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100
99회
윤설은 서둘러 눈물을 닦아내더니 상자 구석에 얌전히 숨겨둔 것을 꺼냈다.
슬픔에 잠겼던 미소가 서서히 기쁨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해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웃었다.
“윤설아, 오늘 햇볕 대박! 히잇. 버선이 뽀송뽀송하게 잘 마르겠어.”
“그렇구나. 고맙다. 저…. 해인아….좀 앉아볼래? 네게 줄 것이 있어.”
해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친구와 마주했다.
“저….이거 받아주렴.”
수줍은 손길이 벗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해인은 제 손에 담긴 것을 보자마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헐, 대박! 세상에나….이렇게 귀한 것을….직접 만들었구나? 맞지?”
윤설이 수줍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비단 위엔 꽃과 나비가 정성껏 수놓아져 있었다.
손 자수는 요즘 세상에 흔치 않았지만 윤설이 건넨 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그 아름다움이 남달랐다.
“그리 놀랄 것 없단다. 내 솜씨는 뛰어나지 않은 편이니 말이다.”
“어우 야, 무슨…. 완전 인간문화재 급인걸! 넘넘 예쁘다. 이렇게 정성스런 선물은 처음이야.”
“그리 여겨주어 고맙구나. 네 베개에 맞춰 홑청을 만들어보았는데….쓸모가 있다면 좋겠구나.”
“헐, 베개 커버였어? 우왕, 바로 해볼래.”
해인이 침대 위에 있던 베개를 가져와 그 자리에서 갈아 끼우자 윤설이 싱긋 웃었다.
“완선 대박이다! 히잇. 잠이 솔솔 오겠는데?”
윤설은 베개를 쓰다듬으며 기뻐하는 벗을 응시하더니 그녀를 또 불렀다.
“실은…. 네게 줄 것이 또 하나 있단다.”
“헐, 이것만으로도 완전 행복한데 뭘 자꾸 주는 것이니?”
해인이 저도 모르게 윤설의 말투를 따라하자 곧 두 사람이 까르륵 웃었다.
“이건….내가 올 때 지니고 있던 노리개란다.”
“그래, 이거 알아. 한복 앞에 장식하는 거지?”
“응, 이곳에선 어쩌면 필요치 않을지도 모르지만….내, 너의 우정에 감복하여 무어라도 주고프나…. 가진 것이 이것뿐이로구나.”
“어우 야, 무슨 그런 말을……”
윤설이 내민 것은 빼어나게 화려하진 않았지만 조선 규수의 고아함을 품고 있었다.
친구의 존재를 담은 것은 그 가치를 논할 수 없었다.
해인은 울컥해진 마음을 추스르며 시선을 떨구었다.
“윤설아, 너에게 이토록 귀한 것을 받기만 해서 어쩐다니….난 무얼 줄 수 있을까? 나 역시 네 우정에 감동하고 있었는데…… 정작 이별 선물조차 준비하지 못했구나.”
윤설이 벗의 어깨를 도닥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말 하지 말렴. 낯선 이를 집으로 들여 이날까지 세심히 보살펴준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정성이 아니니. 내가 받은 것이 훨씬 더 많단다. 그리고….. 난 후대의 것을 들고 갈 수 없으니 행여나 마음 쓰지 말렴. 해인아, 다행이지 않니? 이곳의 문물들을 몽땅 들고 간다면 역사가 바뀔 것이야.”
“풉. 하긴….그렇겠다.”
간신히 웃음을 회복한 이들이 잠시 이별을 잊은 채 즐거워했다.
친구의 유머를 칭찬하던 해인은 노리개 속에 감춰진 자그마한 쇠붙이를 발견했다.
“으,응? 이건 뭐야?”
“아…그건 열쇠란다.”
“열쇠?”
윤설이 흐뭇한 얼굴로 벗을 응시했다.
“아버지가 청나라에서 구해주신 것이지. 자물쇠도 함께 주셨는데 그것으로 내 비밀 궤짝을 잠가두었어. 그 열쇠는 희귀해서 아무나 열 수 없거든.”
“헐, 그렇게 귀한 걸 나한테 주면 그거 못 열잖아.”
“아니란다. 분실을 염려한 아버지께서 열쇠를 하나 더 주셨거든. 댓돌 아래 감춰둔 건 너만 알렴.”
해인이 까르륵 웃었다.
“그런 특급비밀을 알려줘도 되는 거야? 히잇. 재밌당. 윤설아, 고마워. 소중한 것을 내게 주다니….잘 간직할게.”
“네게 줄 것이 이것뿐이라 민망하지만 한편으론 시공을 초월해 같은 것을 나눠가질 수 있어서 참으로 기쁘구나.”
잠시나마 즐거워하던 이들이 다시금 이별을 떠올리더니 곧 침울함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담담하려고 노력했지만 현실의 무게로 인해 쉽지 않았다.
방송 2일 전……
홍보 일정이 빡빡했다.
이미 기획 단계부터 방송사와 투자자들의 지지를 아낌없이 받고 있는 작품이었다.
감독, 작가 그리고 배우 캐스팅의 3박자가 훌륭히 맞아떨어진 건 최근에 드문 일이었고 그 때문에 기대감은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대대적인 홍보 역시 당연했다.
모두가 들떠있는 가운데 가장 안절부절못하는 이는 바로 민준이었다.
그는 남자 주인공으로 열연했기에 당연히 모든 일정에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준의 머릿속엔 온통 윤설 뿐이었다.
남은 시간은 겨우 이틀……
모든 시간을 꼬박 그녀의 곁을 지켜도 시원찮을 마당에 이런 일정은 그에게 부담만 가중시키고 있었다.
“꺄악! 오빠!”
“민준! 잘생겼다!”
헤어숍에서 메이크업과 헤어를 마친 그가 밖으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무리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지난번 에서 단정한 도령 역을 완벽히 소화한 덕에 이전보다 팬들이 더욱 늘어나 있었다.
내내 굳어있던 민준의 입가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사적인 고통이 가볍지 않았지만 자신을 보러 와준 이들을 외면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손을 흔들 때마다 마치 마법처럼 여기저기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우리 준이 오늘 스케줄이 풀이라서 가봐야 하거든요. 낼 모레 아시죠? 많은 입소문 부탁드립니다. 자, 이해들 해주세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윤 매니저가 밝은 낯으로 양해를 구하자 준은 팬들을 향해 목례하며 밴에 올랐다.
그들은 아쉬워했지만 차량의 앞길을 터주더니 사라질 때까지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말끔히 차려입은 준이 곧바로 향한 곳은 스튜디오였다.
드라마의 보도 자료와 홍보로 내보낼 스틸 사진들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동료 배우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그가 카메라 앞에 섰다.
준은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나무랐지만 밝은 얼굴로 촬영에 임하는 순간, 또다시 마음이 불편해지는 걸 느꼈다.
사심을 완전히 배제한 채 몰입하는 건 프로의 자세이자 그가 줄곧 고수해온 모습이었다.
그 때문에 이 자리에까지 왔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제 연인을 생각하는 준의 마음은 벼랑 끝에 선 듯 불안할 뿐이었다.
다음 날의 일정 역시 그에게 자비를 베풀 마음이 없어 보였다.
준의 얼굴에서 생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빈틈없는 일정에 대한 피로감도 잊은 지 오래였다.
연인과 함께 할 수 있는 날이 또 하루 줄어든 것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고 있었다.
더군다나 하루 전날이었다.
오늘만은 반드시 윤설을 만나야만 했다.
준이 곁에 앉은 매니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형,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 오늘은 그 사람, 꼭 만나고 싶어요. 부탁합니다.”
스케줄을 체크하던 이가 동작을 멈추더니 준을 응시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타박이나 비난의 의미가 아니었다.
모든 상황을 아는 윤 매니저 역시 윤설과 준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그들의 이별은 보통의 연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최대한 돕고 싶은 마음은 당연했다.
하지만 윤 매니저는 그 이면에 또 다른 고민을 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별 이후 후유증에 빠질 준의 모습이었다.
평범치 않은 첫 사랑…..
열병을 앓던 순수함이 극한의 슬픔에 잠기리란 예상은 어렵지 않았다.
“휴우….그래. 어디 보자. STV 인터뷰는 녹화니까 그렇다 치고 QBS는 생방이라 도저히 짬을 내기가 힘들겠는데? 앞뒤로 대기 시간까지 고려한 일정이라……”
쇄도하는 인터뷰들을 간신히 걸러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타이트한 상황이었다.
단독으로 움직이는 거라면 훨씬 수월할지 몰랐다.
하지만 함께 출연한 배우들과 어렵게 시간을 맞춘 탓에 정해진 일정은 번복할 수 없었다.
“하필이면 날짜가 이렇게 겹칠 게 뭐람? 방송국 편성이 잘못했지. 그날 다들 하늘만 쳐다볼 텐데…누가 드라마 보겠냐? 딱 한 주만 연기했어도…..”
준의 간절한 눈빛은 윤 매니저의 투덜거림이 쏟아지는 내내 여전했다.
윤설을 향한 갈망을 이해한 그가 스케줄러를 유심히 살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휴우…. 미안하다. 아무래도 중간엔 도저히 시간이 안 될 것 같다. 어쩌지? 일정을 모두 마치면 새벽 1시가 넘는데….너무 늦을까?”
화장대 거울 위로 윤설이 얼굴이 새겨졌다.
유난히 붉어진 두 뺨은 방 안을 밝힌 촛불 때문만은 아니었다.
윤설은 낮에 걸려온 준의 전화를 받은 후부터 아무 것도 손에 잡지 못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벌써 몇 번째 거울을 들여다 볼 뿐이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해도 기쁨이 자꾸만 솟아났다.
하지만 그 끝엔 슬픔 역시 맹렬한 기세로 피어올라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님을 뵙고 갈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경거망동하진 말자. 꿈에서라도 바라지 않았던 것들을 누렸다면 그것으로 족할 터…… 욕심도…미련도….과한 것이야. 아, 내 정신 좀 봐. 이럴 때가 아니지. 어서 준비하자.’
-똑똑똑-
해인이 윤 매니저의 전화를 받고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누군가가 옥탑방을 두드렸다.
순식간에 윤설의 입가로 미소가 피어났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