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104
103회
-위잉, 위잉, 띠리리로-
열린 문틈으로 무언가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생김새는 영락없는 강아지였으나 몸뚱이는 북실한 털 대신 매끈하고 단단한 재질이었다.
여자를 올려다보던 그것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분이 우울하신가요? 평소보다 표정이 어두우시네요?”
강아지의 입을 통해 앙증맞은 음성이 튀어나오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 사람에게 그런 기분은 종종 일어나곤 하지만 너무 심취하시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녀석….어려운 말도 알고 제법인데?”
“어젯밤에 한글 표현법이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기분 전환을 위해 좋은 노래를 들려드릴까요?”
여자가 피식 웃었다.
“별로 내키지 않아.”
강아지가 잠시 당황한 채 바닥을 보더니 곧 여자를 다시 응시했다.
“좋아하시는 사극 드라마는 어떠신가요? 지난번에 보신 다음 회차가 준비되었습니다.”
“휴우, 그러자. 우리 똘이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이만 일어나야겠다.”
베개를 제자리에 놓아둔 여자가 허리를 숙이더니 강아지를 안았다.
주인의 품에 안긴 것이 혀를 내밀며 재롱을 부렸다.
하지만 곧 하던 것을 멈추더니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지성 아버지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뭐라고 왔니?”
“읽어드리겠습니다. 여보, 일이 일찍 끝날 줄 알았는데 K기획 김 부장이랑 갑자기 약속이 잡혔네. 미안. 내일은 꼭 같이 저녁 먹자. 해인아, 사랑해!”
앙증맞은 로봇의 음성이 남편을 흉내 내자 여자가 까르륵 웃었다.
“우리 똘이 없었음 어쩔 뻔했니? 휴우… 난 여전히 우울증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겠지….”
매끈한 등에 여자의 온기가 닿자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좋아했다.
거실 스크린엔 이미 그녀가 보고자 했던 사극 드라마가 세팅되어 있었다.
여자가 소파에 앉자 똘이가 그녀에게 물었다.
“답장을 보낼까요?”
“응. 나갈 때부터 알아봤네요. 나이 생각해서 술은 적당히 들기. 알죠? 너무 늦지는 말고….”
“사랑한다고 마무리할까요?”
“풉. 얘는…쑥스럽게스리…. 드라마나 보자. 참, 지성이한테 이따가 저녁 꼭 챙겨먹으라고 문자 보내줘.”
똘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명령을 수행하는 동시에 드라마를 재생시켰다.
조금은 침울했던 여자의 두 눈이 사극 드라마와 대면하는 순간, 편안히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감동과 아쉬움 속에 마지막 회차의 타이틀이 올라갔다.
여자가 아쉬운 표정을 짓자 똘이가 입을 열었다.
“방금 역사 카테고리에 새로운 뉴스가 업데이트되었습니다. 보시겠습니까?”
“역사 뉴스라고? 새로운 소식이 뭐가 있을까? 그래, 한 번 보자.”
주인의 취향을 알아차린 똘이가 스크린에 최신 뉴스를 연결했다.
무심했던 눈빛이 급속히 생기를 회복하더니 여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똘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박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남편에게 알려줘. 유…윤설이가……윤설이가 나타났다고!”
재개관한지 얼마 안 되는 한글 박물관은 주말을 맞이해 유난히도 북적였다.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으며 이동하는 무리 속엔 유독 어린 자녀들을 대동한 부모들이 많았고 외국인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혼자 온 것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그들의 뒤쪽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한 전시물 앞에 선 큐레이터가 상기된 음성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자, 오늘의 메인 전시물입니다. 아마 방송을 통해 아시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하는데요, 최근, 안동 김 씨 문중에서 발견된 서찰입니다.”
담담한 눈빛들 사이로 중년 여자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양반가의 한 규수가 혼인 이후, 자신의 소꿉친구에게 보내는 안부의 내용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조선시대에 혼인을 한 아녀자들의 삶이란 그리 자유롭지 못했죠. 이 서찰은 정갈한 글자로 한글의 미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 내용 또한 따뜻해서 읽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데요, 더욱 특별한 점은 현대에 사용할 법한 단어들이 간혹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당시에 쓰이던 말은 아닌 것으로 판별되었는데요, 이 규수가 실수를 한 것인지 자세한 이유를 알 순 없지만 오늘은 사는 후손들에게 잔잔한 미소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자, 다음 전시물로 이동하시죠.”
옅은 미소를 내보인 무리가 큐레이터를 따라 움직였고 소란함이 잦아든 자리에 중년의 여자가 홀로 남았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더니 서서히 유리벽 앞으로 다가섰다.
여자의 시선 속으로 몇 백 년은 훌쩍 넘은 낡은 서찰 하나가 차분히 담겼다.
그것을 담담히 응시하는 표정이 복잡했다.
허공으로 떠오른 여자의 오른손은 살짝 떨려왔고 오래지 않아 유리벽에 닿았다.
‘윤설아……………..’
저도 모르게 유리창에 손을 갖다 댄 여자가 기어이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낏 보며 수군거렸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무려 20년 동안 그리움에 사무친 존재였다.
연락 수단이 엄청나게 발전한 세상에서 결코 닿을 수 없는 아이러니는 슬픔만을 안겨줄 뿐이었다.
물론 직접 대면한다면 더할 나위 없었으나 지금으로선 윤설의 필체가 담긴 편지는 그 자체로 윤설이었다.
“날 잊지 않았구나. 너무…..고마워.”
누군가가 깊은 감동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녀를 불렀다.
“해인아!”
“오빠!”
해인이 한달음에 달려온 제 남편의 품에 안겼다.
윤 매니저는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윤설 씨라니? 대체 무슨 말이야?”
“흐윽…..이 편지….윤설이가 후대의 우릴 위해 남긴 건가 봐.”
“뭐?! 그, 그게 사실이야?”
그는 해인의 어깨를 감싼 채 유리 너머의 편지를 응시했다.
단정한 글자들은 마치 윤설을 마주한 것만 같아 반가웠다.
“무슨 내용인데?”
“그건, 나도 잘 몰라.”
“해인아, 우리 알아보자.”
그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남편을 올려다보자 그가 확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 편지의 수신인은 바로 너야. 그럼 윤설 씨가 무슨 이야길 했는지 알아야지. 안 그래? 물론 우리의 속사정을 밝히신 힘들겠지만 오빠만 믿고 따라와.”
의 팻말이 붙은 문으로 들어서는 여정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해설사에게 간곡히 부탁했던 두 사람은 안내 데스크에서 한참을 기다려서야 겨우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쇼파에 앉아 숨을 고르는 부부의 시선에 곧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왔다.
안경을 쓴 여자는 서류뭉치들을 들고 와서는 책상 위에 내려놓더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엔터테인먼트 쪽에 계시는 분이시라고요?”
“아, 네. 그렇습니다.”
윤 매니저가 서둘러 명함을 꺼내더니 그녀에게 건넸다.
“와, 종이 명함, 정말 오랜만이네요? 어? Y기획? 주니 소속사 맞죠?”
무언가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감도는 순간, 그가 밝게 웃었다.
“아이고, 우리 주니 팬이셨군요? 반갑습니다.”
“네, 완전 팬이죠. 얼마나 귀여운지…앗,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박물관에서 기획사 대표님을 만나다니… 뭔가 신기하면서도 좀 믿기지 않는데요? 전해듣긴 했습니다만, 안동 김씨 서찰의 해석본을 원하신다고요?”
윤 매니저가 곧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네, 그렇습니다. 저와 제 아내는 이 편지를 보는 순간, 큰 감명을 받고 말았죠. 하아….조선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특히 여인네들에겐 제한된 것이 많지 않았습니까? 만날 수 없는 친구에게 편지로나마 안부를 전하는 그 우정! 더욱 슬픈 건, 염원을 담은 그 편지가 끝내 전달되지 못했다는 겁니다. 휴우….이것 참 눈물이….”
해인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사이, 숨을 고른 윤 매니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아련한 이야기는 요즘 사람들에게 큰 감동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 편지를 기반으로 문득 영화를 구상해보면 어떨까 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내용을 알 수 있다면 구상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어머나…세상에….”
여자가 제법 감동한 얼굴이었다.
“연예계 쪽에 계신 분이라 감상이 역시 다르시군요. 이 서찰을 전시한지 2주가 넘었지만 이토록 진지하게 생각해주신 분은 처음이거든요. 큰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데….어쩌죠? 내용은 사적인 영역이라 비공개가 원칙이거든요.”
“아이고, 선생님. 그래서 이렇게 여기까지 찾아와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물론 원칙이 중요하죠.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황진이 같은 사람의 사랑 시도 다 공개되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큰 감동을 줬습니까? 제발, 저희 소원 좀 들어주십시오. 정 내키지 않으신다면 약속드리죠. 저희 두 사람만 보고 외부엔 절대로 유출하지 않겠습니다. 각서라도 써 드릴까요?”
“휴우….어쩌나….”
여자가 망설이자 이번엔 해인이 나섰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꼭 읽어보고 싶어요.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더없이 진지한 얼굴을 마주하자 그녀가 감동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머, 사모님 모습이 마치 서찰을 받아볼 친구처럼 간절해 보이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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