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31
30회
집으로 돌아온 준은 씻고 나오자마자 그대로 누웠다.
허공을 향해 홀가분하게 숨을 내쉰 그가 기분 좋은 얼굴로 기지개를 쭈욱 폈다.
촬영은 이미 마쳤지만 종방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고 오늘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모든 것을 잘 마쳤다는 안도감은 이제야 그에게 진정한 쉼을 허락해주었다.
첫 주연의 드라마는 대단한 기회였고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지만 반면에 만만치 않은 무게로 그를 짓누르곤 했었다.
수십, 수백 대 일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꿰찬 자리인 만큼 준에겐 의욕이 넘쳤다.
하지만 과도한 의욕은 이상하게도 과장된 연기를 낳기 일쑤였다.
명품 연기를 겸비한 선후배들은 그런 그를 격려하듯이 탄탄히 받쳐주었고 준은 그들의 모습에 주연으로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배역의 성공이란 캐스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끝까지 제대로 해내는 것에 있었다.
이제 겨우 한 작품을 완성한 그는 마치 인생의 한 페이지를 공부한 느낌마저 들었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뿌듯하게 미소 짓던 그의 귓가로 별안간 요란한 진동음이 들려왔다.
깜짝 놀란 준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나무에 닿은 둔탁한 소리로 폰의 행방을 기억해낸 그가 서둘러 침대 옆의 서랍을 열었다.
스마트폰을 집어든 그에게 불현듯 몇 주 전의 일이 떠올랐다.
낯선 여자들에게서 문자를 받던 밤, 서랍 속에 넣어둔 이후 처음으로 꺼내보는 순간이었다.
폰의 화면엔 김 감독의 이름이 선명했다.
매니저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자 준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는 사이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한결 마음이 편할 것 같았지만 그는 애타게 준을 부르고 있었다.
‘종방연 소식까지 들으셨을 텐데…. 이렇게 피하기만 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그래, 한번쯤은 직접 말씀드려야 할지도 몰라. 아직은 소속사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는 내 입장을 감독님도 이해해주실 거야.’
결심을 굳힌 준이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하지만 첫 마디는 애타는 이로부터 먼저 흘러나왔다.
[ 민준 씨? 아이고…. 연락이 힘들군요. 허헛…. ]“김 감독님, 안녕하셨어요? 죄송합니다. 오늘 좀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 암요. 종방연 하고 돌아와서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명천’ 아주 잘 봤습니다. 그맘땐 연기의 힘을 적당히 빼는 게 어려울 법도 한데, 완전 베테랑 같았다니깐? 허헛. 이번 드라마를 보니 더욱 더 욕심이 나더군요. 우리 드라마에서도 딱인데. 민준 씨, 그동안 생각 좀 해봤어요? ]준이 침을 삼켰다.
제 입장을 듣게 될 그가 부디 오해하지 않길 바랐지만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피하기만 하는 건 더 이상 의미 없는 일이었다.
준은 최대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 감독님, 예전에 저를 발탁해주신 거…. 정말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건,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칭찬의 말이 들려오자 좋은 소식을 예감한 상대가 웃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준은 침착히 할 말을 이어갔다.
“이번 작품 대본은 정말 독특하고 참신했습니다. 첫 연출을 위해 감독님이 얼마나 공을 들이셨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어요. 은혜를 받은 입장에서 도와드리는 것이 당연한데…… 제가 여전히 부족해서 말입니다. 게다가 아직 신인이기에 스스로 결정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회사의 도움이 필요하고 함께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침울해진 음성이 곧장 대꾸했다.
[ 아이고…. 준이 씨…. 우리 사이에 너무 삭막한 거 아니에요? 아니, 앞으로 대성할 배우가 스스로 결정을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아, 물론 회사의 관리가 필요한 대세라는 건 인정합니다만, 난 준이 씨가 좋은 작품 알아보는 안목은 갖췄다고 보는데? 안 그래요? 언제까지 그 자리에 머물 수만은 없는 법. 멀리 본다면 나랑 같이 도약해봅시다. 이번에도 내가 보장할게. 준이 씨, 듣고 있어요? ]“아, 예. 저를 아껴주시는 마음, 너무나 감사하죠.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답을 드리기가 참 난감해서… 그게…….”
[ 아이 참, 같은 바닥에서 서로 돕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혹시 심이지 때문이에요? 정 마음에 걸린다면 내가 눈물을 삼키고서라도 어떻게 해볼…. ]당황한 준이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감독님. 그게 아니라…. 정말 회사랑 상의가 필요해서 그럽니다.”
[ 준이 씨, 그런 게 아니라면 야박하게 그러지 말고 서로 도우면서 삽시다. 우리 앞으로 계속 볼 사이 아닙니까? 난, 남자 주인공에 우리 준이 씨만 생각했다고…. 에휴, 지금 캐스팅 죄다 완료했고 하다못해 서예 선생에 음식 자문 선생까지 구한 마당인데…. 남주만 빠져서야 말이 됩니까? 안 그래요? 내가 요즘 밤에 통 잠을 못 잔다니까요. ]푸념 섞인 한 마디에 난감해하던 준의 눈빛이 순식간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가, 감독님…… 지금 뭐라고 하셨죠? 음식 선생님까지 구하셨다고요?”
[ 그럼요. 정말로 세팅 완료했다니깐? 이제 준이 씨만 오면 만사 오케이라고요. ]“그, 음식 선생님 말입니다. 혹시…… 그날 낙안당에서 봤던 그분입니까?”
[ 오, 그렇지. 기억하네요? 그 야구모자 쓰고 있던 아가씨 말이에요. 아휴, 생각해보니 그분도 참 준이 씨만큼 섭외하기 어려웠네. 허헛.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몰라요. 촬영도 하기 전에 캐스팅하다가 폭삭 늙겠어. ]수화기를 든 준의 손이 살며시 떨려왔다.
전화를 받기 전, 결심을 굳히려 침을 삼켰던 그가 이젠 다른 이유로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에겐 떨리는 순간이었다.
준이 다시 한 번 용기를 냈다.
“감독님, 이번에 음식을 많이 다루시던데….. 혹시…. 음식 선생님이 끝까지 같이 해주시나요? 아무래도 퀼리티를 위해서라면…..?”
[ 캬, 역시…. 준이 씨는 다르다니깐. 그렇죠. 음식이 주된 매개체가 되니까요. 음식 선생하고는 중반부까지 맡는 걸로 계약했습니다. ]준의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20부작의 중반부라면 적어도 10번 이상은 마주칠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보다 더 길다면 두말할 것도 없었지만 그쯤이라도 준에겐 대단한 선물이었다.
단 두 번의 만남…….
기막힌 공통점은 그저 멀리에서 바라만 보았다는 것뿐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제 마음과 감정을 움직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준은 드디어 제 앞에 또렷이 나타난 세 번째 사인을 붙잡기로 결심했다.
[ 으,응? 민준 씨, 그런데 그 아가씨는 왜 묻는 거죠? 혹시 아는 사이? ]찰나의 침묵 끝에 김 감독이 훅 치고 들어오자 준이 살짝 당황했다.
“아, 아닙니다. 서예 선생님에 이어 음식 선생님까지 섭외하시다니…. 감독님의 그 열정에 그만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저, 감독님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 주, 준이 씨! 정말입니까? 우하하. 정말이죠? 농담이라면 평생 미워할 겁니다. ]“그럼요. 농담 아닙니다. 감독님의 작품에 출연하겠습니다.”
“야, 민준! 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막 현관문에 들어선 윤 매니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의 분노는 음성으로도 행동으로도 충분히 드러나고 있었다.
수건을 목에 두른 채 물기가 덜 마른 머리로 생수를 마시고 있던 준이 그를 응시했다.
당황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는 표정은 윤 매니저의 태도를 예상한 듯했다.
“형, 오셨어요? 앉으세요.”
담담한 한 마디가 더욱 화를 돋운 듯 그가 소파에 앉더니 탁자에 제 스마트폰을 소리 나게 내려두었다.
“조금 전에 김 감독한테 전화 왔었어. 알아듣게 설명해봐.”
“죄송해요. 회사랑 상의해야 하는 거 잘 알고 누구보다도 형한테는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했는데? 그걸 아는 인간이 이런 짓을 해? 야, 너 진짜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이제 대세라고 안하무인인 거야? 뭐야? 예민정 작가 얘기 꺼낸 게 바로 어젯밤이다. 어떻게 사람이 하루 만에 이러냐? 너무 가볍다는 생각 안 들어?”
윤 매니저의 분노는 준의 상상을 넘어서고 있었다.
언제나 농담으로 너스레를 떨던 얼굴엔 웃음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준은 당황했지만 담담히 제 소신을 밝히기 시작했다.
“형, 그런 거 정말 아니에요. 잘 아시잖아요. 대세라고 생각해 본 적 없지만 혹시 그렇게 되더라도 형이 제 은인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에요. 물론, 대표님도 마찬가지시고요.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이번 김 감독님 드라마, 느낌이 좋아요.”
“뭐? 느낌이라고 했냐?”
“죄송해요. 이런 말조차 신인으로서 건방져 보일 수 있다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명천 때 받았던 느낌처럼 이번에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윤 매니저가 허공을 향해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금 준을 응시했다.
“하아…… 준아….. 우리 준이! 물론 연기를 하는 주체로서 너의 느낌을 묵살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말이야. 이 바닥이 그저 느낌만으로 성공하는…… 그런 쉬운 곳이 아니란다.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그건 연기 인생 20년쯤은 지난 배우들이나 겨우 입에 올릴 수 있는 말 아니냐? 넌 지금 무엇보다도 관리가 시급한 입장이라고. 이미지는 또 어쩔? 쭉쭉 승승장구하기 위해선 회사의 결정에 따라달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냐! 어휴….”
얼굴이 달아오른 윤 매니저가 탁자 위의 생수병을 집어 들더니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는 입가에 흘린 물기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얌마, 이번 일은 실수라고 치고 내 선에서 잘 마무리할 테니까 너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라. 응? 제발 부탁이다. 대출에만 신용 등급이 필요한 게 아니라고. 이 바닥에서도 신용이 금이다. 오케이?”
제 할 말을 쏟아낸 이가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곧장 김 감독에게 전화를 거 태세였다.
그가 잠금 화면을 푸는 몇 초간의 찰나, 민준이 입을 열었다.
“형! 잠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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