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98)
#98
변화의 시작 (2)
“그럼 저흰 이만 가 볼게요, 할머니.”
“오야~ 내는 괜찮으니께 걱정하지 말고, 어여 가 봐. 차 조심허고.”
“하하하, 네 할머니. 다음에 또 올게요.”
“이제 올 필요 없다니께 글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마무리된 병문안.
나는 태산이와 함께 병실을 나서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많이 괜찮아지신 것 같아서 다행이네.”
“그치? 의사 선생님들도 많이 놀라시더라고! 조만간 퇴원하실 수 있을 것 같아!”
태산이 기쁜 듯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의사의 소견까지 몹시 긍정적이었던지라, 아까부터 줄곧 텐션이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무슨 고위 성직자가 작정하고 몇 날 며칠 신성력을 쏟아 부어 준 것 같다고도 하시던데, 말단 공무원인 내가 그런 인맥이 어딨냐? 그런 호사는 고위직도 누리기 힘들 텐데.”
“···그치? 할머니가 스스로 이겨내신 거겠지. 가끔 그런 경우가 있잖아?”
“맞아, 맞아! 역시 착하게 살면 복이 온다니까? 우리 할머니 평생 죄도 짓지 않고 열심히 살아오셨는데, 하늘도 감동하신 거지!”
신나서 열심히 떠들어대는 녀석의 말을 흘리며, 나는 다시 병실 쪽을 슬쩍 돌아보았다.
‘효과가 있어서 다행이네. 요즘 저쪽 일이 너무 바빠서 추가 조치는 힘들 것 같았는데. 이만하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야.’
「개체 투영」으로 하인리히로 변해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한스나 하인즈 2세를 통해 기운을 차단하는 결계를 설치하지 않으면 여러모로 귀찮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다.
‘흑마력 같은 것도 아니고, 치유를 목적으로 한 신성력이면 큰 상관은 없겠지만···. 괜한 관심을 끌게 되면 곤란한 건 마찬가지지.’
범죄가 아니니 집요한 추적까지 이어지진 않겠지만, 한창 몸을 숨기고 있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것마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
다른 이도 아니고, 자신이 바로 요즘 한국을 떠들썩하게 하는 그 ‘하회탈’이자 ‘혈맹의 주인’이지 않은가.
괜한 위험은 감수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참! 너 이사한다는 건 어떻게 됐냐? 어디로 갈지는 정했어?”
“아, 그거? 좀 여유롭게 살고 싶어서 교외 지역에 주택 하나 구했어. 이사는 조만간 할 생각이고.”
“오— 한성현 출세했네! 단독주택이라니! 그런데 서울이랑 멀어지면 좀 불편하지 않겠냐? 배달이라던가.”
“뭐,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사실 이제 거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요즘도 한창 바쁜 한스를 대신해서, 「개체 투영」을 사용한 자신이 직접 하회탈의 일을 수행하는 중이었으니.
‘이제 30분은 투영한 상태로 있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거기다 기존에 살던 집도 팔지 않고 가지고 있을 생각이기도 하고.’
그곳은 이제 원활한 이동을 위한 거점 지역이 되리라.
그렇게 지구에서도, 아우테리카에서도 바쁜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
대륙 서부에 위치한 샤로티 왕국, 어느 자작령의 숲속.
이상을 보고 받고 출동한 영지군에게 갑작스러운 재앙이 몰아닥쳤다.
한 손에 들린 기다란 양손검.
전신을 감싼 두꺼운 검은 갑주.
눈가에서 이글거리는 붉은 안광과 사방을 뒤덮은 짙은 흑마력까지.
그 존재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살아 숨 쉬는 자들을 위압하는 힘이 있었으며.
쉬익— 촤악!
“커헉!”
“사···살···끄륵!”
걸음걸음마다 선명한 죽음의 족적이 새겨지고, 한 번의 칼질에 하나 이상의 생명이 저물었다.
“···으으, 저런 걸 어떻게···.”
“히익— 역시 안 돼! 도망쳐!”
“머, 멍청아! 도대체 어디로!”
거기다 그것은 혼자가 아니었으니.
이미 사방은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죽음의 군세로 물 샐 틈 없이 포위당한 상태였다.
“아, 아아···.”
절망에 빠져 한탄을 내뱉는 병사들.
지금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엔, 그 자리에서 살아 움직이는 자들이 단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부대를 이끌던 기사와 마법사들도 이미 한참 전에 목이 달아난 마당에, 평범한 병사들이 어찌할 방도가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약해.]수백에 달하는 부대를 몰살시킨 자, 데스나이트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음산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겠지. 앞으로가 진짜라고 봐야 할 터.]지금은 그들이 갑작스럽게 등장한지라 제대로 된 대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듯했지만, 인간의 군대가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었다.
아무리 밟아도 어떻게든 기어올라 끝내 그들이 경계에 숨어들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 때처럼.
지금 이런 고기 방패에 불과한 놈들을 베었다고 기고만장하기엔, 불사의 군대도 상황이 그리 좋지 못했다.
대륙 곳곳에 흩어져 등장함으로써 여러 나라에 큰 혼란을 주고는 있었지만, 바꿔 말하자면 그만큼 각개격파의 위험이 커진 것이었으니까.
‘그 때문에 사태를 파악할 때까진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고 싶었건만.’
데스나이트가 슬쩍 고개를 돌려 주변의 나무 그늘 사이에 몸을 숨긴 언데드의 군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존재 자체의 특성상 은밀 행동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뿜어지는 죽음의 기운이 산 자들의 본능을 자극하는 것은 물론, 잠깐 머문 자리의 식물들조차 그것을 버티지 못하고 금방 죽어버려 흔적이 너무 많이 남는다.
방금도 그것 때문에 영지군과의 충돌이 발생한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렇게 한 번 전투가 벌어진 이상, 이제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 했다.
즉,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싸움에 대비하며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이런 놈들도 아쉬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지.]데스나이트는 자신의 양손검에 흑마력을 밀집시키며, 천천히 영지군의 시체가 몰려있는 곳의 중앙으로 향했다.
우우웅—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안 그래도 길었던 그의 검신에서 시커먼 기운이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마침내 시체 무더기의 중심에 선 그는.
거대한 횃불처럼 타오르는 양손검을 그대로 바닥에 꽂아 넣었다.
화르륵—!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검은 불꽃이 그를 중심으로 주변으로 한순간에 번져나갔다.
그 불길한 불꽃은 노도와 같이 주변을 휩쓸며 바닥에 널브러진 인간들의 시신을 뒤덮었고, 그들이 몸에 걸친 장비와 뼈만 남기고는 모든 것을 불살랐다.
그리고 뼈만 남은 시체는···.
덜그럭!
달그락 달칵—!
삐거덕거리며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수백에 달하는 해골들.
수백에 달하는 평범한 스켈레톤부터 시작해서 해골 기사와 마법사들이, 새로운 병력으로 불사의 군대에 편입되었다.
데스나이트는 늘어난 병력을 둘러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들의 수준들이 낮았던지라 저 정도가 한계였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좋아. 일단 이런 식으로 계속 수를 불려 나가다 보면···.]그 순간.
[이런, 한발 늦었군.]갑자기 들려온 음산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끊으며 주변에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느껴지기 시작한 불길한 기운은, 죽음의 기사인 데스나이트조차 긴장할 수밖에 없을 만큼 압도적이었다.
‘이것은···.’
그는 이 기운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계에 숨어들기 전까지 그가 충성을 바치던 존재의 기운이 아닌가.
데스나이트는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두운 하늘 한 가운데에 칠흑보다 짙은 어둠을 두른, 그가 짐작하던 존재가 있었다.
모든 생명의 종착지인 죽음의 화신, 불사왕이.
[카람—]그 순간, 공중에 떠있는 불사왕에게서 기묘한 파동이 퍼져나갔다.
그 울림은 자연스럽게 지상에 위치한 데스나이트, 카람의 몸속으로 파고들었고···.
삼백 년 전의 계약이 재차 갱신되며 새롭게 덧씌워졌다.
[아아···.]그는 자신의 몸으로 흘러들어오는 불사왕의 흑마력에 감탄사를 흘렸다.
깨어난 뒤로 줄곧 공허했던 감정이 그 충만한 죽음의 힘에 휩쓸려 내려갔다.
전대 불사왕이 쓰러지며 흐릿해졌던 연결이 다시 강해져, 마침내 전성기 때의 힘을 되찾은 카람이 전율했다.
‘역시, 왕께서는 몇 세대가 지나더라도 절대 쇠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불사왕이야말로, 이 세상의 끝인 죽음 그 자체였으니까!
척!
그렇게 다시 주종관계가 맺어지자, 카람이 바닥에 검을 박으며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왕에게 경배를 표했다.
[새롭게 인사드립니다, 주군. 카람이라 합니다.]그렇게 신하의 예를 갖추는 데스나이트를, 그리고 그를 따라 일제히 엎드리는 언데드들을 하늘에 뜬 한스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한스는 서서히 공중에서 내려와 그의 앞에 서며 안광을 빛냈다.
‘카람이라니, 생각보다 거물인데.’
그를 제외한 다른 언데드들은 「심연의 눈」 만으로도 종속이 가능한 상대라 따로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계약의 갱신이 필요한 것은 엔트라시오와 카람 같은 최고위 언데드들뿐.
그중에서도 카람은 특별한 개체로, 단순한 죽음의 기사가 아니었다.
마스터급을 넘어선 무력과 수많은 군세를 이끄는 통솔력, 언데드를 만들어내는 사령술까지 통달한 전천후 사령관.
‘데스나이트 로드’였으니.
‘굳이 서열을 따지자면··· 한 자릿수는 되겠지. 불사의 군대 일각을 책임진 측근 중의 측근.’
애초에 대륙을 정복하면서 한가하게 순위나 매기고 있었을 리 없으니, 정확히 정해진 서열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불사왕의 개인적인 신임도나 능력 등을 고려한, 세력 내에서의 암묵적인 영향력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불사의 군대 일부를 통솔해 본대와는 별개로 대륙을 침공한 카람은 최고위 간부인 것은 물론, 대륙의 역사서에도 나오는 거물이었다.
그런 존재를 이렇게 우연히 맞닥뜨려 휘하로 거두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지나가다 금덩이를 주운 격.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카람. 그런데 상당히 요란하게 일을 벌인 모양이구나.] [송구스럽습니다. 하필 처음 빠져나온 곳이 인간들의 거주 구역 지척이었던지라. 최대한 은밀히 움직이려 했으나, 도중에 꼬리를 잡힌 모양입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아직은 세력을 다지고 힘을 모을 때다. 지금은 이대로 돌아가도록 하지.] [명을 따르겠습니다.]그렇게 한스는 카람을 비롯한 수백이 넘는 언데드들을 음차원 공간에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던 와중, 이 근방의 자작가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고 무리에 섞여 있는 해골들이 눈에 들어왔다.
···언데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희생자들이었다.
‘피해가 생각 이상으로 큰 것 같군.’
탈리아 왕국을 중심으로 영역을 넓히며 불사의 군대를 수습하고는 있지만, 피해가 생기기 전에 전부 수습하는 것은 무리였다.
샤로티 왕국이 탈리아와 인접한 서부 국가라고는 하지만, 이 지역은 바로 옆에 붙어있는 것도 아니니 더욱 그랬다.
‘이런 식으로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역천의 서약에 의해 심연이 열린 여파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경계에 표류하던 언데드들이 곳곳에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며 대륙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좋지 않아. 쓸데없는 피해가 불어나는 것도 그렇고···.’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는 불사의 군대가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것도 그러했다.
‘이게 다 역천의 서약 놈들 때문이다.’
그것들을 찾아서 족쳐야 하는데, 이번 일을 수습하려고 바쁘게 움직이느라 아직도 놈들을 추적하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본 드래곤 엔트라시오나 데스나이트 로드 카람 같은 간부진을 몇몇 더 수습하는 소득이 있기는 했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군. 좀 더 빨리 해결할 필요가 있겠어. 이 방법은 사용하지 않으려 했는데···.’
아니, 생각해 보면 이 방법이 더 효율적일 수 있었다.
불사의 군대의 위치를 더 빨리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그 외의 부수적인 효과들도 있을 테니.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정신을 집중한 한스의 주변으로 끔찍할 정도로 짙은 흑마력이 서서히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다.
후우우—
그 어둡고, 무겁고, 끈적끈적한 기운은 특정한 구조를 이뤄 한스가 원하는 신비를 엮어 나갔으며—.
그 와중에 발생하는 존재감이 공간을 짓누르며 퍼져나갔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흑마법이 발동되었다.
우우우웅—!
숲을, 영지를, 나라를 넘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흑마력의 파동.
이 정도 되면 이제 절대로 교단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
아니, 교단뿐만 아니라 일정 수준 이상만 된다면 누구나 느낄 수 있으리라.
바로 이곳에.
[이 몸이 이곳에 있노라.]불사왕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대륙 서부에 존재하는 모든 언데드를 대상으로 퍼져나간 불사왕의 전언에.
곳곳에서, 회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