로 바뀌었다.
“진짜 그 말이 맞았네···. 그럼 그동안 회복을 위해 어디 차원이 단절된 결계 안에라도 숨어있었나?”
그는 입맛을 다시며 탁한 금발을 거칠게 헤집었다.
그래도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이제 곧 거사가 시작될 텐데, 불사왕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면 그들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시기가 좋은데? 운이 따라주는 건가.’
이제 네 번째 강화까지 남은 카르마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무리 없이 강화할 수 있을 터.
거기다 이번 작전은 시작일 뿐이었으니,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나의 세계를 멸망시키는 데 기여하면, 대체 어느 정도의 카르마를 벌 수 있을까?’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안락의자에 편하게 몸을 뉘었다.
‘편하고 안전한 곳에서 정보만 구해다 주면 나머진 다른 놈들이 알아서 일해 주니, 이게 바로 창조 경제지.’
지금 함께하는 이들이 굉장히 위험한 놈들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으나, 그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카르마를 충분히 수급하고 이곳이 정말 위험해졌을 때면 그는 이미 지구에 있을 테니까.
“아~ 기대되네. 이거 지구로 돌아가면 세계 정복도 할 수 있는 거 아냐? 국가 기밀이고 나발이고 내가 싹 털어서··· 큭큭큭.”
아우테리카 차원에 전송된 또 다른 각성자는 그렇게 혼자 단꿈에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