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54
53회
촬영이 어느덧 후반부로 접어들었다.
시청률은 이미 1위로 순항 중이었기에 남은 촬영에 대해선 부담을 덜게 된 셈이었다.
드라마의 수장, 김 감독의 얼굴이 유난히도 밝았다.
컴백작의 성공은 그의 차기 연출작에도 청신호를 드리워주고 있었다.
그가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독려하자 현장을 지키던 이들이 또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
모두가 막판 의욕을 다지는 가운데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얼굴 하나가 있었다.
준은 후반부의 대본을 받던 날부터 마음이 편치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열심히 노력한 결실이 잘 맺어지는 중이고 배우로서 또 하나의 성공적인 필모그래피를 채우게 된 건 누구나 바라는 행복이었다.
하지만 남다른 이유로 이번 드라마를 택했던 그에겐 일적인 성공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끌리는 것은 바로 김윤설, 낯설지만 낯설지 않고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 정도로 편안한 사람, 오직 그녀 하나였다.
후반부의 대본은 그런 존재와의 이별을 암시하고 있었다.
“안녕들 하십니까?”
난데없는 남자의 인사에 짐을 들고 가던 여자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촬영장에서 부엌 쪽으로 향하는 길목, 음식 팀들이 재료들을 나르던 중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하는 여자들 틈에서 해인의 얼굴이 유난히도 밝았다.
그녀의 곁에 선 윤설은 목례로 인사했다.
윤 매니저가 살짝 놀란 얼굴로 서둘러 다가왔다.
“아이고, 이 무거운 걸 직접 나르신단 말입니까? 하아, 배달의 민족에게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리들 주세요.”
그가 팔을 걷어붙이자 여자들이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음식 팀이라고 우아하게 요리만 하는 줄 아셨나 봐요? 뭐, 도와주신다면야 사양하진 않겠지만…. 그런데 윤 매니저님께서 어쩐 일로 저희를 도우시는 거죠?”
“아이고, 한솥밥 먹는 처지에 서로 돕고 살아야죠. 그게 사람 사는 세상 아닙니까? 하하…”
특유의 넉살에 여자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의 도움으로 제법 묵직한 상자들이 금세 안으로 들여졌다.
하지만 해인과 윤설은 시키기 미안한 마음에 남은 것들을 들고 뒤따르고 있었다.
부엌에 도착한 여자들이 고마움을 표했다.
“윤 매니저님, 덕분에 수월했어요. 아이스커피라도 좀 드릴까요?”
“아하하, 도움이 되셨다니 기쁘지만 이런 이런… 우리 쭈니 돌볼 시간이 되어서 말이죠. 아쉽지만 그 커피, 저장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호호… 그렇게 하세요. 언제든지 들르시면 드릴게요.”
여자들이 한 바탕 웃음을 터뜨리더니 상자를 열었다.
재료를 다듬을 시간이었다.
윤설은 그들과 함께 익숙한 자태로 팔을 걷어 손을 씻으러 갔고 해인 또한 막 팔을 걷으려는 찰나였다.
곧 나갈 듯했던 윤 매니저가 해인의 어깨를 검지로 콕콕 눌렀다.
흠칫 놀라 뒤돌아본 그녀를 향해 그가 눈을 찡긋거렸다.
그를 따라 밖으로 나온 해인은 영문을 모른 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윤 매니저는 부엌문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 그늘 아래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가 숨을 길게 내쉬며 이마의 땀을 닦자 해인이 미안한 얼굴로 응시했다.
“매니저님, 많이 힘드셨죠? 재료들이 꽤 무겁거든요. 히잇. 오늘 도와주신 덕분에 수월했어요. 감사합니다.”
“저기….뜬금없겠지만 말이야. 내가 8살이나 많으니까 말 놔도 될까?”
느닷없는 물음에 해인이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세요.”
“고마워. 휴우…. 이렇게 힘든 일을 매일 했다니…. 가심이 아프다.”
“네에?”
해인이 웃는 얼굴로 되묻자 윤 매니저가 그녀를 응시했다.
“사실은…. 며칠 동안 고민이 많았는데 말이야….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 혹시 사귀는 사람 있어? 없으면 나랑 사귈래? 흐음…. 나이 차가 많이 나나? 나 그렇게 고리타분한 사람 아닌데…… 세대차이 나지 않게끔 잘 할게. 나, 어때?”
해인이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상상도 못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연애라는 건 능력자들이나 또는 가진 자들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던 해인이었다.
스스로를 못난이이자 루저라고 여겼던 그녀에게 20년 인생 최초로 서광이 비치는 순간이었다.
“푸하하하…..”
윤 매니저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대기실에 들어서자 민준이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분장을 마친 채 대본을 숙지하던 중이었다.
“형, 어딜 다녀오세요?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우하하, 미안하다. 이 형이 말이다, 연애 사업을 좀 시작하느라고….”
“네에? 연애…사업이요?”
“그래. 너 키우는 것도 내 인생의 보람이긴 하다만…. 인간 윤상규, 연애도 못해보고 늙어가긴 아깝잖냐. 걱정은 마라. 스케줄에 지장 없도록 할 테니깐. 야, 그랬다간 대표님께 뼈도 못 추려. 알지? 크큭….”
준은 그의 표정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함께 웃었다.
수년을 동고동락했지만 지금처럼 편안한 얼굴은 처음이었다.
윤 매니저에게 기쁜 일이라면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었지만 준은 한편으로 그가 부러웠다.
마음에 담아둔 이와 사귄다는 건 지금의 그에게 꿈만 같은 일이었다.
부러움으로 가득한 마음이 곧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그런데…. 상대가 누구에요?”
“하하… 나의 그녀 말이냐? 놀라지 마라. 흐음…. 해인 씨다.”
“네? 저, 정말요?”
무심코 던진 질문에 대답을 듣는 순간, 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잉? 뭐냐? 이 리액션은? 뭔 문제라도 있다는 거냐?”
당황한 얼굴이 곧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뜻밖이라서요.”
“그치? 하아…. 이런 게 바로 운명이라는 거다. 제대로 대화 한 번 못 해본 사이지만…. 그저 스쳐가는 것만으로도 필이 빡 오는 거 말이지. 음화홧.”
자랑삼은 한 마디가 준의 가슴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이제껏 마음속으로만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것에 관한 답인 것만 같았다.
아니, 명확한 답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의 말은 바로 준이 느끼던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었다.
윤설과 대화 한 번 제대로 못해본 사이였지만 계속해서 꽂히는 느낌과 감정은 속일 수 없는 것이었다.
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가자 윤 매니저가 대뜸 물었다.
“왜? 어디 아프냐?”
“…. 저…. 사실은… 비슷한 고민이 있어요.”
“엥? 비슷한? 설마…. 너도 좋아하는 누군가가 생긴 거냐?”
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헐! 얌마, 지금 연애할 때는 아니잖아.”
“방금 형 말 듣고 깨달았어요. 제게도 그런 느낌을 준 사람이 있거든요.”
“뭐? 야… 그건….하아…. 뭐라 할 말이 없구만. 그래, 네 인생도 한창 나이에 이렇게 촬영장에서 찌들어 갈 수만은 없지. 그래, 이해는 하는데….하루 종일 촬영장에서 있었구먼 그런 사람을 언제, 어디에서 만났다는 거냐? 야! 설마… 배우는 아니지?”
“아니에요.”
윤 매니저가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그를 응시했다.
“그럼 누군데?”
“김윤설 양이요.”
“헐!”
윤 매니저가 제법 동그래진 눈으로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는 찰나, 밖에서 조연출의 음성이 흘러들었다.
“준이 씨, 슛 대기하세요. 곧 들어갑니다.”
유난히도 길었던 하루였다.
날마다 동일하게 주어지는 시간이 더욱 길게 느껴졌던 이유는 바로 평소답지 않은 NG 횟수 탓이었다.
윤설을 생각한 준은 연기에 몰입하지 못했고 속내를 알지 못하는 김 감독은 애간장을 태웠다.
‘정말 바보 같았어.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이렇게 민폐를 끼치다니…. 휴우…..’
스스로를 향한 자책은 집에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오를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준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윤 매니저가 갑자기 눈을 번뜩였다.
그는 어딘가로 급히 사라졌지만 준은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자책을 이어갔다.
얼마쯤 지난 것일까……
밴의 문이 훌쩍 열리자 시트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준이 본능적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윤 매니저라고 여겼기에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은 흐릿했던 그의 눈빛이 누군가를 발견하자마자 급속히 생기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자자, 윤설 씨는 이쪽으로 앉으시고요…. 해인이는 앞쪽에 앉을래? 졸음운전 하지 않도록 재밌는 얘기 좀 해주라. 어때?”
준이 흠칫 놀라 일어서다가 그만 머리를 천장에 부딪치고 말았다.
쿵 소리에 모두가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 저는 괜찮습니다. 어서 타시죠.”
촬영장을 막 벗어난 밴이 큰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운전대를 잡은 윤 매니저가 상기된 음성으로 뒤쪽을 향해 외쳤다.
“준아, 오늘 시간이 늦어서 말이야. 윤설 씨랑 해인 씨랑 같이 가자고 했다. 잘했지?”
뜻밖이었다.
지난번 정색하던 것과는 사뭇 분위기여서 비로소 윤 매니저와 해인이 사귄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네, 잘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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