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71
70회
텅 빈 공간 속, 이지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일어난 일련의 일들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그녀는 커피를 삼키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대본을 향한 시선은 저절로 태주가 남긴 선물에 닿고 말았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손길이 포장을 풀었다.
“어……?”
이지로부터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상자 안에는 앙증맞은 토끼 인형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틀 전의 촬영은 신혼집 꾸미기였다.
소품들을 고르며 다정한 장면을 연출해야 했기에 숍에서 진행되었고 현장에 도착한 이지는 유독 토끼 인형을 귀엽게 여겼었다.
‘강태주에게 이런 면이…..? 휴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이지는 심란한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인형을 치우고 대본을 펼쳤다.
하지만 민준을 떠올린 그녀는 쉽게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매니저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괜찮아? 태주가 너 미열 있는 것 같다던데?”
“은밀히 알아볼 일이 있어.”
“은밀히? 무슨 일인데?”
장 실장이 잔뜩 의아한 얼굴로 묻자 이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민준 스캔들 여자, 누군지 알아봐줘.”
“뭐? 보도 자료 못 봤어? 에서 같이 일했던 스태프들과 식사자리였다고 하잖아.”
“그건 공식적인 말일 뿐이지! 내가 그것도 모르는 바보인 줄 알아? 사적인 걸 알아봐달라는 거잖아! 사람 따로 고용할까?”
장 실장이 미간을 찡그렸다.
“야! 심이지! 너 아직도 미련 못 버렸냐? 그 녀석 보란 듯이 치고 올라갈 거라며!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만해. 네 이미지 생각은 안 해?”
“그러니까 은밀하게 알아봐달라고 하는 거잖아! 나 여기서 하차해? 이렇게 찜찜한 기분으로 도저히 일 못하겠어. 집중이 안 된단 말이야. 그까짓 댕기머리가 말이 돼? 내 상대가 되냔 말이야?!”
이지로부터 격앙된 음성이 터져 나오자 장 실장이 주변을 살피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그녀에게 치명적인 단점은 바로 감정 조절이었다.
연예계 데뷔부터 지금까지…… 치열한 서바이벌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으니 예민해지는 건 당연한지도 몰랐다.
장 실장은 그런 이지를 이해했기에 달래고 어르며 고비들을 넘겨왔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조금은 심각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우선은 그녀를 진정시키고 촬영을 이어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알았어. 진정해. 알아볼게. 응?”
“약속해.”
“알았다고.”
이지는 장 실장의 눈빛을 응시하더니 안심한 듯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고개를 내민 달님 아래, 옥탑 방이 촛불로 일렁이고 있었다.
해인이 야간 알바를 나간 후, 홀로 남은 윤설은 낮에 놓았던 자수를 이어가고 있었다.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하던 이의 귓가로 곧 풍악이 들려왔다.
“어?”
곁에 둔 핸드폰 벨소리는 이제 윤설에게도 익숙한 것이 되어 있었다.
당연히 벗일 거라 여긴 그녀가 서둘러 뚜껑을 열었다.
“해인이니?”
[ 윤설 씨? 저에요. 민준입니다. ]“어…..? 미…민준…..님….”
벗과의 통화에만 익숙했던 윤설에게 불현듯 떠오른 남자의 음성은 낯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이었다.
저녁을 먹은 그날 이후, 첫 통화였다.
그동안 서로에게 연락이 쉽게 닿지 못했고 그리움과 자책 사이를 오갔던 윤설이었다.
준의 음성은 낯설지만 또한 반가운 손님 같았다.
[ 윤설 씨? 듣고 있나요? ]“아, 네. 말씀하십시오.”
준으로부터 옅은 미소가 흘러나왔다.
[ 그동안 잘 지냈어요? 연락이 늦어서 미안합니다. 우리, 첫 통화군요? 이렇게 전화하니까 좀 특별한 느낌이 드네요. ]수화기를 든 윤설이 입을 가린 채 수줍게 웃었다.
[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저는….늘 같습니다. 해인이랑 같이 밥을 해먹고…벗이 일 하러 나가면 방을 청소합니다. 그리고… 바느질을 하거나 붓글씨도 씁니다.”
[ 와…. 정말요? 대단하군요. 윤설 씬 마치 준비된 현모양처 같은데요? ]조선에서 온 윤설에게 그보다 더한 칭찬은 없었다.
그의 한 마디에 그녀가 또다시 웃기 시작했다.
준은 진심을 담아 칭찬을 보냈지만 한편으론 처음 듣게 된 윤설의 사생활이 조금은 의아하기도 했다.
사실 궁금했지만 충분히 얘기할 기회가 없던 나날이었다.
사귀게 되었지만 아직 서로에 대해 알아갈 것들이 많았다.
준은 윤설이 조선의 양반가 음식 자문과 서예까지 겸비했기에 특별한 사람일 거라 여겼지만 그녀의 일상은 정말로 그 또래와 같지 않았다.
[ 윤설 씨, 저한테 궁금한 건 없나요? ]일방적으로 묻기만 한 게 미안했던 준이 윤설에게 말했다.
“…아…그, 그것이…. 실은 저도…. 님께서 어떻게 지내셨는지….궁금했습니다.”
[ 와, 제 일상을 궁금해 하셨다니…. 기분 좋은데요? 저는 그동안 행사를 다녀왔어요. 서울에서도 있었고 지방에도 다녀왔어요. 제주도에도 갔었는데 바다가 참 아름다워서 윤설 씨에게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제….제주….”
[ 네, 제주도요. 당연히 가보셨겠죠? ]윤설이 흠칫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그곳은 유배지가 아닙니까? 멀고 험하다 들었거늘, 이곳에서는 어려움 없이 갈 수 있단 말입니까?”
[ 네에? ]수화기 너머로 어리둥절한 반응이 들려오자 윤설이 제 입을 막았다.
제가 아는 것과 현대의 지식은 다른 것들이 많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녀였다.
하지만 우연히 나온 제주도에 관한 이야기는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를 놀라게 만든 것에 사과하려던 윤설을 향해 웃음소리가 흘러들었다.
[ 맞습니다. 아마도 조선시대엔 유배지였겠죠? 하하… 역시 윤설 씬 역사에 해박하시군요.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는 기분이 듭니다. 배울 점도 많고요. ]또다시 칭찬이 흘러나오자 윤설이 배시시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 웃음은 그저 낯간지러운 칭찬 때문만이 아니었다.
준이 직접 조선시대를 거론한 것은 처음이고 자신을 이해해주는 것만 같아 기뻤기 때문이었다.
‘이분은…. 내가 조선에서 왔다는 걸 믿어주실 것만 같아……’
물론, 제 존재를 밝힐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이 세상에서 해인이 다음으로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이 있다면 그건 준일 것 같은 예감이 윤설의 마음속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 윤설 씨? 궁금한 게 있는데….대답해줄래요? ]두 손으로 공손히 수화기를 든 채 귀 기울이던 윤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을 선대해주는 이가 궁금한 것이 있다고 했다.
그녀로선 당연히 대답해줄 수 있었다.
아니, 모르는 것이라 할지라도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의 궁금증을 해결해주고자 하는 의지가 윤설에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 음…. 쑥스럽긴 한데…. 저를 보고 싶었나요? ]“예에?”
[ 하하… 역시 부끄러운 질문이었죠? 저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얼굴이 뜨겁네요. ]준이 겸연쩍은 웃음을 흘려보내는 동안, 윤설이 입을 열었다.
“…님이…. 보고…싶었습니다.”
[ 와…. 하하… 꿈은 아니겠죠? 윤설 씨? ]감동으로 반응하던 준이 제 뺨을 살며시 꼬집었다.
[ 앗, 아픈 걸 보니 정말 꿈은 아니군요. ]“아, 아프시다니…..괜찮으십니까?”
[ 네,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 차원에서 잠시…. 괜찮습니다. 하하…. 이런 느낌이군요. 윤설 씨의 그 한 마디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듭니다. 신인상을 탔을 때보다 더 좋은데요? ]윤설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신인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의 말은 좋은 것보다 더 좋다는 의미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사내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는 건 조선의 규수로서 많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
부끄럽고 수줍은 건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윤설은 자신을 아끼는 그의 마음을 진실로 대하고 싶었다.
수화기 너머로 준의 행복이 가득히 전해지자 그녀의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별 것 아닌 대꾸에 열렬히 반응하는 그가 고마웠고 누군가와 함께 마음을 나누는 일이 이토록 기쁜 것인지를 새삼 알아가는 중이었다.
[ 저 역시 윤설 씨가 너무 보고 싶습니다. 많이많이 아주 많이요. ]거듭된 반복에 윤설이 생긋 웃자 그 소리에 준이 덩달아 미소 지었다.
[ 음…못 믿으시는 것 같은데…. 보고 싶은 걸로 말하자면… 하늘만큼 땅만큼인 걸요. 눈을 감아도… 떠도… 오직 윤설 씨 생각뿐입니다. 밥을 먹을 때면 식사는 하셨을지 궁금하고…. 이동할 때면 지금쯤 뭘 하고 계실지 궁금하답니다. 좋은 곳엘 가면 꼭 함께 오고 싶고, 예쁜 걸 보면 선물하고 싶죠. ]미소를 머금은 채 상대의 말을 경청하던 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심 놀란 이유는 준의 마음이 바로 제 마음이기 때문이었다.
사내를 연모하는 감정을 처음 알게 된 윤설은 마침 그와 같은 심정을 겪는 중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준이 먼저 생각났고 해인과 밥상을 마주할 때면 그의 식사 여부가 궁금했다.
청소를 마친 후, 집안에 홀로 우두커니 있을 때면 그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를 생각하는 횟수가 잦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은 그저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새삼 부끄러움을 느끼던 터였다.
하지만 자신과 같은 걸 그 역시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여린 조선의 규수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있었다.
부끄러움을 떨쳐버린 자리로 곧 그리움이 짙게 피어났다.
보고 싶은 마음이 둘의 가슴을 울리는 찰나, 잠시 숨을 고르던 준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 윤설 씨…. 너무나 보고 싶은 마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고… 당신을 볼 수 있다면 바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예에? 그것이 무엇입니까?”
[ 실은…. 사정이 생겨서 만나는 횟수가 더욱 줄어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수화기를 사이에 두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인들의 안타까움이 번져갔다.
현실을 말해야 하는 준의 마음은 타들어갔고 윤설은 저절로 새어나오는 탄식을 숨기기 위해 제 입술을 막았다.
수화기를 든 준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는 진심으로 윤설에게 미안했다.
언제나 그립고 더욱 자주 만나 잘해주고 싶은 마음은 연인이라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제 존재로 인해 제약을 받는다면……
그것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준은 견딜 수 없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사실 그로선 매우 힘들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로 유유히 흘러갔다.
그리고 그 침묵의 끝에 윤설의 음성이 준에게로 홀연히 날아왔다.
[ 아닙니다.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님께선 언제나 제게 미안하다 하시지만….그런 행동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허니, 더는 그리 여기지 마시고 심기를 편히 하십시오. 저는 어리석어 님께서 하시는 일에 관해 잘은 모릅니다 허나, 큰일을 하시는 분인 것만은 잘 알고 있으니 그 고충을 이해합니다. 마땅히 큰 뜻을 펼치시는 것이 사내대장부의 도가 아닐는지요. ]준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자신을 위로해주는 말은 더없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쉽게 들을 수 없는 말들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애써 되묻긴 싫었다.
낯설었지만 정감어린 윤설만의 표현은 왠지 그를 격려하는 것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윤설 씨…. 정말 고맙습니다.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만날 기회를 만들어볼게요. 아, 물론 전화는 매일 할 겁니다. 윤설 씨, 우리 영상통화로…..”
[ 여…영상….통….화…요….? ]“아, 아닙니다. 상황에 관계없이 윤설 씨를 향한 제 마음은 변함없다는 걸 꼭 믿어주세요. 진심입니다.”
[ …믿습니다. 허니, 심려 놓으십시오. ]잠시 괴로움이 스쳐간 자리로 설렘 가득한 미소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비록 수화기 너머의 음성 하나에 의지한 두 사람이었지만 그 애틋함만은 여느 연인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아쉬움 속에 간신히 통화가 종료되었다.
준은 곧 스마트폰을 제 가슴에 품었고 윤설은 핸드폰의 뚜껑을 닫자마자 그것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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