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51
50회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들 하셨어요.”
촬영을 마무리한 이지의 얼굴이 더없이 편안했다.
시청률 때문도…… 연기의 만족도 아니었다.
단지 이틀 후에 있을 개인적인 일정 때문이었다.
민준을 대면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온 그녀였다.
그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잔뜩 준비한 이지는 자신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더없이 완벽한 계획 속에서도 한 가지 근심이 가시가 되어 설렘을 찌르곤 했다.
그것은 준이 유독 잘해준다는 한 여자 때문이었다.
생각에 잠겨 주차장으로 향하던 그녀의 뒤로 태주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지야, 수고 많았어. 휴우… 오늘은 꽤 힘들었던 것 같아. 안 그래?”
“응.”
“훗, 나만 어리광부리는 건가? 모레는 뭐해? 촬영 마지막 날인데 약속 없으면 심야 영화라도 볼래?”
“그날은 안 돼.”
단호한 한 마디에 태주가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뭘 그리 정색하고 그래? 중요한 날인가보네?”
“미안. 중요한 선약이 있어서……”
“촬영 마지막 날에 중요한 선약이라…. 그날 회식 겸하는 거, 모를 리는 없을 테고…… 여주인공이 빠진다는 게….. 말이 되나?”
비스듬히 서있던 이지가 태주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두 눈에선 단호함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아니, 난 그냥…… 너랑 같이 회식에 참석하고 싶은 것뿐이야. 그리고 영화라도 한 편 볼 수 있다면 영광이겠다 싶었고……”
“그날은 스케줄 때문에 못 간다고 미리 말해뒀어. 종방연 때는 참석할 거야. 하지만 영화라니? 내가 태주 씨랑 영화 볼 이유가 있어?”
이지가 그를 쏘아보았다.
동기라서 편했고 현장에서 서로 용기를 불어넣어주며 힘이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태주의 말과 태도는 이지로선 전혀 납득하기 어려웠다.
태주가 피식 웃었다.
“뭐야? 그 웃음은?”
이지가 발끈하자 그는 웃음기를 거둔 얼굴로 그녀를 또렷이 응시했다.
“너무 무딘 거 아니야? 어떤 남자가 마음에도 없는 여자랑 영화를 보고 싶어 하겠어?”
“뭐…..?”
“오래되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급조된 것도 아니야. 나…. 네가 좋아졌어.”
자신만만했던 이지의 얼굴이 일순간 당혹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동안의 호의들을 그저 우정으로 알고 있었기에 부담은 갖지 않았었다.
하지만 사심에 근거한 언행이었다는 사실은 몹시 당황스럽고 불쾌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태주는 그녀의 친구인 영은이 짝사랑하는 대상이었다.
그에게 전혀 마음이 없을뿐더러 그럴 이유도 없었다.
“당황스럽네. 태주 씨랑 이런 얘기 하는 거, 어색해.”
“왜? 널 좋아한다는데 기쁘지 않아?”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 설마, 나에겐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거야? 내게도 역시 좋아하고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 이제 됐지?”
이지가 할 말을 마친 후,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태주의 손이 그녀의 팔을 휘감았다.
그녀를 쏘아보는 그의 눈빛엔 분노가 일렁였다.
“누구?”
이지 역시 단호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동안의 호의가 집착이었던 거야? 난, 우리 사이 아주 쿨한 우정이라고 생각했어. 이런 식은 곤란해.”
“그래, 처음은 우정이었지. 하지만 우정이 사랑으로 변해가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무슨 죄라도 된단 말이야?”
“태주 씨에겐….”
친구인 영은을 떠올리던 이지가 멈칫하고 말았다.
단번에 잘라버릴 기회였지만 비밀을 지키지 못한다면 자신의 비밀 역시 지켜지지 못할 수도 있었다.
태주가 이지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든 해야만 했다.
“당신에게 어울릴 만한 사람이 있을 거야. 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까지 꿈꾸고 있어. 그러니까 섣부른 판단은 하지 말아줘.”
“뭐….?”
“태주 씨랑은 동기로서 지내고 싶어. 미안해. 내 맘, 이해해줘.”
이지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의 팔을 붙잡고 있던 태주의 손이 스르륵 풀리고 말았다.
생기가 꺼져버린 표정으로 바닥을 응시하던 그가 제 고개를 들었다.
벌써 저만큼 가버린 이지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태주가 허공을 향해 헛웃음을 지었다.
‘훗….. 심이지….. 난….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
늦은 오후, 촬영장 안으로 들어서는 트럭이 제법 거대했다.
영문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너른 마당 한 편으로 간이 식탁과 의자가 펼쳐지더니 곧 구수한 음색 냄새가 번져갔다.
밥차의 위쪽으로 현수막이 선명했다.
의 대박을 기원하는 메시지 끝엔 영은의 절친이라고 밝힌 이지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대기실에 있던 영은이 누군가와 통화한 후,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밥차의 존재를 확인하더니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를 향해 피식 웃으며 다가갔다.
“우리 세상에 둘도 없는 절친된 거니? 제법 신경 썼다? 오…. 뭐야? 이렇게 큰 밥차로도 모자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샤방샤방? 훗, 그래. 그 맘 잘 알지. 나야 뭐 덕분에 인사 좀 듣겠고…..”
“그럼 됐어. 나야말로 네 덕 좀 보려는 거니까.”
“콜. 그럼 거래 성사?”
영은이 옅은 미소를 흩날리자 곧 조연출이 스태프들과 함께 다가왔다.
그가 이지를 향해 인사했다.
“이지 씨, 오랜만입니다. 오늘 저녁을 준비했다고 하셔서 무슨 일인가 궁금했는데 영은 씨랑 친분이 두터우셨군요?”
심이지가 수줍게 웃자 영은이 곧 그녀의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그럼요. 조연출 님. 저희 꽤 친한 사이에요. 사실 이번에 이지랑 같이 출연하는 게 소원이었는데 얼마나 서운했는지 몰라요.”
“아, 그러셨군요. 괜히 죄송스럽습니다.”
조연출이 겸연쩍은 표정을 짓자 이지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이렇게라도 현장에 올 수 있어서 아쉬움을 달래게 되었어요. 약소하지만 많이들 드시고 제 친구 영은이 잘 부탁드립니다.”
주변을 둘러싼 스태프들이 박수와 환호성으로 감사를 표했다.
사실 심이지의 등장 자체는 의아한 일이었다.
최종 캐스팅까지 갔다가 미끄러진 걸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또한 민준과의 스캔들 역시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누구 하나 속 시원히 내색하진 못했지만 뭔가 껄끄러움이 있다는 것쯤은 이 바닥에서 오래 일한 이들에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랬던 이지가 갑자기 등장한 사건이었다.
영은의 절친이란 건 그야말로 반전이었다.
얻어먹는 명분이 명확해지자 곧 굶주린 이들이 쾌재를 부르기 시작했다.
길게 줄을 늘어선 이들은 자신의 차례가 빨리 오길 기다렸고 식판을 손에 든 이들은 감탄을 내뱉었다.
“이지 씨, 잘 먹을게요.”
“나도요. 우와…제육볶음이 기가 막히네.”
여기저기에서 인사가 들려오자 이지가 미소로 화답했다.
그녀는 영은과 함께 서서 스태프들을 챙겼지만 틈틈이 누군가를 찾기에 바빴다.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바랐던 존재를 발견하고 말았다.
윤 매니저와 함께 걸어오며 밝게 웃던 민준의 표정이 스르륵 사그라졌다.
이지를 마주한 직후였다.
어색함은 사실 그만의 감정이 아니었다.
윤 매니저는 이지의 하차 비밀을 알았고 이렇게 대면하게 되어 역시 찜찜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어색해하는 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먼저 밝은 낯으로 입을 열었다.
“아이고, 심이지 양. 오랜만이군요. 덕분에 잘 먹겠습니다.”
이지가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윤 매니저님, 오랜만에 뵙네요. 많이 드시고 힘내세요.”
“넵, 고맙습니다. 허허…..준아, 어서 먹자.”
그를 뒤따르던 민준이 이지를 향해 목례했다.
“이렇게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단정한 한 마디에 이지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그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봤을 때부터 이미 두근거린 가슴이었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나날이었다.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는 현실은 암담했고 실제로 만날 수 있는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린 그녀였다.
준은 여전히 준수했고 예의바른 모습이었으며 은은히 풍겨나는 향기도 변함이 없었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이지가 목례했다.
“매일 고생이 많으시죠? 시청률이 계속 상승세라고 들었어요. 약소하지만 많이 드시고 힘내시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꿈결 같은 순간이 금세 지나가고 말았다.
제법 가까이에 서있던 준은 윤 매니저와 걸음을 옮겼고 한 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지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그를 곁눈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심정을 아는 영은이 피식 웃더니 곧 동그래진 눈으로 이지의 팔을 툭툭 쳤다.
사인에 반응한 시선이 다가오는 한 사람을 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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