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61
60회
“어떻게 이런 일이…… 그때 그 분이 이지 씨였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는군요.”
두 사람이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커피를 한 모금 삼킨 이지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기회를 얻지 못했죠. 그땐 정말 신세를 많이 졌었어요. 고마웠습니다.”
“아, 아닙니다. 그때 보답은 충분히 받았으니 부담은 갖지 마시죠. 실은…. 활동하시는 모습을 보면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같은 분야에 몸담게 될 줄은…. 아, 오해는 마십시오. 저는 그저……”
준이 말끝을 흐리자 이지가 싱긋 웃었다.
“아니에요. 모두가 아는 사실을 굳이 아니라고 숨길 필요는 없죠. 네, 맞아요. 사실은…. 저 성형도 했고 다이어트로 체중 감량을 많이 했어요. 그 과정에 우연히 소속사 부장님의 눈에 띄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하지만 민준 씨 역시 배우로 데뷔하게 될 줄은….. 그런데 잘 어울리세요. 같은 분야에서 일하게 되어 기쁘기도 했고요. 이런 얘기 하고 싶었지만….마침 스캔들이 터져서 섣불리 나서지 못했었죠.”
“그러셨군요. 기막힌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요?”
기적 같은 일이라 여긴 준이 미소 짓는 찰나 이지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민준 씨….. 그 미소, 여전하시군요.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요.’
오랫동안 지켜봐온 남자……
그러나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려 애태웠던 남자가 다시 그녀의 앞에서 웃고 있었다.
이지는 소망했던 순간을 놓치기 싫었다.
더 이상은 애태우기도 싫었다.
무려 5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렸고 그에 대한 보상은 후하게 받을 만했다.
아니, 그 모든 것을 떠나서라도 민준…. 이 남자를 다시 대면하니 애간장을 녹였던 소유욕이 불일 듯 일기 시작했다.
“이런 말, 어떻게 들으실지 조심스럽지만…. 사실은…. 5년 전부터 말씀드리고 싶었던 게 있었어요.”
차를 한 모금 삼킨 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간직하셨다니…. 무슨 이야기일지 궁금하군요.”
이지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녀가 그의 반응에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대학에 합격한 후, 카페엘 찾아갔었어요. 안 보이시기에 물어보니 군대에 가셨다고 하더군요. 저….. 사실은….. 그 당시엔 준이 씨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지만…. 어느 순간 그 마음이 관심으로 자라난 것 같아요. 독하게 다이어트를 하고 성형까지 마다하지 않은 건….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였어요. 준이 씨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정도로 예쁜 여자가 되고 싶었죠.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다면…. 더욱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우린 더 이상 어리지 않으니까요. 민준 씨, 저 어때요?”
준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저 그 당시의 이야기로 잠시나마 추억을 떠올리면 충분했고 어색한 자리를 마무리한 다음 일어설 참이었다.
하지만 이지로부터 나온 이야기는 뜻밖이었고 결코 가볍지 않았다.
듣는 이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불쑥 튀어나온 반전은 금세 준을 당황 속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그를 응시하는 이지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했다.
브라운관에서 언제나 여리고 순수했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준이 마음을 추스르더니 대답을 갈망하는 이를 바라보았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저를 좋게 여겨주셔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또한 그렇게까지 노력하신 것엔 매우 놀랐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조금 혼란스러운 것도 사실이군요. 이지 씨 정도라면 저보다 훨씬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민준 씨, 그런 말을 듣자고 용기 낸 거, 아니에요. 여자가 먼저 고백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죠. 제가 당신을 지목한 건 정말로 준이 씨여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은 올 수 없어요. 5년을 노력하며 기다린 나에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준은 이지의 눈빛에서 진심을 읽었다.
그래서 멈칫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끈다면 오히려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준은 제 확실한 마음을 알려야만 했다.
“이제껏 만나온 이들과는 좋은 관계를 맺길 바랐기에 최대한 성심껏 대해왔습니다. 이지 씨와는 과거의 인연을 생각해서도 그렇고…. 같은 동료로서도 그렇고….더욱 그래야겠죠.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관계와 다른 뜻이라면 조금 아픈 말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이지 씨는 제가 도와야 할 학생일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렀어도 그 마음은 그대로입니다.”
“제가 못난이여서 아무런 감정이 없었던 거예요. 그래요. 그런 거겠죠? 그래서 당신을 위해 노력했어요. 나를 봐주세요. 이젠 준이 씨의 여자가 되고 싶어요.”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외모로 평가했다면 당신을 진심으로 도와줄 수 있었을까요? 어떤 사람이 좋다면, 그건 외모가 아닌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지 씨, 5년의 노력은 대단하고 그걸 인정하고 받아줄 사람은 반드시 있을 겁니다.”
이지의 가슴에 벼락이 내리치고 말았다.
5년, 뼈를 깎는 환골탈퇴를 애써 견뎌낼 수 있었던 건, 스스로 세운 계획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예쁜 여자를 마다할 남자는 없었다.
외모를 뜯어고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으리라 여겼었다.
더군다나 같은 배우의 입장이라면 더더욱 그와 가까워질 수 있는 환경이었다.
이쯤 되니 운명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올라 남몰래 미소 짓곤 했던 이지였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준이 씨, 정말 냉정하시군요. 오로지 당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 5년을 견뎌왔는데…… 사람의 진심을 이렇게 외면하셔도 되는 건가요? 좋아요. 기회를 주세요. 그때는 아니었더라면… 이제라도 최소한의 기회는 주셔야 하는 게 아닌가요? 저, 다시 기다릴 수 있어요. 그래요. 갑자기 이렇게 나타나 얘길 꺼냈으니 얼마나 당황하셨겠어요? 제가 차마 그 마음까진 헤아리지 못했네요. 미안해요. 이제라도….”
이지를 응시하는 준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일렁였다.
여성의 입장에서 이토록 간절한 고백은 하기 어려운 일일지 몰랐다.
상대를 향한 배려심이 몸에 밴 준에게 그쯤은 캐치가 가능했다.
물론 인간으로서의 안쓰러움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지에게 단 한 번도 사심을 품은 적이 없던 준이었다.
이런 일일수록 아닌 것에 대해선 아니라고 얘기해주는 편이 옳았다.
“이지 씨, 그런 노력과 마음을 받아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래서 저는 더더욱 이지 씨가 원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저 죄송하다는 말씀밖엔….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지가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섰다.
백을 챙기는 손길이 약간 떨렸다.
조금 전까지 대담하고 발랄했던 빛은 자취를 감춘 채 그녀는 정신이 몽롱한 사람처럼 흐린 걸음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지 씨!”
준이 뒤따라 나섰지만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모질다고 욕을 먹더라도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그의 마음에 크게 자리하고 있는 한 여자를 위해선 당연했다.
이지의 식탁에 술병이 여럿 쌓여갔다.
집에 있는 술이란 술은 몽땅 가져온 듯 종류도 가지가지였다.
그녀의 맞은편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은 매니저 장 실장이었다.
이런 자리는 좀처럼 드물었다.
하지만 민준과 단둘이 만난 것을 의심한 그에게 이지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고 매니저는 이래저래 안 마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준과 스캔들이 터졌을 때만 해도 그의 선한 이미지를 등에 업고 제 배우를 띄우는 일에만 골몰했던 그였다.
그래서 내심 기쁘기도 했다.
주변에선 일부러 터트린 게 아니냐며 은근히 질투도 했었다.
하지만 이지가 진짜로 준을 좋아했다는 사실은 참 묘했다.
제 배우가 차였다는 것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매니저의 기준에 이지 정도의 외모라면 마다하는 남자가 이상했다.
그녀를 매일 케어하는 입장에서 사적인 감정은 배제된 지 오래였지만 가끔은 이지가 여자로 보일 만큼 예뻤다.
“참, 민준이….. 완벽한 줄 알았더니….여자 보는 눈은 없네. 하긴 그래야 공평하지. 안 그래? 어? 야! 그만 좀 마셔.”
어느새 와인을 가져와 제 입에 들이키던 이지가 매니저의 만류로 병을 놓치고 말았다.
“마시고 죽을 거야. 무려 5년이야! 내가 무슨 헛짓을 한 거지? 훗….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한 남자에게 한 방에 차이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난 거냐고! 심이지, 한심하고 창피해. 이래가지고….. 무슨….배우는 얼어 죽을…..”
“그만 좀 해. 남자가 뭐 그놈 하나냐? 됐어. 됐다고 해. 그런 냉정한 놈 때문에 죽긴 왜 죽어? 그거야말로 정말 한심한 얘기지. 안 그래? 더 보란 듯이 잘 나가야지. 그래야 그 녀석이 널 다시 볼 거 아니냐? 심이지, 걱정하지 마. 너 오빠 믿지? 민준이 확 눌러버리게 만들어줄게.”
흥분을 이기지 못한 음성 사이로 곧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이지의 마스카라가 번져가기 시작했다.
“뭐, 뭐냐? 설마….우는…거냐? 야, 심이지! 너 정말…으휴…. 여자가 술 마시고 우는 거 얼마나….꼴불견인지 알아? 제발 그만 좀 해.”
“……. 오빠, 꼭 그렇게 만들어줘. 민준 씨가 날 다시 볼 수 있게….. 말이야. 더 좋은 배역이 필요해. 더 돋보일 수 있는 그런 거 말이야. 나 뭐든지 다 할 거야. 더 좋은 감독님! 더 좋은 작가의 드라마에 꼭 들어갈 거란 말이야! 준이 씨랑 동시에 캐스팅 되는 거라면 더 좋아. 뭐든지…..흐윽…… 그 사람이….내게 용서를 구하게 해줘. 나랑 사귀자고….애원하는 걸….보고….싶다고……”
이지가 식탁 위로 풀썩 쓰러졌다.
마스카라로 범벅된 두 눈에선 검정색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몽롱해지는 정신 속, 민준이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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