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45
44회
-드르르륵, 드르르륵-
심이지가 진동으로 울리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상대의 이름을 확인한 그녀의 손가락이 곧 화면을 터치했다.
최영은, 은밀한 문자를 주고받는 친구였다.
[ 어디야? 촬영 중? ]수화기 너머로 여자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기 중이야. 오늘도 밤샘할 듯.”
[ 그래? 우린 퇴근 중인데…. ]“자랑하려고 전화한 거야?”
이지의 한 마디에 수화기 너머로 가벼운 웃음소리가 흩날렸다.
[ 오늘 좀 웃긴 일이 있어서 공유 좀 하려고 전화했지. ]“웃긴 일?”
준의 소식을 예감한 이지가 귀를 쫑긋 세웠다.
서로 바빠 문자로 겨우 소식을 전하는 마당에 전화까지 했다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지는 준의 이야기라면 무엇이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우리 현장에 음식 자문 선생이 하나 있거든? 얼굴도 잘 안 보여줘서 난 또 굉장히 나이 많은 할머니인가 했지. 글쎄, 낮에 촬영하는데 그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사람이 앵글 속으로 불쑥 들어온 거 있지? 푸하하… 다시 생각해도 너무 웃겨. ]싱거운 얘기에 이지가 피식 웃고 말았다.
[ 그런데 말이야, 그 여자 생각보다 젊더라. 아니, 완전 어려보이던데? 웃기지 않아? 조선시대의 음식 자문이 그렇게 어리다니? ]“뭐, 전공을 그쪽으로 했겠지.”
이지는 별로 의미 없는 이야기에 무심히 반응했다.
사실 준의 얘기가 아니라면 빨리 끊고 싶기도 했다.
[ 흐음, 글쎄. 아무튼 비주얼도 좀 독특해. 요즘 길게 땋은 댕기머리 봤어? 훗…. 젊긴 한데 패션센스는 영 꽝인 것 같고…. ]더 이상 들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 이지가 서둘러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 준이 씨 소식은?”
[ 칫, 급하긴…. 친구 사이에 꼭 용건만 말해야 하니? 넌 너무 냉정해. ]“미안. 스탠바이 중이라 언제 끊게 될지 몰라서……”
[ 알았어. 내가 뭐 그 상황 모르니? 준이 오빠, 촬영 잘 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 종종 팬클럽에서 응원차 오긴 하지만 지난번처럼 요란스런 움직임은 없어. 하긴, 유나만 안 오면 안심해도 되는 거 아냐? 이제 내 남자 얘기도 해줘. 오늘 어땠어? ]각자 좋아하는 이들이 서로의 드라마에서 엇갈려 만나게 된 건 기막힌 우연이었다.
이지는 친구인 영은이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태주를 상대역으로 만났고 영은은 준의 여동생 역으로 캐스팅된 상태였다.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서로의 짝사랑을 감시할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은 셈이었다.
두 여자는 원래 친구였지만 우정은 각자의 이상형을 만난 후, 남다른 목적으로 더욱 단단해지고 있었다.
“야, 민준, 너 요즘 좀 이상하다?”
촬영 현장으로 가는 도중 불쑥 튀어나온 물음에 준이 살며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애써 미소 띤 얼굴로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네? 제가 뭘요?”
“캬, 짜식…. 내가 다 봤는데 오리발이냐? 어제 말이야. 그 댕기머리 선생 얘기에 막 흥분하고 말이지. 너 인마, 형 치겠더라?”
“설마요. 제가 어떻게 감히 형한테 그래요? 오해세요. 어젠 죄송했습니다.”
준이 겸연쩍은 미소로 응수하자 윤 매니저가 탄식을 내뱉었다.
“캬, 너 연기 많이 늘었다? 아놔, CCTV가 있어야 했는데 말이지. 참나,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이렇게 실실 쪼개면 다냐?”
“형, 죄송해요. 참, 좋아하시는 간식 좀 가져왔는데 이따 드셔보세요.”
눈을 흘기던 윤 매니저가 갑자기 화색을 띠기 시작했다.
“어? 뭐? 설마…. 곰돌이 젤리? 커피 맛 캔디?”
“둘 다 준비했습니다.”
“오호호….. 짜식, 어물쩍 넘어가는 센스 죽여준다니까. 좋다. 곰돌이가 널 살렸도다. 다음번에 또 한 번 눈 크게 뜨면 알지?”
“그럼요. 잘 알고 있습니다.”
싹싹한 대꾸에 매니저가 웃음을 터뜨리자 준도 따라 웃었다.
오래지 않아 밴이 촬영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준이 트렁크를 열어 커다란 가방을 꺼냈다.
제법 무거워 보이는 것을 거뜬히 양손에 든 그가 미소 짓기 시작했다.
점심식사 후, 준이 준비한 간식이 스태프들에게 제공되었다.
가방에선 작은 비닐마다 사탕이며 껌 그리고 피로 회복제가 가득했고 그것을 받은 이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니, 준이 씬 대체 시간이 어디 있다고 이런 걸 다 만들었데요? 그 시간에 우린 다 뻗었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완전 감동이네요. 잘 먹을게요.”
“어머머, 준이 씨, 얼굴도 잘생겼는데 마음도 훈남이네. 센스 만점이라니까요?”
여기저기에서 인사가 들려오자 준이 쑥스러운 얼굴로 목례했다.
그는 별 것 아니라며 손사래 쳤지만 작은 이벤트라고 해도 팀에 활력을 주기 마련이었다.
부엌 쪽을 향하는 준의 마음이 설렘으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새벽까지 잠을 설치며 손수 간식을 포장한 건, 단 한 사람을 위해서였다.
준이 부엌으로 들어오자 수다를 떨던 여자들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일어섰다.
“어머나, 준이 씨, 여긴 어떻게….”
“수고들 많으시죠? 별건 아니고…. 작은 디저트를 준비했습니다. 힘내시라는 의미에서요.”
뜻밖의 선물에 여자들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주된 내용은 밖에서 듣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
쑥스러운 얼굴로 미소 짓던 준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저…. 안 받은 분이 계신 것 같은데…..”
그제야 한 여자가 입을 열었다.
“자문 선생님요? 그분은 조금 전에 친구랑 같이 바람 쐬신다고 나가셨어요.”
“아, 그러시군요. 그럼, 수고들 하세요. 음식 팀 파이팅입니다!”
부엌을 나오는 준의 뒤로 여자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의 센스와 비주얼을 칭찬하는 재잘거림이 쉴 새 없이 튀어나왔지만 준은 개의치 않았다.
급한 발걸음은 이제 남은 단 한 사람을 향할 뿐이었다.
준의 직감이 한 장소를 떠올렸고 곧 그곳에 도착한 이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어제의 그 벤치에 윤설과 해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한껏 들뜬 마음이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저…..실례합니다. 여기들 계셨군요?”
난데없는 남자의 음성에 해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 준이 씨?”
상대가 준이란 걸 인지한 윤설이 고개를 들려다가 멈칫했다.
준이 웃는 낯으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식사는 맛있게 드셨어요?”
“그럼요. 여긴 어쩐 일로….. 헐! 설마 우리 보려고 오신 거예요?”
해인의 물음에 준이 싱긋 웃었다.
“네, 디저트를 준비했는데…. 별건 아니지만 맛있게 드셔보세요.”
“디저트요? 우왕…. 저 그런 거 완전 좋아하는데…. 히잇, 잘 먹겠습니다.”
해인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가 내민 것을 받아들자 준이 겸연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해인 씨께 솔직히 말할 게 있어요.”
“네? 뭘요?”
“그날 보니까….. 윤설 씨는 이런 걸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드실 만한 것을 따로 준비했는데 이해해주실 거죠?”
“어머낫!”
해인과 윤설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지고 말았다.
준이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하자 해인이 까르륵 웃기 시작했다.
“대박! 준이 씨, 배려에 완전 감동했어요. 그렇지? 윤설아?”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던 그녀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자 준의 입 꼬리가 스르륵 올라가기 시작했다.
해인이 제 손에 있는 포장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우와, 나 이거 좋아하는데…. 지금 먹어도 돼요?”
“물론이죠.”
“헤헷, 준이 씨를 만나는 건 꿈조차 꾸지 못한 일인데 이렇게 잘 대해주시니까 정말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린다니까요? 윤설아, 너도 얼른 먹어봐.”
윤설이 미적거리자 해인이 그녀의 손에 든 봉지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어? 네가 좋아할 만한 게 많다. 이거 먹어봤지?”
준의 시선이 윤설을 떠나지 못했고 윤설은 얼떨떨한 얼굴로 해인이 가리킨 것을 응시했다.
낯익은 것은 강정이었다.
사내 앞에서 무언가를 먹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해인에 의해 윤설의 손에 금세 강정 하나가 들어왔다.
작은 과자 하나에 그녀의 머릿속으로 조선이 아련히 펼쳐졌다.
특별한 때에나 먹었던 기억은 곧 떠들썩했던 풍경을 떠올려주었다.
모든 식솔들이 모여 앉아 즐겁게 웃던 추억의 한 조각……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조차 없는 현실……
순식간에 윤설의 감정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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