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48
47회
세트장 주변으로 스태프들이 둘러서 있었다.
그들은 우선 위기 상황을 타개해줄 이를 급히 구한 것에 안도했다.
하지만 곧 그녀가 음식 자문이라는 것에 흠칫 놀랐고 색다른 광경을 보기 위해 모여든 것이었다.
급히 달려온 준의 발걸음이 무리 속으로 스르륵 파묻혔다.
호기심 어린 시선이 한 사람만을 애타게 찾던 순간……
준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발견하게 된 그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아한 한복 차림에 길게 땋은 머리……
소맷부리 아래로 수줍게 내민 하얀 손……
그 여린 손끝에 단정히 걸려있는 붓……
종이를 내려다보는 조심스런 눈빛……
준의 시선에 비친 윤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조선시대의 한 장면이었다.
더한 것도 덜한 것도 없이 완벽했다.
처음 카메라 앞에 서는 사람치고 허술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컷!”
김 감독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윤설이 소리를 듣지 못한 채 몇 자를 더 써내려갔다.
그가 몰입된 그녀의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 선생님, 정말 대단하시군요. 우하하. 아니, 촬영은 처음이시라더니…. 믿기가 힘든데요? 정말이십니까?”
윤설이 흠칫 놀라 서둘러 붓을 내려두었다.
“송구합니다. 제가 혹여 잘못한 일이라도….”
김 감독이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무슨 말씀을요. 너무 잘 하셔서드리는 말씀입니다. 초보가 NG 한 번 없다면 말 다했죠. 우하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떨군 윤설을 향해 해인이 곧장 달려왔다.
“윤설아, 너 완전! 대박 멋지다. 잘했어. 정말이야. 그리고 이 한복 자태는 또 어쩔. 역시 조선에서 온 규수라니깐. 헉.”
벗의 칭찬에 수줍게 웃던 윤설이 흠칫 놀랐다.
해인 역시 동그래진 얼굴로 제 입을 막은 상태였다.
하지만 당황스런 상황은 곧 몰려든 스태프들의 칭찬으로 급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들은 NG 없이 한 번에 가준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현장에서 지칠 대로 지친 이들에게 그만한 상은 없었다.
부끄러운 마음을 어쩌지 못해 얼굴을 붉힌 이의 앞으로 한 남자의 음성이 날아들었다.
“윤설 씨,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흔한 칭찬이 아닌 특별한 한 마디에 윤설은 물론 해인도 멈칫했다.
하지만 그 말을 내뱉은 준 역시 당황한 얼굴이었다.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은 진심이었지만 곧 어색한 상황을 무마하려는 노력이 그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왔다.
“아… 제 말은…. 한복이 참 잘 어울리신다는…. 그리고 붓글씨 쓰시는 모습도요…”
준이 말끝을 흐리자 해인이 까르륵 웃기 시작했다.
“그렇죠? 준이 씨? 우리 윤설이가 한복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니까요? 히잇…..”
“네, 정말 그렇습니다.”
두 사람의 맞장구에 윤설이 얼굴을 붉히는 사이, 윤 매니저가 불쑥 끼어들었다.
“인정!”
“어머, 매니저님도 그렇게 느끼셨군요?”
해인의 대꾸에 그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토록 싹싹한 말투는 처음이었다.
그녀와 직접 마주친 것은 단 두 번….그 외엔 현장을 오가며 본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때마다 특유의 살가움으로 먼저 다가서는 해인은 윤 매니저에게 흔치 않은 캐릭터였다.
싫은 건 아니었다.
매니저 7년 차에 접어든 그는 사회에 일찍 진출한 경우였고 별의 별 사람들을 다 만나봤었다.
처음엔 해인의 모습이 뻔한 오지랖 내지는 오버라고 생각했지만 최근엔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매일 보다시피 하는 상황에서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한다는 건 진실이라는 증거일지 몰랐다.
해인은 어느덧 윤 매니저의 관찰 대상 1호가 되어 있었다.
음식 자문에 이어 서예까지 맡게 된 이후, 윤설이 더욱 바빠지고 말았다.
부엌에서 음식을 책임지던 이가 서둘러 분장을 마치고는 카메라 앞에 앉았다.
분주한 일 없이 조용히 지냈던 조선의 규수에게 이러한 상황은 정신을 쏘옥 빼놓을 정도였다.
실제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윤설은 조금 멍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붓을 잡고 글씨를 써내려가는 순간은 좋았다.
문방사우와 함께 일상을 보냈던 이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윤설은 TV 화면에 제 얼굴이 드러나지 않을 것을 해인에게 전해들은 후로 더욱 편하게 붓을 쥐었다.
그 때문에 NG는 찾기 힘들었고 주변을 둘러선 이들은 감탄을 내뱉기 일쑤였다.
여자 주인공 역의 배우는 윤설과 똑같은 한복을 입은 채 그녀의 곁에서 손놀림과 눈빛을 열심히 관찰했다.
해인 역시 덩달아 분주해진 상태였다.
그녀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윤설을 졸졸 따라다녔고 행여 이상한 분위기라도 감지되면 즉시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했다.
물론 언제나 힘이 넘치는 건 아니었다.
촬영 현장, 더군다나 매니저 노릇은 알바 경험이 많은 해인에게도 처음이었고 당연히 고단했다.
하지만 해인은 아무나 경험할 수 없는 세상에 들어온 것 자체를 즐겁게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윤설을 보호하는 것에도 사명감을 느끼고 있는 그녀였다.
모든 것이 신기했지만 사실 이런 모든 것을 떠나 해인은 윤설에게 고마움이 컸다.
배우들을 코앞에서 마주하는 경험은 당연히 친구 덕분이었다.
게다가 통장을 개설할 수 없는 윤설은 그녀에게 급여를 위임한 상태였다.
물론 돌려줄 예정이긴 했지만 잔고가 늘어난 건 일시적이라 해도 기쁜 일이었다.
낯선 이를 진심으로 맞아준 것은 물질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풍성함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언제나 반복되는 일상에 조금은 지쳐있던 해인에게 윤설과 함께 하는 시간은 그저 신기하고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컷! 잠시만 대기하겠습니다.”
윤설이 손에 쥔 붓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촬영 초반, 감독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해 끊임없이 써내려간 것에 비하면 많은 발전이었다.
카메라 밖에서 스태프들과 숨죽여 지켜보던 해인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녀는 윤설의 곁에 앉더니 곧 친구의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윤설아, 힘들었지? 에효, 얼마나 팔이 아프겠니? 같은 동작만 벌써 몇 번째야.”
“난…. 괜찮단다.”
늘 해오던 것이라 정말 힘들지 않았지만 해인을 비롯한 대다수는 그런 말조차 예의상 발언이라 여겼다.
주물러주려는 이와 만류하려는 이가 웃는 낯으로 옥신각신하는 사이, 별안간 남자의 음성이 훌쩍 들어왔다.
“윤설 씨, 힘드셨죠? 마실 것 좀 가져왔는데……”
“어? 민준 씨다.”
해인의 반응을 배경삼아 준의 시선에 가만히 고개를 든 윤설의 얼굴이 담겼다.
언제 봐도 반갑고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준이 곧 아쉬움을 느끼고 말았다.
그녀가 곧 어떤 행동을 이어갈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매번 일부러 애를 태울 작정은 아닌 듯했지만 이미 그녀에게 관심이 많은 그로선 이런 순간이 좋으면서도 안타깝기만 했다.
예상한 일에 마음을 접으려는 찰나, 준의 두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윤설이 준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준은 혹시 몰라 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른 누군가를 향한 미소일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윤설이 바라보는 방향엔 준 밖에 없었다.
스태프들은 감독을 둘러싼 채 분주히 회의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유…윤설 씨………’
은은하고 소박한 미소가 온전히 자신을 향한 것임을 깨닫는 순간, 준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었다.
해인이 다가와 고마워하며 생수병을 가져갔지만 그는 제 손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간 것을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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