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34
33회
대본 리딩 첫날, 한 자리에 모인 이들로부터 설렘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이기도 했고 의욕을 다지는 마음이기도 했다.
2년 전, 탁월한 사극 한 편으로 시청률의 블랙홀로 등극했던 김 감독이었다.
그의 컴백은 시청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방송가에서도 단연 커다란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었다.
소재의 특별함을 추구하는 김 감독이 새롭게 선보이는 분야는 바로 조선의 음식이었다.
그는 궁중의 것이 식상하다고 판단했고 그동안 대중이 흔히 접하지 못한 것을 구상했었다.
불현듯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양반가를 비롯한 평범한 백성들의 음식이었다.
최근, 먹방이나 음식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들이 뜨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괜찮은 출발인 셈이었다.
가뜩이나 기대감으로 부푼 공기가 주인공의 등장에 더욱 들뜨기 시작했다.
대회의장으로 막 들어선 민준이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들을 공손히 대면했다.
대세 배우를 향한 반가움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더니 미소와 인사를 유발했다.
먼발치에 있던 김 감독이 한달음에 달려와 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오오…. 우리 주인공 준이 씨, 어서 와요. 여기서 보니까 이제야 믿겨지는군요. 허헛….”
“감독님, 안녕하셨어요?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김 감독이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누라니….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염려 붙들어 매요. 부탁은 내가 해야지.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민준 씨. 오, 윤 매니저, 어서 와요. 이렇게 또 보니까 얼마나 좋아요? 자자, 앞으로 잘 해봅시다.”
감독이 웃는 낯으로 악수를 청하자 윤 매니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응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준이 싱긋 웃더니 곧이어 동료 선후배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회의장의 자리는 빈곳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가득 찬 인원 수 만큼이나 열정도 넘쳐났다.
감독이 일어서더니 이번 드라마에 합류하게 된 이들을 일일이 소개하기 시작했다.
배우들은 물론, 주요 스태프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남자 주인공에 민준이 호명되자 그가 일어서기도 전에 함성과 박수가 요란스레 터져 나왔다.
마치 그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그를 보기 위해 합류한 듯한 분위기였다.
준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일어나 여기저기를 향해 폴더 인사를 이어갔다.
각오 한 마디를 나눈 그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박수가 끊이질 않았다.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는 쪽이었지만 준은 여전히 이런 상황이 낯설었다.
쑥스러움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자신이 부각되는 것이 어색해 재빨리 동료 배우들이나 스태프들에게 공을 돌리는 경우가 많은 그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다르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준은 동료들이 일어설 때마다 박수를 아끼지 않았고 흐뭇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하지만 호명된 사람들을 하나씩 살펴보던 그의 얼굴이 별안간 근심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분명 웃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약하게 떨린 채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앞자리는 물론, 뒷자리까지…… 참석한 이들의 소개는 끝나가고 있었다.
‘서, 설마…… 아니야. 그럴 리는 없을 거야. 그래선 안 되는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첫 리딩이 마무리되었다.
느낌이 좋았다.
이쯤 되자 이젠 모두가 첫 촬영을 고대하기에 이르고 말았다.
팀워크로 빚어지는 드라마의 특성 상, 이런 기대감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헤어지는 이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 상기된 얼굴의 준에게로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그와 악수를 청했고 눈인사라도 나누고 싶어 했다.
그런 행동은 동료로서의 격려보다도 사적인 감정이 앞선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은 그들의 마음을 충족시켜주며 늘 하던 대로 친절히 응대했다.
열린 문으로 절반 이상이 빠져나가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윤 매니저가 안으로 들어왔다.
시작 전, 출연 배우들을 직접 확인한 그는 한결 밝아진 얼굴이었다.
“준아, 뭐해? 어서 가자. 갈 길이 바빠.”
“자, 잠시만요. 감독님께 여쭤볼 게 있어서요.”
“뭐?”
윤 매니저를 세워둔 채 준이 서둘러 김 감독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준을 발견한 감독이 호탕한 웃음을 내보였다.
“아이고, 우리 준이 씨… 연기가 아주 물이 올랐던데요? 역시 전작이 사극이라 그런지 톤도 굉장히 안정적이고 말입니다. 허헛. 이거…앞으로가 무척이나 기대되는군요.”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런데….여쭤볼 게 있습니다.”
“으, 응? 뭡니까?”
“….실례하지만…. 오늘 전 스태프가 모였다고 들었는데….안 오신 분이 계신 것 같아서요….”
김 감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요? 이상하네. 누가 안 왔더라?”
대규모 인원들 속에서 빠진 이를 떠올리는 건 어려운 일일지 몰랐다.
그의 눈치를 보던 준이 용기를 냈다.
“아까 보니까….. 서예 선생님은 계시던데……. 음식 선생님께서 안 보이셔서 말입니다. 이,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드라마 상, 자문을 맡으셨다면 중요한 역할이 아니신가 싶어서 궁금했습니다.”
그제야 김 감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캬, 역시…. 준이 씨는 천상 배우라니까….그런 관찰력 좋습니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좀 전에 얘기를 한다면서 깜빡했군요. 음식 선생은 본 촬영 때만 나올 예정입니다. 사실 사정이 좀 있었죠. 이건 우리 메인인 준이 씨한테만 얘기하는 겁니다. 그분, 낯을 많이 가리는 모양이에요. 자신이 알려지는 걸 극도로 꺼린다고나 할까? 휴우… 말도 말아요. 계약 조건이 배우 못지않게 꽤나 까다로웠다니깐요. 사적인 것은 묻지 말아달라고 하더군요. 아이고, 그거 다 말하려면 하루도 모자라죠. 사실 알려진 사람 쓰면 그만인데…..이게 참 묘해요. 낙안당에서 필이 딱 왔거든? 준이 씨도 그날 봤죠? 그 세팅말입니다. 하아… 내가 안 다녀본 지방이 없고 안 만나본 선생들이 없지만… 리얼리티가 살아있다고나 할까? 아무튼 베일에 쌓인 분과 일한다는 게 찜찜한 건 사실이지만 뭐, 은둔 고수도 있을 수 있으니깐. 우허헛. 우린 또 필이 중요하잖아?”
준의 눈빛이 생기를 회복하려는 찰나, 그의 등 뒤에서 기다리다 못한 매니저가 다가왔다.
“야, 준아! 너 정말 늦는다니깐?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도 많냐?”
“다 됐어요. 이제 가요.”
민준이 감독에게 인사를 건넨 후 문을 향해 몇 걸음을 옮기자 이번엔 윤 매니저가 그에게 다가갔다.
인사를 가장한 음성은 소리가 꽤 작은 편이었다.
남들의 귀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감독님, 저희 요구, 수용해주셨더군요.”
“아휴, 당연한 소릴… 믿어주는 마음에 대한 보답이죠. 윤 매니저, 우리 앞으로 자주 볼 사이인데 잘해봅시다.”
“뭐, 저까지 신경 쓰실 필요는 없고요, 암튼 우리 준이 잘 이끌어주세요. 저희 대표님 당부 아시죠?”
“아이고, 두말 하면 잔소리입니다. 나도 준이 씨 덕 좀 보려고 하는 일인 아니유? 허헛. 염려 붙들어 매요. 콜?”
두 남자가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채운 민준은 시동을 거는 윤 매니저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도 참…. 빨리 가자고 하시더니 감독님과는 무슨 얘길 그렇게 나누신 거예요?”
“얌마, 매니저가 할 일이 뭐냐? 다 우리 배우 잘 되라고 아부 떨고 그러는 거 아니냐? 이 형이 그 양반한테 우리 준이 잘 부탁한다고 한 마디 했지.”
준의 입가로 미소가 불쑥 튀어 올랐다.
“왜? 생색내는 것 같냐?”
“아니요. 그냥…. 형이 곁에 있어서 든든하다고나 할까? 뭐, 그런 느낌이에요.”
“짜식…. 이제야 내 진가를 알아보는 거냐?”
“진작에 알아봤죠.”
“뭐?”
두 남자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량은 곧 대로에 들어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가로수들이 청량했다.
시선을 밖에 둔 준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진짜 촬영할 때 오신다면…… 곧….볼 수 있겠지?’
준은 제 가슴이 설렘으로 두근거리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마주한 것은 단 두 번……
그것도 먼발치에서가 전부였던 한 여자를 향해 이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 자체는 스스로도 신기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엔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 것이 더 많았다.
준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녀에게 왜 자꾸만 관심이 가는지 몰랐고 그녀를 보기 위해 이 드라마를 택한 것도 납득할 수 없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소풍을 기다리듯, 그저 촬영 날만을 손꼽아 기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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