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38
37회
“캬, 오늘 날씨 죽인다. 그치? 야외 촬영 올킬이겠어?”
촬영장 근처 사거리에서 윤 매니저의 감탄이 쏟아졌다.
준이 그의 말을 따라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정말 그러네요? 오늘 장면, 감독님이 신경 많이 쓰셨는데…. 좋은 그림 나올 것 같아요.”
“그러게 말이다. 그 양반, 나이가 있어서 감이 떨어질까 했는데 의외로 느낌이 신선하더라? 하긴…. 그래야 이 바닥에서 계속 살아남겠지. 안 그래? 훗….”
신호가 바뀌자 정차했던 승용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머뭇거리던 준이 윤 매니저를 응시했다.
“저…. 형, 오늘 우리가 후식으로 커피 좀 돌리면 어떨까요?”
“응? 웬 커피?”
“아, 그냥…… 다들 지쳐있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파이팅 하자는 의미에서….”
윤 매니저가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주연이라고 인심 쓰는 거야? 너, 은근 인지도 관리 잘 한다?”
“아, 그런 뜻이 아니고….”
“알아. 알아. 농담이다. 짜식, 암튼 농담도 못 한다니깐? 큭…. 그래, 뭐 한턱 쏘는 거야 어렵지 않지. 어디 보자. 근처에 커피 전문점이 있으려나? 네비로 좀 찍어봐야겠구먼. 염려 마. 우리나라 커피 공화국 아니냐. 뭐 어딘가엔 있겠지. 이따 촬영할 동안 후딱 다녀올게.”
의견이 받아들여지자 준이 웃는 낯으로 기뻐했다.
“형, 고마워요.”
“얌마, 우리 배우 위해서 뭔들 못하겠냐? 네가 이 매니저님의 심정을 알아?”
“그럼요. 잘 알죠. 저기….그런데….한 가지 부탁이 더 있는데…..”
키득거리던 윤 매니저가 준을 흘겨보았다.
“아, 알겠다. 커피 종류별로 사오라는 거지? 그냥 아메리카노로 통일혀. 이럴 땐 그냥 통일하는 거여. 그 많은 인원들 입맛을 어떻게 다 맞추냐? 하여튼 넌 너무 착한 게 문제라니깐?”
준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 그게 아니라…..통일하는 건 좋은데요… 오실 때 흰 우유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잉? 흰 우유? 너 설마 밥 안 먹었냐?”
“아, 그게…..”
“짜식, 촬영 있는 날은 절대로 굶지 말라고 했잖냐. 사극 찍을 땐 몸 관리 덜해도 된다고 그렇게 말했구먼. 요즘 다이어트 하는 건 아니지?”
준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라는 강한 부정에 비로소 마음을 놓은 윤 매니저가 구시렁댔다.
“알았어. 너 다음에 또 굶으면 그땐 우유고 뭐고 없다. 콜?”
“넵.”
차창으로 시선을 돌린 준이 아무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그의 마음은 찬란한 하늘빛처럼 설렘을 가득 품고 있었다.
촬영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이토록 즐거웠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의 끝엔 곧 마주하게 될 윤설이 있었다.
야외 촬영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지만 공을 들인 탓에 전체적으로 시간이 지연되고 말았다.
완벽함을 추구하려는 김 감독의 욕심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준이 마련한 커피는 한낮이 아닌 늦은 오후에서야 스태프들의 손으로 건네지게 되었다.
뜻밖의 선물이 현장에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준은 매니저와 함께 일일이 커피를 나눠주었고 고마움의 인사를 톡톡히 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인사에 답하는 틈틈이 그의 시선은 자꾸만 부엌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든 커피들이 주인을 찾아간 찰나, 고개를 든 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부엌을 나오는 윤설과 해인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보다 빠른 그들의 퇴근을 준도 알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마음처럼 빨라지고 있었다.
“저…..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작은 거 준비해봤는데….가시는 길에 드세요.”
준이 제 손에 든 것을 내밀자 해인이 재빨리 반응했다.
“우와, 준이 씨가 커피 쏘시는 거예요? 넘넘 고맙습니다. 어? 그런데 이건 뭐예요?”
봉지 안엔 커피와 우유 그리고 빵이 들어있었다.
“아, 그건…. 어제 윤설 씨가 속이 쓰리신 것 같기에……참, 이젠 괜찮으신가요?”
윤설이 부끄러워하며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자 해인이 손사래를 쳤다.
“그럼요. 이제 다 나았는걸요? 우와…. 이렇게 세심히 배려해주시고…. 준이 씨는 얼굴도 마음도 몽땅 잘 생김, 그 자체라니까요? 히잇. 고맙습니다. 잘 마실 게요.”
해인의 너스레와 동시에 그를 향해 목례하는 윤설의 모습이 준의 시야에 담겼다.
참으로 단정한 몸짓은 마치 가냘픈 어린 새와도 같았다.
두 여자가 사라진 곳에서 준의 발길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는 현장으로 빨리 돌아가야 하는 걸 알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헤어짐의 아쉬움이 깊게 배어나와 조금은 먹먹한 순간, 준이 갑자기 싱긋 웃기 시작했다.
매니저가 사다준 우유는 물론 빵까지 넣어 보낸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윤설 씨에겐 모든 걸 주고 싶다. 이런 마음……처음이야.’
아르바이트를 나선 해인을 배웅한 후, 방으로 돌아온 윤설이 자그마한 창문으로 밖을 응시했다.
옥탑방의 유일한 창문은 작고 낡았지만 높은 곳에 위치한 탓에 시야가 트인 편이었다.
윤설은 해인 없이 홀로 집에 있을 때면 종종 커튼을 젖혀 밤하늘을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깨알 같기도 하고 보석 같기도 한 불빛들은 이제 그녀에게 어색하지 않았다.
윤설의 시선이 천천히 하늘로 옮겨갔다.
후대의 하늘에선 인공적인 빛 때문인지 별무리가 또렷하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이 곧 희끄무레한 달을 발견하자 윤설의 입가에서 미소가 피어났다.
하늘을 살피는 그녀의 마음에 조선에서의 일들이 저절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청나라의 귀한 망원경으로 숨죽여 밤하늘을 관찰했던 일들……
더없이 평온했던 나날들……
그 즈음에 이르자 언제나 그랬듯이 식솔들을 향한 그리움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어머니….. 아버지….. 너무도 보고 싶습니다.’
윤설이 나직이 한숨을 내뱉더니 탁상에 놓인 거울로 제 모습을 비추어보았다.
거울 속엔 참으로 낯선 여자가 들어있었다.
그녀에게 익숙한 것이라곤 가지런히 땋아 내린 머리 모양 하나뿐이었다.
스스로가 조선인임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고 돌아갈 날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후대인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윤설의 마음이 서글픔으로 물들고 말았다.
후대의 것들이 더 이상 낯설지도…… 어색하지도 않다는 건 그만큼 익숙해졌다는 증거였다.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중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현실에 친밀감을 느껴가는 것은 그녀에게 절망이기도 했다.
‘과연…. 돌아갈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은 그녀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윤설은 서글픔을 지우기 위해 거울을 뒤집더니 커튼으로 창을 가렸다.
그리고 벼루에 정성껏 먹을 갈아 붓을 들었다.
윤설의 오른손이 종이 위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의 제 심경을 담담히 적어 내려가더니 반드시 돌아가리란 결단으로 글을 마무리했다.
-꼬르르륵-
배꼽시계의 울림에 윤설이 흠칫 놀랐다.
살아있다는 증거는 마치 새롭게 다진 결심을 놀리는 듯했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피식 웃고 만 그녀의 시선이 부엌의 선반에서 무언가를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민준이 건네준 것들이었다.
해인은 봉지를 뜯기 어려워 할 친구를 배려해 미리 뜯어 그릇에 담아두었었다.
윤설이 자리에서 일어나 살며시 걸음을 옮겼다.
음식 앞에 선 그녀의 얼굴이 곧 부끄러움으로 일렁였다.
배가 고파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는 것…. 또한 한창 일하고 있을 친구를 버려둔 채 혼자 먹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이것은…..우…..유…. 또 이것은…… 빠…앙…..이라고 했지?”
윤설은 마치 한글을 배워가는 아이처럼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각자의 이름을 외워보았다.
우유라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은 매우 귀하여 임금님의 수랏상에만 오르는 것이라 했다.
아무리 권세가 높은 자라고 해도 임금님의 하사 없이는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기억을 끄집어낸 윤설이 제게 우유를 건네준 이를 떠올렸다.
더없이 다정한 음성이 다시금 되살아나자 윤설이 얼굴을 붉혔다.
자신을 배려해준 것은 뜻밖이라 놀랍고 고마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론 의아했다.
‘이토록 값비싼 것을 주시다니….. 그분은 혹여 왕족이신가? 아니야. 해인이가 그랬지. 이곳에선 더 이상 임금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허면, 이렇게 귀한 것을 어찌 구하셨을까…. 또한 어찌 나에게 주신 걸까? 난…. 그분을 잘 알지 못하는데 말이다. 헌데 또 이상한 점이 있어. 그분은 어쩐지 날 잘 아는 것 같아. 내 이름을 어찌 아셨을까? 게다가 이렇게 배려해주시다니……..호….혹여 조선에서 온 분이 아닐까? 아, 아니지. 내가 자꾸 무슨 생각을…. 그럴 리는 없지 않은가……’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윤설이 다시금 허기를 느꼈다.
겸연쩍은 표정을 짓던 그녀가 두 가지를 번갈아보았다.
‘우유는 귀한 것이니 해인이에게 주기로 하고…..염치없지만….난 이것을 먹어봐야겠구나.’
벗이 먹기 좋게 잘라둔 것은 모두 네 조각이었다.
하나를 집어든 윤설이 그것을 조심스레 제 입속에 넣었다.
그와 동시에 미안함으로 일렁였던 그녀의 표정이 곧 환희의 그것으로 변하고 말았다.
두 눈은 동그래졌고 입가는 미소를 품기 시작했다.
윤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 손에 든 것을 응시하더니 이내 또 한입을 베어 물었다.
‘이런 맛은 처음이로구나. 달콤하고 부드러워….. 사르르 녹는 건 마치 눈과도 같다. 천상의 맛이 이러할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후대에 점점 익숙해지는 자신이 두려웠던 그녀였다.
하지만 난생 처음 맛보는 것은 그것을 잠시 잊을 정도로 황홀했다.
딱 하나, 그저 맛만 보려던 손길이 어느새 또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사르르 녹는 맛은 여전했다.
천천히 맛을 음미하던 윤설이 곧 정신을 차리더니 스스로를 나무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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