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26
25회
김PD는 2년 만의 컴백작으로 사극 판타지를 준비 중이었고 주인공으로 민준을 영입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를 관리하는 소속사에선 난색을 표했다.
이미 사극으로 상승세를 타고 있는 마당에 차기작을 또 사극으로 선택하는 것은 부담감이 만만치 않았다.
회사는 신인인 그가 다양한 배역으로 매력을 어필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여겼다.
자칫 잘못하다간 이미지가 굳어질 수 있었고 차기작 선택의 폭이 줄어들 수도 있었다.
게다가 정극도 아닌 판타지의 장르는 성공 여부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퓨전이 신선한 면은 있었지만 시청자가 한정된다는 점과 이제껏 이런 장르에서 성공작이 없다는 것은 소속사의 만류에 힘을 실어주었다.
민준은 김 PD로부터 직접 연락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확답을 줄 수 없었던 이유는 소속사와 그와의 사이에서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넌 아무 걱정 말고 명천에나 신경 써. 사실 차기작으로 김PD 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들도 줄을 서고 있으니까…. 으휴, 또 전화하면 진짜 한 마디 해야겠다.”
“저기…. 형, 그러지 말고…. 대본을 한 번 받아보면 어떨까요?”
“야, 대표님 아시면 큰일 나. 어쩌려고? 뭐야…. 이거 이거….. 어쩐지 냄새가 난다. 너 혹시 옛 인연 때문에 그러는 거야? 은혜 갚는 제비 콘셉트? 야, 제발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너 이제 그런 피라미 아니라니깐? 넌 이제 배우 민준이야! 오케이?”
흥분한 얼굴로 침을 튀기는 매니저를 향해 준이 싱긋 웃었다.
“형, 배우는 좋은 작품을 만나야 하잖아요. 김 PD님, 이번에 첫 연출작이니 제법 신경 쓰셨을 테고…. 대본이 어떨지 궁금한데….. 일단은 읽어보고 판단하는 게 어떨까요?”
“준아, 너 명판관 역할 하더니 진짜 그렇게 됐냐? 아이고… 진짜 솔로몬이 울고 가겠다.”
매니저가 웃음을 터뜨리자 준이 겸연쩍은 얼굴로 따라 웃었다.
그는 거절이 쉽지 않은 신인의 입장이었지만 일적인 것을 떠나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 여겼다.
조금 인지도가 올라갔다고 해서 자신을 남달리 바라봐준 김PD를 모른 체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준은 차창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갔고 오래지 않아 고단함을 이기지 못한 그의 눈이 스르륵 감기고 말았다.
윤설은 해인이 쉬는 날마다 함께 지하철을 타고 낙안당으로 향했다.
주인장은 윤설이 매일 와서 가르쳐주길 바랐지만 해인은 그에 관해 양해를 구했다.
윤설을 혼자 둘 수 없는 이유였다.
해인은 최대한 윤설을 보호해야만 했다.
이 세상에 다시는 없을 요리 수업이 시작되었다.
선생은 스무 살의 조신한 아가씨였고 커뮤니케이션 및 보디가드 등등….. 기타 잡무는 그녀의 친구 해인이었다.
그리고 배움에 갈급하여 매 순간 진지하게 임하는 학생은 50대의 남자였다.
누가 보아도 조합이 이상했고 대체 무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인지 상상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낙안당의 나무 대문 안에선 뜨거운 열정이 샘솟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주인 남자가 열심이었다.
그는 일주일 동안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다가 두 사람이 오는 날 새벽마다 좋은 재료로 장을 봐놓고 기다렸다.
그리고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면 열심히 적고 열심히 만들었다.
이미 자존심을 접은 그는 하나라도 더 듣고 더 배우려는 의지가 대단했고 그런 모습에 윤설과 해인은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요리를 해왔던 주인장은 제법 빠르게 익혀갔고 자신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조선의 맛에 점점 반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심심한 맛이 그저 밋밋하게만 느껴졌지만 이젠 더 이상 아니었다.
음식을 만들며 직접 먹어본 그였다.
기어이 자신의 건강이 좋아진 것을 체험하게 되자 그는 성공을 강하게 확신했다.
3주 만에 그의 풀코스를 먹어본 윤설이 드디어 고개를 끄덕이며 웃자 남자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해인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정말로 고마워요.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아가씨들은 정말 하늘이 보내주신 천사들인가 봐요. 우하하하…. 앞으로 착하게 살아야겠어요.”
남자의 인사에 윤설은 말없이 웃었고 해인이 화답했다.
“하늘의 뜻인지 모르겠지만 그날 아저씨가 차려주신 밥을 먹는 순간,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히잇. 아무튼 잘되셨으면 좋겠네요. 참, 오픈은 언제 하실 거예요?”
“아이고…. 고마워요. 오픈은 내일모레쯤이 어떨까 해요. 우선 평일에 상황을 봐야 주말을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참, 그날 두 분도 꼭 와요.”
“네? 저희도요?”
해인의 물음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당연하지. 제자의 새 출발인데 스승님들이 오셔야 되는 거 아닌가? 우하하….”
“풉….. 스승과 제자라니…. 정말 재밌네요.”
남자는 즐겁게 웃다가 해인과 윤설을 보며 당부했다.
“꼭 와요. 와서 제대로 된 한정식 한 상 받아보고 힘도 좀 줘요. 스승님들께 밥값은 안 받는 거 알죠? 그날뿐만이 아니라 아무 때나 와서 밥 먹고 가요. 아, 농담 아니라니깐….”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
한결 개운한 마음으로 희망을 품은 이들에게서 흐뭇한 웃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남자는 절망 속에서 비상하길 꿈꾸었고 윤설은 후손들을 도우며 조선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해인은 제 친구를 도울 수 있어서 행복했다.
어느 한 명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에게 유익한 일인 셈이었다.
낙안당이 새롭게 문을 열게 된 주말, 윤설과 해인은 주인의 초대에 응했다.
두 사람은 마치 제 가게를 오픈하는 것처럼 설레는 발걸음이었지만 한껏 들뜬 마음만큼 손님의 숫자는 따라주지 않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조금은 실망한 이들을 향해 주인 남자가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그렇게 생각할 것 없어요. 난 우리 집 대문을 다시 연 것만도 감지덕지한 걸요… 허허…. 괜찮으니, 자, 식사들 맛있게 하고 가요.”
정성을 모른 체 할 수 없던 이들이 겸연쩍은 얼굴로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남자에겐 격려의 인사를 남겼지만 돌아가는 길은 찜찜하기만 했다.
시무룩해진 윤설이 해인을 바라보았다.
“해인아, 아무래도 내가 잘못한 것인지 모르겠구나.”
“에이, 무슨 그리 섭섭한 말을…. 아니야. 윤설아. 너도 아까 들었잖아. 아저씨가 다시 가게 문을 연 것만으로도 많이 기쁘시다고…. 얼굴도 훤해지셨던걸? 넌 최선을 다했으니 잘 한 거야. 조선의 맛을 볼 기회를 준 셈인데 못 보면 뭐 그 사람들 손해지.”
언제나처럼 해인이 너스레를 떨자 윤설이 피식 웃기 시작했다.
친구를 따라 웃던 해인이 골목을 벗어나자 갑자기 손뼉을 쳤다.
“윤설아, 우리 기분 전환도 할 겸, 좋은 곳에 갈래?”
“좋은 곳……?”
고개를 끄덕이는 해인의 눈이 반짝였다.
그것은 마치 윤설에게 딱 맞는 곳임을 확신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모든 것들이 그랬지만 지하철은 탈 때마다 조선에서 온 규수에게 참 특별하기만 했다.
우선은 땅속으로 다니는 탈 것이 신기했고 그것의 모양이 길고 길다는 것이 그랬다.
게다가 이곳에 온 후로 한꺼번에 많은 후손들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 또한 특별했다.
초반, 자신의 존재가 드러날까 봐 고개를 숙이기에 바빴던 윤설은 이제 후손들의 모습을 조심스레 바라볼 수 있었다.
지하철의 신기함에 눈을 반짝이던 규수가 해인에게 이끌린 장소에 이르러 당황하고 말았다.
윤설은 제 눈을 비비더니 현판을 읽고선 곧바로 땅에 무릎을 꿇었다.
“헐, 윤설아, 왜 그래? 어서 일어나.”
“이, 이곳은….. 임금님이 계시는…. 궁궐이잖니. 게다가 왜란 때 화염에 휩싸인 것으로 아는데…… 어, 어찌… 이곳엘……해인아, 어서 돌아가자. 이런 곳에 얼씬거렸다간 경을 칠지도 모른단다.”
“아니야, 윤설아. 괜찮아.”
여유 있게 웃는 벗의 모습에 윤설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친구를 일으킨 해인은 곧 윤설의 무릎을 털어주며 까르륵 웃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해. 그래, 이해해. 하지만 윤설아, 안심하렴. 지금 여기엔 임금님이 안 계셔.”
“서….설마…. 붕어하신 것이니?”
“붕어? 아…. 돌아가셨냐고?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세상엔 임금님 대신에 대통령이 있어. 그래서 이곳은 구경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개방되었어. 그러니까 아무나 궁궐을 구경 할 수 있다는 거지.”
윤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해인과 궁궐의 안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해인은 싱긋 웃는 낯으로 윤설의 손을 잡아 이끌었고 두 사람은 “광화문”이라 쓰인 문으로 들어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윤설이 자꾸만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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