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107
106회
혼담이 오간 후부터 윤설에게 이전보다 더욱 큰 슬픔이 찾아들고 말았다.
그리고 뜻밖의 일도 함께 날아들었다.
아무도 모르게 제 자신과 몸부림치고 있는 그녀에게 선물들이 당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개똥이는 한껏 들뜬 얼굴로 그것을 별채로 날랐다.
얼굴만 보면 마치 그녀가 혼인을 앞둔 처자 같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이가 상전에게 풀어보길 권했지만 윤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빛조차 보지 못한 선물들이 방의 한쪽에 그렇게 쌓여갔다.
며칠 후 또 다른 것을 들고 온 개똥이가 마침내 입을 삐죽이고 말았다.
“아씨, 저것들 좀 보십시오. 귀한 것을 이토록 방치하시다니…그 댁 도련님의 마음도 헤아려주셔야죠. 이 정도의 정성을 보이는 분도 참으로 흔치 않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대단한 댁의 도령이 뭐가 아쉬워 이토록 정성을 쏟는단 말씀입니까? 아씨, 어서 이것부터 펼쳐보시와요. 방금 그 댁 행랑아범이 전하고 갔습니다.”
개똥은 작심이라도 한 듯 선물을 윤설의 손에 꼬옥 쥐어 주었다.
오늘 온 것은 비교적 부피가 작아 한 손에 들어왔다.
윤설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개똥의 말은 옳았지만 자신이 없는 탓이었다.
선물들을 살펴보지 않은 까닭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열어보는 순간, 이 혼인을 인정하게 될까 봐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준을 지울 수 없었고 그런 상태로 다른 사내를 받아들이는 건 못할 짓이었다.
그건 상대를 향한 무례였다.
또한 제 자신을 괴로움의 구덩이로 밀어 넣는 꼴이었다.
어쩌면 평생을 고통 속에 살지도 몰랐다.
“아씨, 정말 이러실 거예요? 아휴, 속상해. 일단 보시고 말씀을 하셔요. 어서요.”
머뭇거리던 윤설이 거듭된 권유를 이기지 못했다.
그녀는 상자의 뚜껑을 손에 잡은 채 정인을 생각했다.
‘준이 님….님을 잊은 건 아닙니다. 그저…. 송구할 뿐입니다. 저를 용서하세요.’
여린 손끝이 드디어 상자를 여는 순간, 윤설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그녀의 침묵 속으로 개똥의 감탄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세상에나….이렇게 어여쁜 가락지는 처음 봅니다. 그것 보십시오. 역시 범상치 않은 도련님이시라니까요?”
‘이…이것은!’
윤설이 두 손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손안에 든 건 분명 준이 제 손가락에 끼워주었던 홍옥 가락지였다.
모양이 조금이라도 다르다면 헛것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 정인이 건넸던 것과 완벽히 일치했다.
후대의 것이 조선으로 거슬러 올 순 없는 노릇이었다.
윤설은 무엇에라도 홀린 것만 같았다.
눈을 비비며 가락지를 살펴보던 그녀가 문득 쌓인 선물들을 응시하더니 아래쪽의 상자 하나를 가리켰다.
“저것을 가져오렴.”
“아휴. 암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씨.”
개똥이 신난 얼굴로 재빨리 선물을 가져왔다.
이전보다 조금 더 크고 묵직한 뚜껑이 스르륵 열리는 순간, 이번엔 윤설이 두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상자 안에서 고운 자태로 주인을 기다리던 것은 바로 준이 그녀에게 선물했던 한복이었다.
연분홍빛 치마와 나비 자수…..
경복궁의 야경을 구경했던 날….
그리고 그의 집을 방문했던 날….
윤설의 마음속으로 그날의 설렘이 새록새록 피어나기 시작했다.
“개똥아, 이….이댁….도령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아봐줄 수 있니?”
사흘 후, 개똥이의 날랜 걸음이 별채의 대문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상전의 혼사를 기원하며 제법 신이 난 상태였다.
처소 안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윤설이 개똥이를 반겼다.
“알아보았니?”
숨을 헐떡이던 그녀가 곧 배시시 웃기 시작했다.
“알아보기만 했게요? 그분을 먼발치에서 뵙기까지 했다니까요?”
“차…참이니?”
“그럼요. 아휴, 그냥 머리부터 발끝까지 광채가 흐르더이다. 헤헷. 한양 도성 안에 그런 분이 계셨을 줄은 몰랐네요. 아씨가 복이 많으십니다. 그런데요, 아주 신기한 얘길 들은 거 있죠? 글쎄, 얼마 전에 그분이 낙마를 하시었는데 그만 정신을 잃으셨다지 뭡니까? 아씨가 깨어났을 그 무렵에 도련님도 의식을 회복하셨대요. 세상에….그 얘길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두 분은 완전 연분이 아니십니까?”
개똥이 까르륵 웃는 사이, 윤설이 입을 열었다.
“저 선물들 말이다. 그분이 직접 보내셨다고 하니?”
“예. 아마도 그분은 벌써부터 아씨께 퐁당 빠지신 것 같습니다. 아휴, 제가 다 콩닥거리네요.”
“허….허면….그분의 존함은 무어라 하던?”
“민 준 자라고 들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윤설의 온몸이 전율에 휩싸이고 말았다.
‘어….어찌….이런 일이…. 정말 그분일까?’
윤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여흥 민가라 했으니 성명이 같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후대의 정인에게 받은 선물들이 고스란히 온 것은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개똥이 아무 것도 모른 채 또다시 입을 열었다.
“아씨도 그분이 궁금하시죠? 염려 마셔요. 며칠 후에 그 댁 어른들과 도련님께서 이곳에 오신답니다. 혼인 전에 그런 전례는 없다지만 그분께서 이쪽 어른들을 뵙고 인사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하셨다니 뭡니까? 아휴, 어쩌면 그리도 반듯하신지….혹여 아씨를 먼발치에서 본 후로 흠모하게 되신 건 아닐까요?”
혼인에 대한 염려로 한숨짓던 소녀의 공간이 서서히 설렘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달빛이 은은히 스며든 방, 이불을 가슴께까지 덮은 윤설은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조용히 허공을 응시한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반짝이고 있었다.
‘그분은 누구실까? 설마? 아니야. 그럴 리가…. 허나…. 준이 님이라면….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그분이 내 님이시면 정말 좋겠다.’
낭군을 떠올리며 스르륵 잠든 얼굴 위로 옅은 미소가 잔잔히 피어났다.
하루 또 하루……손꼽아 기다리던 그날이 윤설을 찾아왔다.
그녀는 애써 담담함을 유지했으나 뛰는 가슴을 어쩌진 못했다.
드디어 그간 품어왔던 의문에 관해 깔끔한 해결을 눈앞에 둔 셈이었다.
경우의 수는 단 두 가지였다.
여흥 민가의 도령이 진짜 준이거나….아니거나…
아니라면 그 허탈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지만 윤설은 남몰래 자그마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윤설의 집엔 손님 방문이 잦은 편이었지만 이번엔 공기 자체가 사뭇 달랐다.
긴장감도 서려 있었고 설렘도 담겨 있었다.
사실 윤설이 깨어난 것만도 기적이었다.
그런 규수가 혼인을 하게 된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벅찬 기쁨이 그녀의 부모 뿐 아니라 종들에게까지 새어나오는 건 당연했다.
“아씨, 드디어 귀한 손님들이 당도하셨습니다.”
별채로 한달음에 달려온 개똥의 아룀이 윤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른 아침부터 말끔히 단장한 채 처소에 머무는 중이었지만 사실 손님들을 만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녀자의 행동에 제약이 많기도 했고 상대가 어려운 탓도 있었다.
사랑채에서 따로 언질이 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이대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개똥은 사랑채와 별채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제 상전에게 상황을 전달하기 바빴다.
“찻상이 들여졌는데 분위기가 화기애애한가봅니다. 웃음소리도 새어나왔다니까요? 대감마님께서 도련님을 아주 흡족히 여기시는지 내내 인자하게 웃고 계시답니다.”
윤설이 제 아비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언제나 고명딸에게 인자했던 그가 환히 웃는 모습은 어렵지 않은 상상이었다.
‘아버지께서 기뻐하신다니….이제야 불효를 덜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도 기뻐. 그분이 님이라면….금상첨화일 텐데….아니라면….그래도 부모님이 저리 기뻐하시니 혼인을 해야겠지? 휴우…그분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
속이 타는 윤설이 제 손톱을 깨물었다.
도령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다면 모든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일 역시 하명이 있어야 가능했다.
“아씨, 염려 마셔요. 잠시 후에 도련님을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상전의 속내를 꿰뚫는 듯한 한 마디에 윤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은 그분이 은밀히 전갈을 보내셨지 뭡니까? 이것만 봐도 이미 아씨께 빠지신 게 분명하다니까요?”
‘은밀한….. 전갈이라고?’
개똥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알게 되실 겁니다.”
밖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나갔던 그녀가 방에서 꼼짝 않던 상전을 불러냈다.
문을 열고 나오자 곧 신선한 바람 한 줄기가 윤설의 콧망울을 스쳐갔다.
“아씨, 자…어서 신을 신으시고 예서 꽃을 보고 계셔요.”
“응? 갑자기 무슨 일이니?”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놀라진 마시고요.”
개똥이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사라지자 윤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문을 품은 그녀의 시선이 곧 어여쁜 꽃들에 닿았다.
별채의 자그마한 뜰엔 주인을 닮은 것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미소 띤 얼굴로 여린 꽃잎들을 쓰다듬던 윤설이 곧 준을 떠올렸다.
그는 정인에게 아름다운 꽃들을 선사했었고 사랑의 마음은 언제나 그녀를 행복의 정점으로 이끌곤 했었다.
“안녕하십니까?”
난데없는 사내의 음성에 추억을 곱씹던 윤설이 몹시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끔히 도령의 복식을 갖춘 사내가 별채의 대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윤설이 떨리는 마음으로 그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지만 그가 시선을 아래로 향한 탓에 얼굴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제발…..제발….’
드디어 두 사람이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도령이 고개를 들어 갓 아래 숨겨둔 얼굴을 드러내는 찰나, 윤설의 두 눈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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