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94)
#94
심연이 열리고 (1)
심연을 열기 위한 의식이 벌어진 직후.
최근 성녀의 뜻에 따라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교단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서둘러! 빨리 준비를 마치고 집결한다!”
곧바로 사태의 중심지를 파악한 성녀에 의해 로셀리아 대신전에서 대기 중이던 교단의 정예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아··· 아무래도 불사왕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아요.”
“잠적한 동안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건 예상을 넘어서는군요. 이만한 규모의 의식이라니···.”
“자신을 따르던 이들과 함께 오래전부터 계획하던 일이었겠죠.”
“얼마나 오랜 세월을 준비했을지 짐작도 할 수 없군요.”
성녀의 한탄과도 같은 말에 그녀의 옆에 있던 라티우스 대주교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불사왕이 모습을 감춘 동안 우려했던 일들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아니, 오히려 상정했던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는 규모로 벌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의식이 벌어진 장소는 대륙 남부의 황무지 깊숙한 곳이에요. 가까운 신전도 없어서 최대한 빨리 도착한다고 해도 이미 모든 일이 끝난 후겠죠.”
“그렇다고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미 사전에 준비해 둔 이상,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러면 뭔가 단서라도 발견할 수 있겠지요.”
관측된 위치가 워낙 인적이 없는 오지여서 그곳으로 향하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가려다간 적어도 한 달은 허비될 수 있는 장거리 이동.
하지만 주신교단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이들이 아니었다.
“게이트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인 제국 남부 도시 웨이라부터···, 최대한 서둘렀을 경우 반나절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이미 다양한 경우의 수를 대비하고 있던 그들은, 미리 빠른 기동에 도움이 될 축복을 지닌 자들을 모아 대기 인원에 편성해 두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은 갑작스러운 사태가 발발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게이트 룸으로 집결 중이었다.
“준비가 다 되었군요. 그럼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성녀님.”
“···잘 부탁드립니다, 라티우스 대주교님. 저는 다른 세력들과 빨리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네요. ···아직 기존 협의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이러다 잠은 제대로 잘 수 있을까요?”
성녀는 라티우스 대주교를 배웅하며 자조 섞인 농담을 건넸다.
“허허허, 저도 갔다 와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럼 쪽잠이라도 잘 시간은 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약속하신 거예요? 꼭, 돌아오셔서 도와주시기로?”
물론 이번에 급파될 이들은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안전하게 몸을 빼낼 수 있도록 구성된 교단의 최정예였다.
하지만 이 정도 대규모 의식을 벌인 놈들인 만큼, 그곳에 어떤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들을 노린 함정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물론이지요. 그럼, 이제 정말 가 보겠습니다.”
라티우스 대주교는 어두운 표정의 성녀를 부드럽게 위로하고 곧바로 게이트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다른 이들만 위험한 장소에 보낸다는 것에 항상 죄책감을 내비쳤지만, 주신을 따르는 입장에서 함부로 그녀를 위험에 노출시킬 수는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라티우스를 비롯한 대주교와 팔라딘들은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게이트 내부로 들어섰다.
게이트를 통해 목적지와 가장 가까운 신전에 도착한 그들은, 그 자리에서 잠시 대기한 후···.
“···됐습니다. 이제 들어가시지요.”
나왔던 게이트 안으로 다시 들어섰다.
게이트를 매개로 사용된 ‘이동’의 축복으로,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가상의 출구를 생성해 좀 더 멀리까지 이동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거리도 거리인데다 다수의 인원을 옮기는 일이었기에 그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덕분에 목적지와의 차이를 최대한 좁힐 수 있었다.
“···의식의 영향으로 기운이 흔들리는 게 여기서도 느껴지는군요. 좀 더 서두르도록 하지요.”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요동치는 기운이 더 생생하게 느껴지자, 남부의 황무지 한복판에 도착한 이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서둘러 이동하기 위해 교단의 일원들이 ‘축지’의 축복을 지닌 이의 도움을 받으려던 순간.
고오오—!
저 멀리, 그들이 가고자 하던 방향에서···.
대지와 하늘을 연결하는 검은 기둥이 솟구쳤다.
아직 한참 먼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가를 듯 나눈 그 검은 직선은 그들의 눈에 선명하게 틀어박혔다.
“···아아.”
“대주교님, 설마 저것은···.”
“심연의 기둥···.”
이제는 문헌으로만 남아 아는 이들도 거의 없는, 심연이 열릴 때의 징조였다.
“···움직입시다.”
이를 악문 일행이 좀 더 빠른 속도로 기둥이 솟아오른 장소로 향했다.
설령 이미 늦었다고 할지라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렇게 약 반나절 동안 일행은 계속해서 목적지로 향했다.
하늘을 꿰뚫을 기세로 치솟았던 검은 기둥은 이미 힘이 다한 듯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들은 묵묵히 이동한 끝에 마침내 도달할 수 있었다.
심연을 여는 의식이 시작된 장소에.
***
휘이잉—
[역시 이미 죄다 도망갔군.]한스가 허공에 뜬 채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하에 위치한 의식의 장소 천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어서 수월하게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일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피했나···. 하긴, 이미 몇 시간이나 지났으니까. 놈들도 이만한 규모로 대륙적 어그로를 끌어 놓고 멍청하게 현장에 남아있지는 않겠지.’
이 근방의 기운이 워낙 거세게 요동쳐 좌표가 불안정했던 탓에 좀 떨어진 곳으로 공간 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곳까지 부리나케 날아왔건만, 현장에는 이미 인기척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남은 것은 의식을 위해 곳곳에 새겨진 마법진들과 이곳에서 제물로 희생된 이들의 것으로 보이는 혈흔들뿐.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하고 일을 벌였는지, 그 외에는 남은 흔적이 아무것도 없었다.
‘저건?’
하나만 빼고.
공간을 통째로 읽어내는 한스의 감각에 뭔가 이질적인 것이 감지되었다.
스윽—
바닥재의 틈 사이에 박혀있던 뭔가가 그의 의지에 따라 빠져나오며 손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금속 조각?’
그것은, 가느다란 체인의 부서진 일부로 보이는 금속 잔해였다.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된 이 공간에 단 하나 남은 불순물.
이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유일한 단서였으니 챙겨두기로 했다.
‘기운이 죄다 흐트러져서 여기선 역추적도 어려울 것 같으니까.’
심연 자체의 기운과 그곳에서 꺼내진 것으로 보이는 무언가의 여파 때문에 이곳에선 뭘 하기도 힘들었다.
[이건··· ‘광기’인가. 심연의 문이 불완전하게 열린 탓인지, 온전하게 꺼내진 못했군.]애초에 이런 경우는 상정하지도 않았던지라, 부스러져 대륙에 퍼지기 시작한 광기가 세상에 어떤 영향을 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지금과는 다른,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주변을 훑으며 상황을 파악하던 그의 시선이 아까부터 강렬한 존재감을 피워내던 바닥의 구덩이로 향했다.
발아래의 거대한 마법진에 눌어붙어 꿈틀거리는 짙은 어둠.
그것은 세계의 복원력 때문에 크기가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불길한 기운을 거칠게 토해내고 있었다.
[호오, 이 기운은···.]「불사의 심장」으로 내부를 관조했을 때 느꼈던 무겁고, 끈적끈적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 기운이었다.
‘심연에서 새어 나온 기운인가.’
그리고 한스가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심연의 눈」으로 그것을 들여다본 순간···.
그는 그 에너지를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게 심장이 품은 흑마력의 기원이었군.’
그간 불사왕의 심장에서 무한정 뿜어져 나왔던 흑마력은 그곳에 단단하게 압축되었던 기운이 희석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건 이 기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농도 차이가 이 정도로 심하다니.’
흑마력이 그냥 독가스라면 이건 고밀도로 압축된 원액이었다.
안 그래도 까다롭기로 악명이 자자한 흑마력보다 한술 더 뜨는 흉악한 기운.
그런데···.
‘···이거, 내가 직접 다룰 수 있을 것 같은데?’
심장과 그 근원이 같아서인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 불사왕 그 자체인데다, 「심연의 눈」과 「불사의 심장」까지 있는 몸이 아닌가?
오히려 그가 이것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해보자.’
한스는 천천히 한 손을 뻗어 부드럽게 허공을 휘저었다.
극도의 집중력이 담긴 그 손짓에, 주변에서 일렁거리던 심연의 기운이 서서히 그의 손끝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범한 이들이었다면 그저 이 장소에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였지만, 그에게는 그저 고향의 공기나 다름없을 뿐이었다.
‘호흡할 순 없지만 말이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점점 이 기운에 익숙해지는 것이 느껴지자, 그는 그것을 한껏 빨아들여 자신의 심장에 저장했다.
심연의 기운은 방사성 폐기물 이상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었지만, 쉽게 접할 수 있는 힘도 아닌데 가만히 내버려 두기엔 아깝지 않은가.
[크흐흣··· 이거, 잘만 쓰면 꽤 유용한 힘이 될 것 같구나.]다루기 까다로운 만큼 그 효과도 뛰어날 터.
충분히 만족할 만큼 심연의 기운을 빨아들인 한스가 흡족한 심정으로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서히 닫혀가는 심연의 구덩이 주위를 빼곡하게 둘러싼 온갖 술법진을 보니, 놈들이 이 일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최소한 10년 이상은 공들였겠는데. 대륙 곳곳에서 발동한 제물 의식까지 생각하면 그 이상···.’
전 대륙에 걸쳐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었던 역량, 오랜 시간 들키지 않고 암약해 온 은밀성, 그 모든 걸 아우르는 조직력까지.
역천의 서약은 생각 이상으로 강한 여력을 품고 있는 조직이었다.
이 정도면 음지의 세력 중에선 대륙 최대 규모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말은···.
‘딱 내가 원하던 조건에 부합하는 놈들이군.’
주연 배우인 한스를 보조해줄 악역 조연으로 매우 적합한 인선이라는 소리였다.
원활한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선 반드시 캐스팅해야 할 정도로.
‘놈들을 찾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야겠어. 지금처럼 잔챙이들을 끌어모으는 일은 조금 뒤로 미루자.’
우선 이곳에서 달아난 놈들을 추적해 보고, 안 되면 제물 의식을 벌였던 햇병아리 흑마법사의 스승을 찾아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거기서부터 꼬리를 타고 올라가다 보면 언젠간 그 실체에 도달할 수 있겠지.
[음?]그렇게 한스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고민하던 찰나.
격렬히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심연의 구덩이에서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오호라, 이건 또 반가운 일이로구나.]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지만, 정보로써 주어진 ‘경험’으로 알게 된 존재였다.
‘또 다른 유산.’
하인리히가 마주한 아크리치 드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사이즈가 커다란 놈이, 이 아래에서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동안은 깊은 심연과의 연결이 너무 강해서 경계에 표류하던 놈이 나올 기회가 없었지만, 그 힘이 약해지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빨려 올라오게 된 모양이었다.
연신 꿈틀거리는 심연의 구덩이와, 점점 선명하게 느껴지는 기운.
꿈틀—
그리고 마침내.
요동치던 심연에서 그 존재의 일부가 튀어나왔다.
푸화악!
하지만 그것은 일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크기였다.
[크워어어어——!]그 커다란 구멍도 좁다는 듯이 온몸을 비틀며 빠져나오는 압도적인 거체에 주변의 공기가 요동쳤다.
검게 번들거리는 매끈한 뼈와 이빨, 거칠게 흔드는 거대한 두개골, 자줏빛이 일렁거리는 흉포한 안광까지.
그 존재는.
‘본 드래곤, 엔트라시오.’
뼈밖에 없는 거대한 용이, 심연의 바닥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