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37
36회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윤설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스르륵 녹아져갔다.
더없이 밝은 빛에 둘러싸인 한 사람이 있었다.
마치 환영 같아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분명 제 시선에 담긴 건 도령의 복식을 갖춘 이였다.
상대의 의관은 너무도 낯익어 반가웠고 윤설에게 마치 조선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떨리는 마음으로 부엌을 찾았던 준이 윤설을 발견하자마자 멈칫하고 말았다.
드디어 그녀와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간절히 바랐던 소망이 이뤄졌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서게 되자 준은 너무나 떨렸다.
하지만 기회를 더 이상 놓칠 순 없었다.
준은 자신을 보고 일어선 윤설을 향해 용기를 냈다.
“저….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인사를 못 드린 것 같아서요.”
“아….안녕….하신지요?”
떨리는 음성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귀엽기도 했다.
흔치 않은 말투는 그녀의 모습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준은 처음으로 듣게 된 윤설의 음성에 가슴이 간지러울 정도의 감정을 느꼈다.
그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자 그녀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 죄송합니다. 쉬시는데 방해가 된 것 같군요. 사실은…..이런 말…. 어떻게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지난번 처음 뵌 후로 꼭 다시 뵙고 싶었습니다.”
“저, 저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혹여…. 조선에서…..?”
“네에?”
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윤설이 흠칫 놀라 제 입을 다물었다.
해인이 외에 이 세상 사람들과 말을 섞는 일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었다.
“아, 조선 음식의 대가시라고 들었는데 역시나 조선을 많이 사랑하시나 보군요? 저 역시 조선이 좋습니다. 어찌 하다 보니 연달아 사극을 두 편이나 하게 되어 익숙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이번에 함께 하게 되어 기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준이 목례하자 윤설이 엉겁결에 고개를 숙였다.
다소곳한 모습에 귀여움을 느낀 준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지금의 기분은 그야말로 하늘을 날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상한 점도 있었다.
어딜 가나 알아보는 눈들이 많아 움직이기 힘들 정도인 그에겐 윤설의 조금 심심한 듯한 반응이 신기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게 서운하거나 괘씸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고 배우로서의 편견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봐준 것이 고맙기도 했다.
사실 데뷔 이후 처음으로 느껴본 편안함이기도 했다.
준의 가슴이 감동으로 차오르는 순간, 그의 뒤쪽에서 커다란 음성이 날아들었다.
“친구야! 약 가져왔어!”
거친 숨소리를 내며 달려오던 이가 준을 발견하자마자 동그래진 눈으로 급히 멈춰 섰다.
“꺄악! 민준 씨다!”
갑작스런 비명에 윤설이 흠칫 놀랐고 그와 함께 현실로 돌아온 준이 싱긋 웃었다.
해인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우와! 반갑습니다. 준이 씨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다니… 우와….. 역시 이곳에서 일하게 된 보람이 있다니까요? 저… 죄송하지만 사인이랑 사진 좀 부탁해도 될까요?”
“그럼요.”
“꺄악. 좋아라. 아차차, 잠시만요. 제 친구 약 좀 먹이고요.”
해인이 제 손에 든 봉지에서 약을 꺼내자 준이 서둘러 반응했다.
“어? 윤설 씨, 어디 아프신가요?”
안쓰러운 반응은 이 순간 적절했지만 어쩐 일인지 두 여자가 동그래진 눈으로 동시에 그를 응시했다.
준이 겸연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가, 뭐 실수한 거라도……?”
“헐, 준이 씨 대박! 제 친구 이름을 어떻게 알았어요? 혹시 그 사이 통성명이라도 한 거예요?”
“아…. 그, 그게….. 설명하자면 좀 긴데…… 우선, 아프신 분 약 먼저 드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아, 참참…. 윤설아, 어서 먹어 봐. 속 쓰림에 이게 최고래.”
윤설이 준을 의식하더니 몇 걸음 안쪽으로 걸어갔다.
곧 약을 삼키기 위해 뒤를 돌자 기다랗게 땋은 머리가 준의 시선에 쏘옥 담겼다.
몸이 아픈 윤설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마음이 살며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랐다.
화장을 거의 하지 않은 모습도…… 길게 땋아 내린 머리도 결코 흔치 않은 비주얼이 분명했지만 준에겐 신비롭게 다가올 뿐이었다.
“윤설아, 약 먹었으니까 곧 좋아질 거야. 걱정하지 마. 자, 우리 얼른 준이 씨랑 사진 찍고 사인도 받아야지. 이런 기회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라니깐? 헤헷. 그렇죠? 민준 씨? 저, 사실은… 연예인 만난 거 처음이에요. 아우 떨려라.”
준이 싱긋 웃자 윤설이 친구의 손짓에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해인이 제 핸드폰을 꺼내더니 셀카 모드로 돌려 팔을 쭈욱 폈다.
“자아, 어서들 서세요. 이럴 땐 셀카 봉이 필요한데….내 얼굴만 달덩이같이 나오겠다. 히잉. 그래도 뭐 좋아요. 민준 씨랑 사진을 찍다니….”
세 사람이 모두 화면에 들어가기 위해선 밀착할 수밖에 없었다.
준이 해인의 너스레에 싱긋 웃더니 곧 윤설을 향해 손짓했다.
하지만 그녀는 머뭇거리기만 할 뿐,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엥? 윤설아, 얼른 붙어. 나, 팔 아파.”
“나….난…..좀…..”
“어우 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얼른 오라니까?”
벗의 권유에 윤설이 겨우 걸음을 옮겼지만 쭈뼛거리는 걸음은 그의 가까이 닿지 못한 채로 그만 셔터가 눌려졌다.
해인이 팔에 통증을 느낀 결과였다.
촬영 일주일 만에 겨우 밤샘을 면하게 되자 현장이 즐거운 함성으로 넘실거렸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와 씻고 나온 준은 제 몸이 욱신거림을 느꼈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따뜻한 차라도 마시면 한결 나을 것 같았지만 지금 그에겐 부엌으로 나갈 기운조차 없었다.
겨우 로션을 바른 그가 곧장 침대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너무나 그리웠던 포근함이었다.
남들 잘 시간에 그들처럼 두 다리를 뻗고 자는 일은 그에게 평범한 일상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일을 할 때면 사치일 뿐이었다.
‘하아…. 너무 편안하다.’
포근한 이불에 파묻혀 노곤함을 느끼던 찰나였다.
준이 문득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조금 전에 극한의 피로를 느꼈던 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두 눈은 반짝였고 입가엔 미소가 피어났다.
준은 침대 곁 선반에 놓아둔 노트북을 펼쳤다.
자판을 몇 번 두드린 그가 아까보다 한층 더 밝은 표정을 짓더니 기어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낮에 찍었던 사진이 노트북의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해인에게 부탁해 이메일로 받은 것이었다.
사진 속 인물들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왼쪽 끝에서 팔을 길게 뻗었던 해인은 얼굴이 반밖에 나오지 않았고 준은 정면을 향해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닿은 또 다른 한쪽………
준에게 차마 다가오지 못했던 윤설은 고개를 숙인 채였다.
준의 웃음이 잔잔한 미소로 변해갔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은 사진으로 조차도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비스듬히 땅을 바라보고 있는 아가씨는 왠지 애처롭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했다.
이제껏 만나본 사람들이 꽤 많았지만 준에게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윤설 씨….. 무엇이 그토록 부끄러웠나요? 수줍었던 건가요? 당신은 정말 특별한 사람이군요. 모습에서 그대로 느껴집니다. 자꾸만 윤설 씨에게 끌리는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일까요? 저야 말로 수줍고 부끄럽군요. 이런 감정은 처음이거든요. 이런 마음은………’
-드르르륵-
진동이 울리자마자 심이지가 서둘러 스마트폰을 들었다.
터치를 하는 얼굴이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 유나는 요즘 바쁜가보더라?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으니까 안심해. 그나저나 네 애인 인기 폭발이던데? ㅋㅋ 여자 스태프들이 침 흘리고 난리도 아니더라. 하긴 나도 촬영할 때마다 훈훈함에 반하곤 한다니까? ㅋㅋ 미안. 농담인 거 알지? 틈 날 때마다 사인에 사진에 아주 바쁘셔. 팬 서비스 짱인 건 인정. 뭐, 초반이니까 그렇겠지. 아무 일 없으니까 염려 마. 오늘 보고는 이걸로 끝. 우리 태주 씨는? 얼른 얘기해줘. ]한숨을 내쉬던 그녀가 곧바로 답 문자를 써서 보낸 후,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지는 잠시 멍한 얼굴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두 주먹을 꼬옥 쥐었다.
‘김 감독…. 날 캐스팅한다고 꼬일 땐 언제고 얼토당토 않는 핑계로 밀어내? 내가 얼마나 바랐던 일인데…… 간신히 붙잡은 기회를 잃은 건 모두 당신 때문이야!’
부르르 떨던 여자가 책상 위에 밀쳐놓았던 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몇 번의 클릭으로 누군가를 찾아내자 성났던 얼굴이 사르르 녹아지기 시작했다.
갤러리에 따로 파일을 만들어 저장해 둔 건 바로 민준의 사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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