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39
38회
새로운 날의 태양이 떠올라 현장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 아래에서 촬영을 이어가던 이들이 언제나처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특별히 분량이 많은 하루이기에 농담을 나눌 여유조차 숨어버리고 말았다.
감독의 큐 사인에 민준이 상대 배역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복식을 갖춘 모습으로 대사를 하는 그는 완전히 조선의 시대를 사는 사람이었다.
말투와 행동 그리고 눈빛에 까지도 어색함이 없었다.
전작이 사극이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되는 셈이었다.
이 정도라면 이미지가 고착될 것을 염려할 만도 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더할 나위 없는 것이기도 했다.
“컷! 다시 갑시다!”
촬영 초반부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NG가 심심치 않게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주로 사극의 익숙지 않은 용어들이 걸림이 되고 있었다.
주연급의 경우엔 엄청난 대사 량이 결코 쉽지 않았고 신인 급은 대사 처리나 몸의 움직임에서 미숙함이 도드라졌다.
하지만 이러한 분주함 속에서도 완벽함을 유지하는 분야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분장과 음식의 세팅이었다.
분장 팀은 NG 소리가 터질 때마다 재빨리 움직여 배우들의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놓았고 음식 팀은 정갈하게 차려진 상을 부지런히 내왔다.
NG로 인해 미안함을 느낀 준이 대본을 손에 든 채 대사를 외우고 또 외웠다.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자부했지만 긴장감을 느끼는 순간엔 갑자기 머리가 하얘지곤 했다.
겨우 장면을 마무리한 그의 앞으로 이번엔 잘 차려진 상 하나가 들어왔다.
다음 신을 위한 것이었다.
대본을 보고 있던 준의 시선이 저절로 새로 들여진 것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입가로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정갈한 상차림은 마치 단정한 윤설을 마주한 것만 같았다.
또한 소박한 음식들은 수수한 그녀의 얼굴인 것만 같았다.
비록 정면을 제대로 본 적은 없었지만 준은 상상할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감정이 가슴에 차오르더니 마침내 그를 벅차게 만들고 말았다.
미소 짓던 준이 마음을 다잡았다.
정성스런 상차림에 화답하리란 다짐 때문이었다.
숨차게 달려온 촬영의 한 가운데에서 잠시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몸을 일으킨 준은 수고한 스태프들에게 인사한 후 대기실로 이동했다.
“힘들었지? 애썼다.”
윤 매니저가 어깨를 토닥이자 준이 싱긋 웃었다.
그는 대본을 매니저에게 맡기더니 걸어가면서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반나절 동안 움직임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촬영이 이어지다보니 온몸이 뻐근했다.
평소 운동으로 체력을 관리해온 그였지만 요즘처럼 빠듯한 촬영 일정은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만들었다.
그저 틈틈이 움직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의 팔 동작에 도포자락이 휘날렸다.
“푸하하, 운동하는 도령 탄생이냐? 이런 걸로 퓨전 드라마 찍으면 재밌겠는데? 책만 읽을 것 같이 예리 예리한 도련님이 알고 보니 막 몸짱이야. 푸하하…. 웃긴다. 그치?”
웃음을 터뜨린 준이 더 이상 스트레칭을 이어가지 못했다.
“형 덕분에 오늘 처음으로 웃어보네요.”
“올…… 내가 오늘도 한 건 한 거냐? 나중에 밥 사라.”
“네”
웃는 낯으로 걸음을 옮기던 준이 부엌 앞에서 멈춰 섰다.
열린 문으로 낯익은 이를 발견하자 곧 그가 미소 짓기 시작했다.
윤설이었다.
그녀는 무언가에 몰두하더니 곧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곁에서 함께 일하던 친구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옅은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와 준의 귓가를 맴돌았다.
‘윤설 씨, 웃는 모습이 참으로 예쁘시군요.’
윤설의 미소가 준에게 처음으로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설렘으로 두근거리는 그를 향해 윤 매니저가 불쑥 물었다.
“뭐야? 뭘 그렇게 실실 쪼개냐? 거기 누가 있냐?”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형, 배고프지 않으세요?”
“왜? 배고파?”
준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대단한 상차림을 봐서 그런지…….”
“짜식, 내가 누구냐? 천하의 윤 실장이 다 준비했지. 컴온.”
윤 매니저가 앞서 걷자 준이 아쉬운 눈길로 다시 윤설을 보더니 그를 뒤따랐다.
오래지 않아 촬영이 다시 재개되었지만 식사시간조차 쪼개야 할 만큼 빡빡하게 돌아갔다.
김 감독은 밤샘을 없애는 대신 늦게 끝날 것을 예고했고 모두가 별말 없이 따랐다.
너나할 것 없이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사실 그의 약속은 꽤나 달콤한 것이었다.
감독의 지시가 음식 팀에도 전달되었다.
오늘의 남은 신은 매우 중요해 윤설이 늦게까지 남아야 한다고 했다.
이미 밤샘 작업에 익숙해 있던 이들에겐 더없이 기쁜 소식이었지만 단 한 사람, 해인만은 안절부절못했다.
“하아….어쩌면 좋지?”
영문을 알 리 없는 윤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인아….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니?”
“히잉…. 이따가 알바를 가야 하는데…. 갑자기 변동사항이 생기면….빠질 수도 없고 정말 난감하거든.”
“아….. 그렇구나.”
윤설이 잔뜩 미안한 얼굴이었다.
제 벗이 얼마나 성실히 일하는지를 곁에서 지켜본 유일한 사람으로서 지금 느낄 당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한 마음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미안함이었다.
따지고 보면 윤설은 객의 입장이었다.
현세로 온 것은 제 뜻이 아니어서 당황스러움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지만 해인은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며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멀쩡한 삶이 뜻밖의 손님 하나로 흐트러지더니 기어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도 바로 그녀 때문이었다.
윤설은 발을 동동거리는 해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해인아…. 네게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로구나. 이곳의 일은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이니 넌 네 일을 보렴. 일을 마친 후에 내가 스스로 가보도록 할 것이야.”
“뭐라고? 어우 야, 말도 안 돼. 너도 아까 얘기 들었잖아. 촬영 다 마치면 새벽 2~3시는 된다는데 그땐 차도 끊긴단 말이야. 어떻게 오려고? 어휴, 말도 안 된다.”
해인은 동그래진 눈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정말 피치 못한 일이 생길 경우, 다른 시간대에 일하는 알바와 바꿀 수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몇 주는 앞두고 미리 양해를 구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성실 하나는 끝내주는 해인으로선 단 한 번도 안 써본 방법이긴 했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윤설을 위해 기꺼이 사용할 수 있었다.
‘휴우…..어쩌지? 사장님께 전화를 드려볼까?’
해인은 주인 여자를 떠올리더니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설을 따라다니기 위해 시간대를 옮기는 과정에서 겨우 사정사정한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좀처럼 변동이 없던 해인이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야간으로 옮겨달라고 하자 여자는 싫은 내색을 했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빈 시간을 채울 만한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는 게 주인 여자의 오랜 고민이었다.
요즘 이상해졌다는 말까지 들은 마당에 또다시 염치없는 부탁을 하긴 싫었다.
“해인아, 걱정을 끼쳐 정말 미안하구나. 난…. 네게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이 부끄럽고 네게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하니? 아니야. 분명히 방법이 있을 거야.”
간신히 웃는 낯으로 윤설을 안심시키던 해인이 저 멀리에서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쾌재를 부르기 시작했다.
“윤설아, 드디어 방법이 생각났어. 헐, 대박!”
동료 배우들과 둘러 앉아 저녁을 먹는 준의 얼굴이 즐거웠다.
누군가의 농담은 꽤나 재밌어 함께 한 이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리기에 바빴다.
빡빡하게 돌아가는 환경에서 이런 재미는 잠시나마 피로를 잊게 만들어주었다.
웃는 낯으로 젓가락을 들려던 준이 누군가를 발견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해인이었다.
그녀는 마치 할 말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두 손을 꼬옥 모은 채 제법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어? 해인 씨?’
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이를 찾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가 온 것을 알아채지 못했고 준의 시선이 제자리로 되돌아가자 해인이 그를 콕 집어 손짓했다.
“저,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어? 준이 씨, 지금이 하이라이트인데? 어딜 가요?”
“물 좀 가져올까 해서요. 금방 돌아올 테니 얘기들 나누고 계세요.”
준이 겸연쩍은 얼굴로 일어서더니 곧 걸음을 옮겼다.
그가 빠져나온 무리에선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해인을 향해 걷던 그의 앞으로 때마침 윤 매니저가 헐레벌떡 다가왔다.
양손엔 꽤 무거운 비닐을 든 채였다.
“마중 나왔냐? 짜식. 이것 좀 들어봐. 휴우, 무겁네.”
“형, 죄송해요. 저 잠깐 다녀올게요.”
“뭐? 어딜?”
“잠깐이면 돼요. 금방 올게요.”
준이 급히 어딘가로 사라지자 윤 매니저가 당황스런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인 씨, 무슨 일이세요?”
부엌에서 멀지 않은 곳,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작은 공간이 있었다.
준의 물음에 해인이 주변을 살피더니 곧 그를 응시했다.
“저, 준이 씨…. 정말 죄송한데요….. 휴우….이런 부탁, 정말 염치없는 거, 잘 아는데요….”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미안해하세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아, 그게…. 사실 대단한 배우께 이런 부탁을 드린다는 게 정말 말도 안 되죠. 맞아요. 저, 그런 정도는 아는 개념 있는 사람이라니깐요?”
거듭된 말에 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잘 알고 있습니다. 해인 씨랑 윤설 씨는 제가 본 그 또래들과는 다르시다고 느꼈거든요. 그러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혹시 제가 도울 일이라고 있습니까?”
“어멋, 어떻게 아셨어요?”
“네에? 정말입니까?”
도움이 된다면 좋은 일이었지만 준은 뜻밖의 대꾸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저기…. 감독님께서 오늘 늦게까지 촬영한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사실은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하고 있거든요. 시간 여유가 있다면 대신할 사람을 구할 수 있는데 오늘처럼 갑자기 이러시면 정말 곤란하답니당. 히잉.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일하러 가면 우리 윤설이가 혼자 집에 올 수 없거든요. 아시다시피, 저희가 대중교통을 애정 하는지라…. 그러니까 차도 끊기고 요즘 세상이 험해서 여자 혼자 야심한 시간에 귀가하는 건 정말 위험하잖아요.”
미소 띤 얼굴로 해인의 말을 경청하던 준이 흠칫 놀라고 말았다.
잔잔한 미소는 어느덧 커다란 미소로 바뀌어갔고 두 눈은 생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아,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 해인 씨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먼저 가셔야 하고 남게 될 윤설 씨를 걱정하시는 거군요? 촬영 후엔 시간이 많이 늦을 테니까요. 그럼, 제가 차로 모셔다드리면 되겠습니까?”
“빙고! 우와….. 준이 씨, 정말 똑똑하시다. 앗, 죄송요. 히잇. 똑 부러지게 정리를 해주셔서요. 앗, 이런 부탁 정말 미안해요. 사실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걱정했거든요. 준이 씨라면 대세 배우시니까 정말 마음이 놓일 것 같아요.”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정말 기쁜데요? 염려 마시고 일하세요. 안전하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해인은 세상 고민 다 해결한 듯, 속 시원한 얼굴로 몇 번이나 고마움을 표했고 준은 웃는 얼굴로 그녀를 보냈다.
식사 자리로 되돌아오는 그의 가슴이 설렘으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기회였다.
윤설을 향해선 언제나 궁금한 것이 많았고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마음이 갔었다.
뭘 어떻게 한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녀를 돕는다는 게 행복할 뿐이었고 잠시나마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게 설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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