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12
11회
“잠깐만요…. 아저씨!”
열심히 달리던 해인이 막 출발하려는 버스를 기어이 잡아 세웠다.
질주한 보람이 있었다.
겨우 올라탄 그녀가 숨찬 목소리로 기사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기사는 마치 흔치 않은 손님을 마주한 듯 피식 웃고는 곧 문을 닫고 출발했다.
빈자리를 찾아 앉은 해인이 숨을 내쉬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휴우….. 윤설이는 잘 있을까?’
식사시간에 짬을 내어 나오긴 처음이었다.
보통 점심은 안에서 대충 해결하기 일쑤였지만 일하는 내내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던 해인은 결국 매니저에게 어렵게 말을 꺼내보았다.
윤설은 졸지에 갓 상경한 사촌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용기를 낸 보람은 있었다.
평소에 대충 시간만 때웠다면 어림없는 일이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성실함을 겪어본 매니저는 기꺼이 허락해주었다.
해인은 현재에 두려움을 느끼는 윤설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홀로 있게 해야 하는 상황에 미안함이 컸다.
어렵게 구한 일터들이기에 열심히 해왔던 일들을 당장 그만 둘 순 없었다.
제 코가 석자인데다가 산 입에 거미줄 칠 순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지긋지긋한 삶이 싫어 큰소리를 치고 무작정 상경하긴 했지만 숨이 턱에 찰 만큼 일해도 빠듯한 살림이었다.
그나마 올 초, 고시원에서 옥탑방으로 옮긴 것은 스스로 일궈낸 대단한 일이자 희망의 그림자였다.
해인은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고 그것은 오랫동안 이어진 가정불화에 대한 그녀만의 복수였다.
조바심으로 일렁였던 해인에게 창밖의 풍경이 담겼다.
뜻밖의 친구,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에 느닷없이 나타난 친구는 더군다나 조선에서 왔다고 했다.
해인은 아무도 믿지 않던 자신이 윤설을 믿고 집에까지 들인 것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 것과 미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된 것도 신기했다.
나오기 전, 시계의 숫자에 노란 포스트잇을 붙여둔 것은 작은 배려였고 자신이 왜 그녀에게 그토록 마음을 쓰는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이유는 몰랐지만 왠지 자신이 보호해야 할 것만 같았고 또래로서 잘 대해주고 싶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던 해인이 다시금 시계를 바라보았다.
버스의 안내 방송은 그녀가 내릴 정류장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윤설아!”
마음이 다급했던 해인이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그와 동시에 매트리스에 기댄 채 잠들었던 윤설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세상에…. 그러고 잤구나? 올라가서 편히 눕지. 그러다 몸살 나겠다.”
“아, 내가…. 깜빡 졸았나 보구나….어서 오렴.”
“에이, 졸면 좀 어때? 원래 지루하면 잠이 오기 마련이야. 배고팠지? 점심 먹자.”
부엌에서 손을 씻은 해인이 들고 온 것을 서둘러 펼치기 시작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청각을 자극하자 곧이어 반팔과 반바지 차림의 댕기머리 소녀가 친구의 곁에 나란히 섰다.
윤설의 시선은 제 귀를 쫑긋거리게 만든 것으로 먼저 향했다.
흐물흐물하게 널브러진 것은 반짝여서 눈길을 끌기도 했지만 윤설이 놀란 것은 무엇보다도 그 빛깔이었다.
먹색은 정성껏 잘 갈아진 먹물보다도 훨씬 진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그녀가 붓글씨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신기함을 감추지 못한 얼굴이 드디어 질문을 시작했다.
“이것은 무엇이니?”
컵을 꺼내던 해인은 윤설이 가리키는 것을 응시했다.
“아, 그건 비닐이라고 하는 거야.”
“비…..닐……?”
“응, 물건을 담는 용도로 쓰여. 요즘 세상엔 정말 흔한 거야. 그러니까….조선시대로 말하자면….음…. 보자기? 그래, 보자기 같은 거야.”
“아, 그러하구나. 어쩐지…. 첫날 보았던 것들도 색은 달랐지만 모두 이렇게 반짝이는 것이 특이했단다.”
“히잇, 우린 너무 흔해서 잘 모르는데….. 네가 보기엔 그럴 수도 있겠다. 비닐은 검정색만 있는 건 아니야. 색깔은 다양해.”
옅은 웃음사이로 이번엔 고소한 냄새가 윤설의 후각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근원을 찾아낸 그녀의 눈길이 순식간에 동그래지고 말았다.
이번에도 먹색이었다.
기다랗고 동그란 무언가는 분명 그랬다.
후손들이 유난히도 먹색을 좋아하는 거라 여기는 찰나, 칼집이 난 것들이 꽃처럼 활짝 펴지더니 겉과는 다른 다채로움이 눈앞에 나타났다.
감탄한 얼굴을 마주한 해인이 겸연쩍은 미소로 입을 열었다.
“히잇, 또 신기한 거 발견? 앞으로도 계속 그렇겠지만 말이야. 이것도 처음이지? 얘 이름은 김밥이라고 해. 여기에선 간단하게 먹기 좋은 음식이고….. 소풍갈 때 도시락에 싸가지고 간단다.”
“김…..밥……?”
“응, 맞다. 어제 먹어본 삼각 김밥 그 애랑 사촌지간 정도 될 걸? 크큭…..”
이제야 알았다는 듯 윤설이 웃음을 내보이자 해인이 서둘러 상을 차렸다.
“미안. 마땅한 접시가 없네. 그냥 먹어도 될까?”
고시원 시절엔 그릇이 필요 없었고 옥탑방으로 옮긴 이후엔 거의 기본적인 그릇만 몇 개 갖춘 것이 전부였다.
딱히 집에서 무언가를 차려먹을 일도 없었지만 그만큼 세간에 시간과 돈을 들일 여력이 없는 삶이었다.
하지만 해인의 민망함을 아는 듯 윤설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우린 벗이 아니니? 이대로 먹어도 정말 꿀맛일 듯하구나. 한번 맛보아도 되겠니?”
“그럼. 당연하지. 어서 먹어봐. 히잇….. 조선에서 온 네가 이곳의 것들은 접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신기하고 재밌어.”
“나도….. 낯선 마음이 없진 않지만….. 한편으론 재미가 있기도 하단다.”
웃는 낯으로 김밥 하나를 입으로 넣은 윤설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시금 하나를 더 먹었다.
안에 든 것이 무언인지를 물을 여유는 없었다.
그 시대에 겪어보지 못한 신기한 음식은 윤설의 입맛을 단번에 사로잡았고 그녀는 마치 자석처럼 입에 넣어 씹고 또다시 집어 드는 일을 반복할 뿐이었다.
체할까 염려한 해인의 말에 윤설은 그제야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뒷정리를 한 해인이 바닥에 놓여있던 만화책과 과자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혼자 있을 친구가 무료해할까 봐 서둘러 놓고 간 것이었다.
“저거 다 읽어봤니? 어땠어?”
과식을 한 탓에 부대낌을 느끼던 윤설이 수줍게 웃었다.
“종이의 질감이며 붓 그림이 너무도 좋더구나.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표정이 익살스러워 혼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허나…… 내, 글자를 도무지 알 수 없어……”
“으,응? 한글을 알 수가 없다고?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드셨으니 영조시대에도 쓰였을 텐데……..헐, 대박…. 뭔지 알 것 같다. 나 또 역사 공부하는 거얌? 크크……”
해인은 한바탕 웃더니 얇은 판을 꺼내 검지로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저건 무엇이기에 이곳의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걸까? 해인이는 무엇을 알아볼 때마다 저것을 사용하는 것 같구나. 도깨비 방망이라도 되는 걸까?’’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윤설에게 해인이 판을 내밀었다.
낯선 물건에 놀라 잠시 움찔했던 그녀가 곧 밝은 미소를 회복해갔다.
해인이 보여준 것은 그녀에게 익숙한 문자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속의 부대낌이 한 번에 내려가는 듯 시원한 기분이었다.
“그래, 그때는 이렇게 썼구나. 윤설아, 지금은 좀 달라졌어. 낯설겠지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글도 많이 바뀌었어. 그러니까….. 읽기에 더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말이야. 아….국어시간에 배운 한글의 역사를 이렇게 떠올리게 되다니…… 헐, 게다가 그 시절의 너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정말 실감이 안 난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이 변화했다는 말은 윤설에게 조금 서운하게 다가왔지만 더욱 깔끔하고 보기 좋게 변모한 글자에서는 안정감이 느껴졌다.
어쩌면 좋은 의미에서의 발전일지도 몰랐다.
그나마 우리 고유의 문자가 없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그래, 처음부터 백성들을 위한 글자였으니 후세에 널리 또 편안하게 쓰이고 있다면 만드신 그분들도 기뻐하시겠지.’
“윤설아, 있잖아. 휴우, 어쩌지?”
손목시계를 바라본 해인이 잔뜩 미안한 얼굴로 윤설을 응시했다.
긴히 할 얘기가 있는 모습이었다.
“나가보아야 하는 것이로구나?”
해인은 제 마음을 알아준 벗에게 고마움을 느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얼굴엔 미안함도 스며있었다.
“이곳이 낯설고 두려울 너를 혼자 두고 나가게 되어 정말 미안. 이틀 후면 쉬는 날이니까 그때는 같이 놀자. 우리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좋은 곳에도 가보자. 이틀만 기다려 줄 수 있어?”
윤설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하지 말렴. 내가 오기 전부터 너의 일이 있었을 것인데…… 나 때문에 해를 입는다면 그것은 아니 될 일이지. 후대를 찾아온 나는 손님의 입장이니 그저 모든 것을 따르고 지켜보는 것이 옳을 듯하구나. 어서 다녀오렴.”
“정말?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마음이 한결 편하겠지만, 나 역시 너랑 있고 싶다는 걸 꼭 알아줘. 네게서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또 이곳의 이야기도 들려주고 싶단 말이야. 히잉…..”
윤설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자리에서 일어서던 해인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윤설아, 답답하면 옥상에 잠시 나와 있어도 돼. 낮엔 이집에 사는 사람들 일 나가고 없거든. 혹시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내 친구라고 해. 잠시 와 있는 거라고 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거야. 문 잠그고 여는 건 알아뒀지?”
고개를 끄덕인 윤설이 따라 일어서자 해인이 무거운 발걸음을 힘겹게 떼며 거듭 물었다.
“혹시 필요한 거 있니? 오는 길에 사가지고 올게. 말해봐.”
“아니다. 그런 것은 없단다.”
“나야말로 아니다.”
“응?”
“에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혼자 있을 시간이 많아 무료할 텐데 어떻게 견디려고? 내가 안 되니까 제발 얘기 좀 해줘.”
해인의 얼굴엔 기꺼이 친구를 배려해주고 싶은 마음이 묻어나고 있었다.
염치없는 것만 같아 섣불리 말하지 못했던 윤설이 용기를 냈다.
“저…. 그렇다면…. 정말 염치없지만, 혹여 붓과 벼루를 구할 수 있겠니? 아, 종이도 말이다.”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신발을 신던 해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박! 혹시 붓글씨를 쓰려는 거야?”
“아…. 그, 그게…. 시간이 잘 갈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너무 무리한 청을 한 것 같구나. 그것들을 구하려면 어렵고 또한 값이 비쌀 터인데……”
미안한 마음에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던 윤설을 향해 해인이 소리 내어 웃었다.
“오, 노노…. 전혀 아니지. 문방구에 가면 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아. 그리고 비싸지도 않을 걸? 히잇, 좋아. 꼭 사올게. 그럼, 다녀온다.”
윤설은 해인의 말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결 밝아진 얼굴로 집을 나서는 모습에 덩달아 편안해졌다.
문방사우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해인은 어쩐 일인지 자신감을 내보였고 윤설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궁금해지고 말았다.
자리로 돌아와 앉은 그녀는 곧 생각에 잠겼다.
‘후손들은 정말 분주하게 살고 있구나. 모두들 일하느라 이 시간에 집에 없다니…… 해인이는 미명부터 일을 한다고 했지? 그건 무슨 일일까? 혹여……’
윤설은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설마…. 그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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