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24
23회
남자가 헛웃음을 지었다.
너무나 당당한 아가씨 때문인지 아니면 이런 상황이 자주 있었기 때문인지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웃음을 멈춘 그가 그만 가라는 듯 손짓했다.
“여기 더 이상 영업 안 하니 돌아들 가요.”
“예에? 정말이요?”
해인이 억울한 표정으로 되묻자 남자가 굳은 얼굴로 또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이니까 그만 가세요.”
“누구 맘대로요?”
“뭐, 뭐요?”
생기 잃은 남자가 발끈하자 해인의 뒤에 숨어있던 윤설이 벗의 옷자락을 붙잡고 속삭였다.
“해, 해인아…. 그만 가자.”
“아니야. 윤설아. 여기 정말 맛있다고 소문난 곳이라고. 아저씨, 무례했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제가 정말 아끼는 친구랑 꼭 오고 싶었던 곳이에요. 이 친구는요, 보잘 것 없는 제게 용기를 주고요 따뜻하게 격려해주는 사람이라고요. 저를 향해 못 배웠네, 못 생겼네…. 손가락질 하는 인간들 속에서 유일하게 제 편이 되어준 친구라고요. 이런 친구를 위해 월급을 모았어요. 그리고 맛있는 음식으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어서 설레는 마음으로 왔다고요. 손꼽아 기다린 날이 오늘인데 이대로 가라고요? 아저씨, 그건 너무 야박한 거 아닌가요?”
구구절절한 사연은 듣는 이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고 말았다.
중년의 남자는 할 말을 잃은 듯 멈칫했고 숨어있던 윤설은 자신을 그렇게 여겨주는 벗에게 감동한 표정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던 해인이 곧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가 사과하려는 순간,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건 야박하군요. 하지만 나도 사정이 있다오. 이곳이 잘 나갔던 건 불과 몇 개월 전…… 손님으로 왔다가 음식 맛에 반해 단골이 된 경우였소. 난 원래 변두리에서 기사식당을 했었어요. 벌이는 괜찮았지만 내심 한식당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오. 어찌어찌하다가 여기 사장이랑 호형호제하게 되었고 인수를 논하기까지 되었죠. 그 놈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들어가게 됐다며 서둘러 매입해줄 것을 요청했고 난 내 식당을 처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빚까지 지고 말았어요. 휴우……..”
해인은 저만큼이나 구구절절한 남자의 속사정에 어안이 벙벙한 채로 귀를 기울였고 두려움에 떨던 윤설 역시 긴장을 늦추고 그의 말을 들었다.
남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잘 나가던 한식당이니 권리금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지만 감수했죠. 비법을 알려준다는 말을 믿었고 손님들이 북적이는 곳이니 곧 많이 벌어 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그런데….. 하아……”
“왜요? 그 사람이 야반도주라도 했어요?
어느덧 사연에 몰입한 해인이 저도 모르게 오지랖을 발동했고 남자가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어찌 알았지? 그래요. 그 원수 같은 놈이 글쎄 튀었지 뭐요!”
“헐….. 먹튀한 거예요?”
“먹튀?”
“그러니까 먹고 튀는 황당한 시추에이션 말이에요.”
남자가 또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헐, 왜요? 갑자기 무슨 이유로? 작정하고 사기 친 거예요? 뭐에요?”
“알고 보니 도박 빚을 졌답디다. 휴우…. 그 죽일 놈….. 내 피 같은 돈을 들고 그렇게 사라져버리다니…….”
“그래서요? 그 후에 어떻게 됐는데요?”
“뭘 어찌 되었겠소? 이렇게 문 닫은 걸 보면 뻔한 거지. 내, 식당에서 음식을 해대며 산 세월이 짧지 않지만 한정식은 또 다른 분야니까….. 아무리 발버둥 치며 열심히 만든다고 한들 뭐하겠소? 그 맛이 아니니 손님이 끊길 수밖에……저가로는 타산도 안 맞고…. 여길 팔고 뜨자니 내키지 않고…. 그렇다고 눌러앉자니 그것도 참…….”
해인과 윤설이 동시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보인 남자의 몰골이 이해가 되는 찰나였다.
해인이 그제야 겸연쩍은 얼굴로 사과했다.
“아저씨, 그런 일이 있으신 줄도 모르고……. 죄송해요. 그래도 이 집만큼은 건지셨잖아요. 그 나쁜 놈이 이중 계약이라도 했음 어쩔 뻔했어요? 아휴, 요즘 별 이상한 인간들도 많다고요. 아무튼…. 힘내세요.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해인과 윤설이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남자의 음성이 그들을 붙잡았다.
“저기….. 이렇게 일부러 찾아준 것도 고맙고…. 내 얘길 들어준 것도 고마운데…. 그냥 돌려보내려니 이제야 좀 미안하네요. 그렇게 좋은 친구를 대접하러 왔다는데…. 근사한 한정식은 아니지만 기사 식당 밥이라도 괜찮다면 먹어볼래요?”
“예에?”
마당이 불을 밝히자 어둠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제법 몸통이 굵은 나무들과 그 아래로 펼쳐진 평상들은 야외에서도 식사가 가능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한옥 마당이 품은 운치에 해인과 윤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남자는 평상을 닦아내더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한 후, 부엌으로 보이는 문으로 들어갔다.
‘괜찮을까? 아무 일 없겠지?’
해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 스마트폰을 꺼냈다.
별의 별 사건들이 많은 세상이었다.
그저 밥 한 끼를 먹으려고 온 곳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무엇에 홀린 듯 이렇게 앉게 되었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조심해야만 했다.
해인이 살며시 일어나 조용히 부엌 쪽으로 다가가자 윤설은 평상에 앉은 채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동그래진 눈으로 벗을 응시했다.
해인은 친구를 안심시키려는 듯 눈을 찡긋거렸다.
안쪽으로 몇 걸음을 더 걸어간 해인의 시선에 열린 문이 들어왔다.
그녀의 예상대로 남자가 들어간 곳은 주방이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그는 무언가를 다듬고 꺼내길 반복하고 있었다.
해인이 먼발치에서 그에게 물었다.
“아저씨, 힘드시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괜찮다는 대답이 주방에서 흘러나오자 해인이 문득 제 손에 든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갔다.
“어머, 전화가 왔네? 여보세요? 어? 홍 경사님? 잘 지내셨어요? 네, 그럼요. 여전히 바쁘시죠? 네. 아, 저요? 지금 친구랑 종로에 있는 식당에 왔어요. 참, 홍 경사님도 들어보셨죠? 낙안당이라고? 헤헷, 역시 아시는구나. 여기에서 밥 먹고 가려고요. 네, 그럼 이따가 봬요.”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통화를 마친 해인이 다시 평상으로 돌아오자 윤설이 의아한 표정으로 벗을 바라보았다.
“윤설아,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줄게. 히잇. 그나저나 여기 참 좋다. 그렇지?”
마음을 놓은 윤설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응. 여기에 오니 조선의 집이 생각나는구나.”
“헐, 설마…. 내가 또 너의 그리움을 자극한 것이니?”
“그런 건 아니란다. 그냥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그렇다는 것이야. 날 생각해 일부러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니? 아무튼 너의 마음 씀은 참으로 고마울 뿐이로구나.”
“히잇…. 칭찬받으니 기분 좋다.”
오래지 않아 평상의 낡은 밥상이 몇 가지 음식들로 채워졌다.
엄밀히 말해 한정식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가정식으로는 손색이 없어 보였다.
특히 구수한 김치찌개의 냄새는 윤설과 해인의 후각을 사로잡았고 둘은 당장에라도 숟가락을 들 기세였다.
음식들을 차려낸 남자가 겸연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안에서 먹으면 더 좋을 텐데…. 오랫동안 청소를 안 해서 지저분하기도 하고……아무튼 친구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예뻐서 차려봤소. 착한 아가씨들 같은데 많이들 들어요.”
“히잇, 감사합니다.”
“고, 고맙습니다.”
남자가 자리를 비우자 해인이 윤설을 바라보았다.
“윤설아, 비록 근사한 한정식은 아니지만 많이 먹어. 왠지 맛있을 것 같은 필이 난다. 크큭…. 이 세상에선 기사 식당이라고 하면 맛은 보장된 셈이거든.”
“고맙구나. 그, 그런데 말이다….. 기사가 무엇이니?”
“아……. 푸히힛. 우리 버스 탔을 때 앞에서 운전해주는 아저씨 있었지? 그렇게 자동차를 운전하는 분들을 기사라고 해.”
윤설이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곧 둘의 식사가 시작되었다.
김치찌개를 한 숟가락 떠 넣은 해인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와, 대박. 윤설아, 이것 좀 먹어봐.”
“이, 이건…. 딤채를 끓인 것이니?”
“응, 김치를 끓여서 찌개로도 먹는단다. 여기에선 얘랑 된장찌개가 쌍벽을 이룬다니깐. 크큭. 한국인의 힘! 아니겠어?”
벗의 너스레에 조용히 웃던 윤설이 한 숟가락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윤설의 리액션을 기대하는 해인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 꼬옥 맞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윤설은 뜨겁고 매운 것을 못 이겨 사레들리기도 했지만 어느새 깊은 맛에 빠져버린 모습이었다.
이런 저런 얘기들을 곁들여 상에 올라온 반찬들을 먹던 해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그렇게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역시 한정식을 하기엔 좀 무리가 있는 듯하다. 그치?”
친구에게 동의를 구하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작았다.
주방의 남자가 들을까 봐 염려한 행동이었다.
윤설은 젓가락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조선에서 먹던 것보다 훨씬 짜고 맵구나. 새롭고 다채롭지만…. 대부분이 강하다고 해야 할까?”
“그래?”
“응, 후손들은 이렇게 먹는 걸 좋아하는가 보구나.”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건 맞아. 좀 아쉽지. 그럼, 조선에선 어떤 맛이었니?”
해인의 물음에 윤설이 눈빛을 반짝이며 제 검지로 음식을 가리켰다.
“숙주나물은 이것보다 싱거웠단다. 하얗게 무쳤는데 주로 봄, 여름 어른들의 생신상에 내었지. 가끔씩은 점심 국수상에 나오기도 했단다. 이것은…..음…. 너비아니처럼 보이는데…. 그보단 조금 얇은 듯하구나. 너비아니는 소고기를 두툼하게 저며 구워먹는 음식이란다. 간장으로 양념하여 이것보단 훨씬 덜 달게 만들었어. 그리고….”
조선에서 먹던 것들을 떠올리며 차분히 설명을 이어가는 윤설의 얼굴이 한없이 평온했다.
해인은 친구의 말을 신기하게 듣다가 갑자기 손뼉을 쳤다.
“윤설아!”
제법 진지한 벗의 눈빛에 윤설이 멈칫했다.
“응?”
“너 말이야. 이 세상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했지?”
윤설은 스스로의 다짐을 떠올리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다만…. 솔직히 내가 뭘 어찌 할 수 있겠니? 너무 거창한 생각은 아니었는지 부끄럽구나.”
“아니야. 내가 문득 생각난 게 있거든?”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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