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101
100회
“윤설 씨!”
그토록 기다렸던 낭군이 밝은 얼굴로 웃었다.
“어서 오십시오. 안으로 드시지요.”
“아, 이거…늦은 시간에 너무 민폐를 끼쳐서 어쩌죠? 이렇게까지 하진 않으려고 했는데….”
“아닙니다. 이렇게라도 뵐 수 있어서 다행이라 여겼습니다.”
“윤설 씨, 고맙습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준은 옥탑방을 찾은 게 처음이 아니었지만 잠시 옥상에 머물다 간 건이 전부였었다.
여자들만 사는 공간이라 조심스러웠고 폐를 끼칠까 봐 미안하기 때문이었다.
올곧은 심성을 가진 그로선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부담일 수밖에 없었지만 새벽 찬바람에 연인을 노출시키는 건 더더욱 못할 짓이었다.
준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공간을 밝힌 건 흔한 형광등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에 놓인 형형색색의 초들은 향기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놀라셨습니까? 이것들은…. 제가 후대로 건너온 이후, 눈이 너무 아파 해인이 배려해준 것입니다.”
“아, 그렇군요. 은은하고 좋은데요? 눈이 혹사당하는 요즘인데, 저도 이런 방법을 써봐야겠습니다. 참, 이거 선물이에요. 지난번 맛있게 드셨던 게 생각나서….꽃집은 시간이 너무 늦어 문을 닫았더군요.”
준이 내민 건 케이크 상자였다.
“세상에….분주하신 것을 아는데 이토록 마음을 써주시다니…. 이것만으로도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저도 님을 위해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준이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곧 잔잔한 눈길로 옥탑방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그동안 윤설 씨가 지냈던 곳이구나….’
연인이 머무는 공간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시선이 곧 멍해지고 말았다.
한쪽 벽에 걸린 윤설의 한복을 발견한 직후였다.
준의 기분이 곧 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무서운 기세로 끓어오르는 슬픔을 겨우 진정시키는 찰나, 윤설이 웃는 낯으로 다가왔다.
“많이 시장하셨지요? 실은 이 시간까지 일하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얼마나 고단하고 힘드셨을지를 헤아려보았습니다.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이것을 준비했으니 부디 편안히 드셔주십시오.”
준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그마한 상엔 지난번 맛있게 먹었던 윤설의 솜씨가 가득했다.
새벽 2시가 다 되어가는 상황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와, 윤설 씨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호사를 누려봅니다. 사실은 배고팠는데….마음이 통했군요? 잘 먹겠습니다. 우리, 같이 먹어요.”
“아, 아닙니다. 전 아까 많이 들었습니다. 식기 전에 드십시오. 실은… 밥을 더 많이 드리려 했으나 해인이가 늦은 시간에 무리라고 하여…… 배우들은 많이 안 드신다고 들었습니다. 그저, 한 끼라도 더 차려드리고 싶은 제 마음만 받아주시어요.”
흐뭇해하던 준의 마음이 곧 먹먹해지고 말았다.
떠나기 하루 전까지 연인을 생각해준 마음은 감동, 그 자체였다.
준은 슬픈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 애써 웃는 낯으로 숟가락을 들었고 맛있게 먹는 그의 모습에 윤설이 비로소 웃었다.
깨끗이 비워진 그릇들이 내려간 자리로 이번엔 준의 선물이 올라왔다.
맛있게 먹는 연인의 모습이 보고 싶어 그가 청하긴 했으나 윤설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 선물 받은 이의 예의라고 여겼다.
그녀는 케이크 한 귀퉁이를 조금 떼어 먹더니 자신을 응시하는 낭군을 향해 싱긋 웃었다.
“맛있나요?”
“네. 참으로 그렇습니다. 조선으로 돌아가서도 생각날 것 같습니다.”
우연히 내뱉은 한 마디가 달콤한 분위기를 곧 침울함 속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이별을 앞둔 연인들은 행여 서로를 아프게 할까 봐 솔직한 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있었다.
봇물이 터진다면 감당치 못할 것만 같기 때문이었다.
준은 서둘러 포크를 들더니 케이크를 덜어 입으로 가져갔다.
“음…오늘따라 더 맛있는데요? 당신과 함께라서 그런 것 같군요. 그곳에서도 기억해준다면 행복할 겁니다. 와, 맛있다. 윤설 씨, 더 들어봐요.”
윤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포크에 담긴 것을 힘겹게 입에 넣었다.
오물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숨죽여 응시하던 준이 별안간 싱긋 웃었다.
그는 슈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윤설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예쁜 얼굴에 크림이 묻었군요. 닦아주는 영광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윤설이 곧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만의 순수함이 도드라지는 순간, 준이 미소 가득한 얼굴로 윤설의 입가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서로의 얼굴은 물론,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
크림을 닦아낸 그가 연인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 순간, 둘 사이에 더 이상의 당황은 없었다.
그의 손길에 언제나 수줍게 떨던 윤설은 이제 낭군의 시선을 조용히 마주하고 있었다.
‘내 님의 얼굴….이젠 더 이상 볼 수 없겠지……’
처음으로 느껴본 사랑의 감정….
그 상대가 준이라서 더없이 행복했지만 몇 백 년을 거슬러 돌아간다면 그를 다시 만날 길은 없었다.
윤설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이 순간, 그를 제 마음에 각인시키고 싶었다.
그런 연인을 마주한 준의 눈동자가 애잔함으로 일렁였다.
그는 윤설을 향해 잔잔히 미소 지었지만 감추지 못한 슬픔은 두 눈을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준이 윤설의 여린 뺨을 감싸더니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서로의 코와 입 그리고 숨결이 맞닿는 찰나, 윤설이 준의 등을 꼬옥 안았다.
이런 순간엔 늘 어찌할 바를 몰라 낭군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잡던 그녀였다.
하지만 마지막인 상황은 수줍음이 많은 조선의 규수에게 용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사실 윤설은 온 마음으로 사랑해주는 낭군에게 고마움이 컸고 제 사랑도 그처럼 표현해주고 싶었다.
세상에 다시없을 애잔한 입맞춤이 차분히 이어진 후, 준이 제 품에 윤설을 꼬옥 안았다.
“윤설 씨…. 당신을 처음 봤던 날이 떠오르는군요. 민속촌…. 넓은 길 한 가운데를 열심히 달려가던 댕기머리 아가씨……”
그의 어깨에 기댄 그녀가 싱긋 웃었다.
“당신에게 끌렸던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선택은 같았을 겁니다. 윤설 씨는 내게 사랑이었고 숨이었죠. 그저 바라만 봐도 마음이 쉼을 얻는 기분이었어요. 내게 한없이 편안하고….따뜻하고….그런 당신을 이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울컥한 듯 준의 음성이 흔들리자 윤설의 두 눈에 이슬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는 마음을 추스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은 붙잡고 싶습니다. 난 이제….당신 없인 안 되는데….살 수 없을 것만 같은데…. 윤설 씨가 떠난 이후는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죠. 하지만….당신은….그곳이 얼마나 그리울까요. 그리움으로 사무친 마음을 알면서도 붙잡는다는 건….어쩌면….한없이 이기적인 사랑일 테죠.”
“……돌아갈 날이 다가올 때마다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단 한 가지 연유는…..바로 준이 님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은 제게 언제나 따뜻한 햇살이었고 포근한 구름이셨죠. 진정한 은애함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신 분이기도 하십니다. 제 마음을 헤아려주시어…. 참으로 고맙습니다. 저 또한 님의 곁에 남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운명을 거스를 수 있다면…..당신과 함께 할 것입니다.”
애절한 고백을 나눈 이들이 서로를 더욱 꼬옥 껴안았다.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이기지 못한 탓이었다.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들이 슬픔으로 얼룩진 채 이별이 예정된 날의 새벽을 유영하고 있었다.
세상은 아침부터 잔뜩 들떠 있었다.
250년 만의 천문 쇼는 그 자체로 큰 매력이었지만 이미 한 달 전부터 대대적으로 홍보를 이어온 탓에 남녀노소,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망원경이나 천체 관측 도구들은 품정을 빚었고 천문대나 별이 잘 보이는 펜션들은 이미 예약불가였다.
예능과 광고는 흔치 않은 자연 현상을 시청률에 활용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 치열함 가운데 준의 드라마 가 있었다.
때마침 D-day와 천문 쇼가 겹치는 날을 마치 천운이 따라준 것으로 묘사해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뉴스와 광고 사이로 준을 비롯한 배우들의 인사 영상이 방송되었고 예고편도 틈틈이 흘러나왔다.
애쓴 보람은 여기저기에서 포착되고 있었다.
준은 전 연령층에서 고루 사랑받고 있었지만 특히 그의 이미지에 매료된 여성들이 먼저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녀들은 사극을 벗어나 현대물로 돌아온 준의 배역에 강한 호감을 내보였다.
냉철하고 능력 있는 의사의 모습은 여심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현상은 방송사와 소속사 모두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욕심을 낸 그들 때문에 준은 마지막 날까지 빠듯한 일정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윤설 씨….조금만 기다려줘요. 당신을 만나러 갈 거예요. 늦지 않을 테니…이따가 꼭 만나요. 사랑해요. 윤설 씨….’
해인이 시계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과 점심까지만 해도 애써 담담했던 표정이 저녁을 지난 후 급격히 어두워지고 말았다.
그녀는 친구를 위해 삼시 세끼를 손수 챙겨주며 최선을 다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온 윤설이 익숙한 손길로 물을 틀며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처음 왔을 땐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제 모습이었다.
‘이제…이곳의 문물들은 오늘이 마지막이 되겠구나. 정말 돌아가는 걸까? 그럴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는 윤설의 표정이 조금은 어두웠다.
돌아간다면 제 소망을 이루게 되어 좋은 일이지만 준에게 많이 기운 마음은 그 반대의 상황도 바라고 있었다.
윤설은 불효의 생각을 품은 스스로를 꾸짖었으나 사실 그 사이에서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준이 님….보고 싶습니다.’
수줍은 마음이 홀연히 낭군에게 날아가 닿았다.
일을 마치자마자 달려오겠다는 그의 한 마디가 귓가에 생생했다.
거울 속, 살며시 미소 짓는 윤설의 얼굴이 담겼다.
사랑하는 이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볼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았다.
깨끗이 씻고 나온 윤설이 벽에 걸려 있던 한복을 조용히 꺼내 입자 해인이 안절부절못했다.
“유….윤설아, 준이 씨한테 전화해볼까?”
“아니란다. 오신다고 약조하셨으니 반드시 그리 하실 것이야. 공연히 분주하실 님께 폐를 끼칠까 두렵구나.”
해인이 기어이 제 손톱을 깨물고 말았다.
그녀는 사실 친구의 담담함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제 얼마 후면 달이 떠오를 태세였고 그것은 달리 말하면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음을 의미했다.
일분일초가 아쉬운 이때에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건 물론, 연인을 배려하는 것도 힘든 법이었다.
‘윤설이 몰래 전화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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