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14
13회
고무장갑을 끼던 해인이 의아한 눈빛으로 윤설을 바라보자 그녀가 겸연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리 볼 것은 없단다. 그저…… 신세를 지는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돕고 싶은 마음뿐이니 말이다. 더군다나 넌 날마다 몹시 분주하니 이런 일이라도 내가 거든다면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 싶어서……”
“에이, 그래도 넌 손님인데….. 게다가 조선에서 왔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시켜?”
“해인아, 넌 나를 손님으로 여기는 것이니? 난, 널 벗으로 여긴다만….. 너 역시 그렇다면 허락해다오. 이곳에 있을 동안은 네게 손님이 아닌 벗으로서 도움이 되고 싶단다.”
조선에서 온 친구의 두 손에 고무장갑이 끼여졌다.
윤설은 낯선 물건의 촉감에 흠칫 놀라고 말았지만 제 손에 꼬옥 들어맞는 것을 참으로 신기하게 여겼다.
손에 물을 하나도 묻히지 않고 물을 만진다는 건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날마다 새롭게 마주하는 후손들의 신문물은 이미 상상을 초월하여 두려움마저 느끼게 만들었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조선에서도 유달리 호기심이 많았던 윤설은 위험한 것이 아니라면 조금씩 도전해보고 싶었다.
“준아, 저녁에 바로 보도 자료 작성했고 내일 아침에 대대적으로 풀기로 했다. 대표님이 얼마나 걱정하시는지 몰라. 아, 진짜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냐? 왜 하필 심이지야? 아놔, 거기 매니저랑 대판 싸울 뻔했다니까.”
대기실 텐트로 들어온 매니저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야간 신의 촬영을 앞두고 대본에 몰입하던 민준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스캔들의 당사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러지 마세요. 형 마음은 잘 알지만….. 저 때문에 싸우신다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요.”
“야, 진짜 괜찮은 거야? 사람이 말이야, 이럴 땐 화도 내고 그래야지. 너 그러다가 화병 난다? 이 바닥이 얼마나 더럽고 힘든지 잘 알잖아. 약하고 착해빠지면 만만히 보는 것들이 짓밟아버린다고. 자, 봐봐. 내 말이 맞잖아. 그동안 개고생하다가 겨우 탄탄대로에 올라섰는데 그 꼴을 못 본다 이거지? 참내…. 이럴 때마다 아주 넌더리가 난다니까.”
묵묵히 매니저의 푸념을 듣고 있던 남자가 또다시 피식 웃고 말았다.
“나만 아니면 되잖아요. 모두가 그렇게 믿을 거라고 생각해요. 형, 별일 없을 테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저 이번 신, 편하게 가고 싶어요.”
미동조차 없는 한 마디였다.
매니저는 졌다는 듯이 한숨을 내뱉더니 들고 온 비타민 음료를 건넸다.
“맞장구 쳐 줄 거라 믿은 내가 바보다. 그래, 알았어. 암튼 넌 걱정 말고 연기에만 전념하라고. 응? 저런 것들 상대는 회사에서 전담할 테니까.”
“네, 고마워요. 형.”
매니저가 밖으로 나가자 준은 나직이 탄식을 내뱉더니 다시 대본을 손에 들었다.
스물다섯의 청년은 배우이기 이전에 반듯한 성품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또래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은 언제나 애늙은이로 취급당하기 일쑤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민준이 연예계에 발을 들인 것은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서였다.
가정 형편상, 일찌감치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곧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고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었다.
그러던 중, 24시간 운영되는 카페에 야간 스태프로 일하게 되었고 우연히 매장을 방문한 매니저의 눈에 띄게 되었다.
연예계는 다른 세상이라 여겼던 그였다.
뜻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민준의 이미지에서 필을 느낀 매니저는 수없이 찾아와 공을 들였다.
매니저는 단정하고 깨끗하며 정직한……. 이제껏 연예계에서 전무했던 그만의 이미지로 신선한 돌풍을 일으키자고 설득했다.
그의 한 마디가 꼬임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민준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삶의 목적 없이 숨차게만 달렸던 청년에게 처음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매니저의 안목이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해 겨우 따낸 배역엔 대사조차 없었지만 그는 맡은 역할을 잘 해냈고 24시간 대기하는 내내 스태프들에게 깍듯하게 대했다.
예의바른 신인의 모습은 조금씩 각인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스태프들의 입을 통해 캐스팅 추천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었다.
연기와 인성이 모두 되는 이를 반기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추천은 기어이 주연급을 따내기에 이르렀고 그렇게 첫 주연인 이번 드라마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점잖고 반듯한 그에게 당황스러운 일들도 많았다.
튀는 이들이 많은 세상에서 독야청청하는 모습은 타인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그를 좋아하는 팬들 만큼이나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여자 연예인들도 꽤 있었다.
게다가 돈을 빌려간 후에 잠적해버리는 지인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담담히 웃으며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통해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 싶은 마음과 연예계에 선한 영향력을 흘려보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스스로 부족함이 많다고 여긴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다면 더 힘든 누군가도 일어설 힘을 얻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번 스캔들은 잠잠하던 연못에 돌이 날아든 격이었다.
아니 뗀 굴뚝에서 연기가 나도록 만드는 것쯤은 연예계에서 일도 아니었다.
민준은 심이지와 단 둘이 커피라도 마셨다면 차라리 억울하지는 않을 것만 같았다.
그녀를 본 것은 작년, 연말 시상식장에서 잠깐이었고 올 4월, 방송국 로비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 전부였다.
두 번의 상황 모두 스태프들과 함께 한 자리였다.
이후로 심이지는 각종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이상형으로 민준을 꾸준히 지목했으며 함께 작품을 하고 싶다며 러브콜을 보내곤 했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겨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준에게 이번에 일어난 그녀와의 스캔들은 뜬금없고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도 사람이었다.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타인의 이목을 피해 어딘가로 떠나고 싶기도 했고 때론 누군가에게 마음을 터놓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바쁜 스케줄이 그런 여유를 허락해 줄 리 없었다.
게다가 주변엔 믿을 만한 친구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친구들은 그의 고민을 배부른 소리라며 일축했고 대단한 인기로 커버하라며 비아냥거렸다.
민준은 그런 친구들을 이해했다.
다 같이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고 여전히 그 안에 살고 있는 그들이 제법 빠르게 성공한 친구를 질투하는 것은 당연했다.
연예계라는 특수한 환경 역시 그들의 질투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민준은 더 이상 친구들에게 제 마음을 터놓지 않았고 어느 순간, 자연스레 멀어지고 말았다.
“휴우……..”
잡념을 떨쳐버리려는 듯, 심호흡을 하던 그가 다시 대본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조선 명판관으로 열연 중인 “명천”의 촬영이 한국 민속촌에서 일주일째 이어지고 있었다.
쉬는 날마다 침대에 들러붙어 늘어지게 자기 바빴던 해인이 알람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그날이 되었다.
다른 뜻으로는 이틀 동안 낯선 세상에 갇혀있던 조선의 규수가 드디어 밖으로 나갈 수 있음을 의미했다.
해인은 며칠 동안 이날을 위해 준비했었다.
윤설에게 조선의 미래를 보여주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바로 알찬 여행 일정으로 이어졌다.
주로 서울과 근교를 둘러보는 당일 코스였지만 분주히 일하는 가운데에서도 검색과 메모를 이어간 정성은 뭔지 모를 기쁨이었다.
늘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이었다.
웃을 일보단 고단함에 지쳐 우울한 일이 더 많았던 해인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식사를 차리고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은 낯설기도 했지만 뜻밖에도 활력소가 되고 있었다.
다른 세상에서 온 벗의 존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해인은 그녀의 등장이 자신의 쓸쓸한 삶을 이해해준 하늘의 선물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서프라이즈를 위해 비밀을 유지한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며 윤설을 불렀다.
“윤설아, 오늘 날씨가 정말 좋다! 히잇….. 우리 여행도 꽤 즐거울 것 같아.”
“여….행?”
“응. 어제 말했지? 내가 오늘을 위해 다 검색해두었으니까 넌 그저 따라오기만 하면 돼.”
“하, 하지만……”
전날, 조금은 흥분된 마음으로 잠을 설쳤던 윤설에게서 어쩐 일인지 근심이 새어나왔다.
해인이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가 자그맣게 대꾸했다.
“그, 그게 말이다. 어제만 해도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막상 나가려고 하니 염려스럽구나. 이 처소에서 본 것만도 신기하고 당황스러운 것들이 많은데 세상엔 얼마나 더 놀라운 것들이 많을는지…..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정말로 두렵다.”
해인은 그제야 혼자 신나했던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조선에서 온 윤설에겐 지금의 모습이 두려움을 자아낼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 순간이었다.
잠시 친구의 표정을 살피던 해인이 입을 열었다.
“윤설아, 네 마음, 조금 이해할 것 같아. 하지만 이 세계로 왔다면 이것도 너의 시간인데 한 번 체험해보면 어떨까? 네가 그랬잖아. 조선에서도 후손들에 관해 호기심이 많았다고…… 그럼 하늘이 허락해 준 기회일 지도 모르잖아. 내가 네 곁에 있을 거니까 염려하지는 마. 물론 조선시대랑은 많이 달라서 복잡하긴 하겠지만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인데 무조건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어. 정말이야. 그리고 너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 정말 좋아할 거야. 어때? 날 믿고 한 번 용기 내볼래?”
망설이던 윤설이 옅은 미소로 고갯짓했다.
혼자서 나서야 한다면 결론에 이르지 못했을 그녀였다.
여전히 용기보단 두려움이 앞섰지만 그녀는 벗인 해인을 믿었다.
‘그래, 해인이의 말이 옳은 수도 있어. 벗이 있으니 용기를 내어보자. 밖으로 나간다면 혹여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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