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72
71회
“뭐? 다시 말해봐.”
이지의 성난 음성이 대기실 안의 공기를 휘저었다.
2시간 동안 이어진 촬영 후, 점심시간까지 쉬는 타이밍이었다.
댕기머리의 정보를 얻기 위해 며칠 동안 마음 졸이며 기다렸던 이지는 장 실장의 대답에 분노하고 말았다.
그는 억울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짜야. 아무런 정보가 없다고.”
“장난해? 지금 내가 설치는 게 장난으로 보이냐고!”
“야, 심이지! 진정해. 지금 너보다 더 당황스러운 사람이 나다. 알아? 헛, 참….”
“어느 지역, 어느 학교 출신인지 기본 정보가 하나도 없다니! 이게 말이 돼?”
이지의 닦달이 계속되자 장 실장이 책상 위에 있던 부채로 제 얼굴을 부치기 시작했다.
벌게진 얼굴은 낮술이라도 한 잔 한 사람 같았다.
“야, 나도 무슨 귀신에 홀린 것 같다니까? 이게 말이 되냐고.”
이지가 팔짱을 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장 실장이 정색할 정도라면 진짜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검색창에 누구 이름만 넣어도 기본 정보가 술술 나오는 세상이었다.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쩌지 못한 이지의 마음이 냉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뭐야? 외국 출신인가? 아니지.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이 무슨 댕기머리를 고수해? 말도 안 돼. 비주얼은 딱 시골인데….. 그럼 뭐지? 혹시….탈북자?’
속이 타들어가던 대기실의 공기가 노크소리 하나에 와르르 무너졌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어서들 나오세요.”
현장 스태프였다.
장 실장이 곧 가겠다는 대답으로 그를 보내자 이지가 미간을 찡그렸다.
“여기서 먹으라고? 싫어. 나가서 먹을 거야.”
“아까 감독님 말씀 못 들었냐? 그럴 시간 없어.”
“칫, 조금 늦는 게 대수야? 늘 그래왔는데 뭘 새삼스럽게 그래?”
가방을 챙기던 장 실장이 이지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이지야, 제발 우리 좀 시원시원하게 가자. 응? 지금 시청률 얼마나 좋은지 알아? 네가 원하는 대로 잘 되고 있는데 왜 자꾸 삐걱대냐. 좀 잘 해보자. 점심은 너 좋아하는 걸로 준비해달라고 했으니까 마음에 들 거다.”
“으휴, 답답해. 암튼 댕기머리에 관해서 최대한 있는 대로 다 긁어와. 알았지?”
“알았어. 그래, 알았다.”
현장 이곳저곳에선 이미 도시락을 받아든 스태프들이 식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낀 채 하이힐 소리를 내며 걷던 이지가 멈칫했다.
제 자리를 확인한 이후였다.
대기실로 돌이키려는 발걸음을 저 멀리서 누군가의 손짓이 붙잡았다.
이지를 기다리는 건 강태주였다.
“왜? 나랑 같이 식사하는 거 불편해서?”
겨우 자리를 잡은 그녀에게 태주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좀 그렇잖아?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모르겠어? 정말?”
이지가 태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그 리액션은 뭐지?”
“하하… 똑똑한 이지가 왜 모를까? 남녀 주인공을 배려한 거란 생각은 못 해봤어?”
“배려?”
“그래. 친밀하게 지내는 만큼 촬영 몰입도도 좋아지는 거 알잖아. 그래서 일부러 사적으로 술도 한 잔 하고 식사도 하고…….”
이지가 피식 웃었다.
“그런 게 바로 꼼수라는 거지. 난 그런 거 없어도 자신 있어. 드라마에서도 이미 겪었고…”
“오, 그래? 난 반대인데. 오히려 이번 예능이 드라마보다 더 나은 것 같다. 너랑 조금 더 알게 되어선지….그때 더 친밀했더라면….”
이지가 무심한 얼굴로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됐어. 그냥 밥이나 먹자.”
태주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젓가락을 든 그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제 입속에 넣었고 먹성 좋은 모습은 이지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태주가 겸연쩍게 웃었다.
“너무 소리 내서 먹었나? 훗. 배가 고파서 말이야.”
“누가 뭐래?”
“헐, 사람이 그렇게 먹고도 살 수 있는 건가? 다 같은 걸로 주문한 줄 알았는데?”
이번엔 이지의 도시락을 응시하던 그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여배우 도시락이란 거야.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니 염려하지 마.”
“하하…..”
태주가 호탕하게 웃자 주변에서 식사하던 스태프들이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
“볼륨 좀 낮춰주지? 다들 쳐다보는데 태주 씬, 전혀 개의치 않는가 봐?”
“흠. 그래? 그렇담 미리 쉴드를 좀 쳐볼까?”
뜻 모를 소릴 남긴 태주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응시하는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
“저희 두 사람, 촬영을 위한 사전 작업 중입니다. 다들 이해하시죠? 설마, 이런 걸로 스캔들 운운하진 않으시겠죠? 다들 아는 처지에…. 하하.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 대박 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옳소!”
스태프들로부터 인정받은 남자가 한껏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헉, 지금 뭐하는 거야?”
“왜?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럼, 우리가 진짜 사귀기라도 하는 건가?”
“태주 씨!”
그가 정색하는 이지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알았어. 농담. 자, 어서 먹자.”
선글라스 너머로 주변을 살핀 이지가 생수를 한 모금 삼키더니 그를 흘겨보았다.
“앞으로 오버하지 말아줬음 좋겠어. 그날 토끼 인형은 또 뭐야? 앞으로 그런 관심은 사양할게. 내가 말했었지?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 사람이랑 결혼할 거라고.”
“심이지!”
태주로부터 단호한 음성이 흘러나온 건 두 번째였다.
이지가 멈칫했다.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았다면 고맙다는 말이 먼저 아니야? 하긴, 그런 소릴 듣기 위한 건 아니었지만…. 그리고 내가 묻지 않은 것에 대해선 별로 듣고 싶지 않아. 이러는 거, 네가 더 오버하는 걸로 보여.”
“뭐, 뭐라고?”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이지가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제 표정을 애써 감춘 채 입을 열었다.
“선물은…… 고마웠어.”
헛헛한 웃음이 그로부터 흘러나오자 이지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만 가볼게.”
그녀가 사라진 자리, 갈증을 느낀 태주가 냉수를 단숨에 들이켰다.
생수병을 내려놓은 그는 곧 피식 웃고 말았다.
‘심이지, 모르지? 네가 이럴 때마다 널 갖고 싶은 본능이 샘솟는다는 걸……’
촬영이 재개되었다.
이번 신은 신혼집의 마당에서 함께 빨래를 하는 콘셉트였다.
현장으로 향하는 이지의 얼굴에 불평이 묻어났다.
감독과 사전 조율로 만들어낸 장면이고 이미 동의를 구한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강태주와 달콤한 장면을 연출해가는 것이 어쩐 일인지 썩 내키지만은 않았다.
이상했다.
초면이 아니기에 낯선 건 아니었다.
이미 드라마로 호흡을 맞췄던 터라 어려움은 당연히 없을 거라 여겼었다.
의 출연 이유에 관해 그의 생각을 들은 터라 안심도 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찜찜함이 이지의 마음속에 생겨나고 있었다.
푸릇한 잔디가 깔린 마당의 한 가운데……
화이트 컬러의 욕조 하나가 놓여 있었다.
‘훗, 정말 유치해. 꼭 이런 장면을 넣어야 하나? 요즘 누가 이렇게 빨래를 한다고 이 난리지?’
편치 않은 시선 속으로 다급히 움직이는 스태프들의 모습이 담겼다.
몇몇은 풍성한 비눗방울을 만들어내느라 여념이 없었고 감독은 카메라 앵글을 살피고 있었다.
동시 녹음을 위해 붐 마이크도 세팅 중이었고 조명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분주히 돌아가는 현장의 한 가운데….. 강태주가 있었다.
스태프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그는 푸른빛이 감도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훤칠한 키와 다부진 몸매……
먼발치에서 바라본 태주의 모습이 이지에게 새삼스레 각인되기 시작했다.
‘강태주가 아니라 우리 준이 씨라면….얼마나 좋았을까……?’
이지의 속내가 그럴 듯한 이유는 실제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준과 태주의 체격이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여전히 마음이 예민한 그녀로선 이런 작은 점에 의지해서 착각이라도 일으키고 싶을 정도였다.
곧 스탠바이를 알리는 외침이 현장을 갈랐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걸음을 옮기던 태주가 이지를 발견했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밝은 미소로 그녀를 반겼고 이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자, 이번 컷도 최대한 달달하게 가봅시다. 참, 욕조 안이 미끄러우니 다들 조심하시고요.”
바짓단을 걷어 올린 태주가 먼저 들어가더니 곧 들어가려는 이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키가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태주가 워낙 큰 탓에 그와의 투 샷에선 언제나 하이힐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미 드라마를 겪으며 터득한 셈이었다.
촬영할 장면이 비록 맨발로 빨래를 하는 설정이지만 좋은 샷을 위한다는 명분은 감독의 칭찬을 이끌어 냈었다.
또한 비누 거품은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풍성했다.
하지만 막상 힐을 신고 미끄러운 곳에 들어가려니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욕조 안을 살피던 이지가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발 조심해. 나 때문에 다쳤단 말 듣고 싶지 않으니까……”
이지의 경고에 태주가 피식 웃었다.
“염려하지 마. 혹시 다치더라도 영광으로 여기면 그만이니까.”
“이런 상황에 농담이 나와?”
두 사람이 욕조 안에 선 채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자, 준비됐나요? 갑시다. 하이 큐!”
감독의 사인이 허공을 가르자 카메라 앞쪽의 상황에 마법이 펼쳐졌다.
청명한 하늘과 푸르른 잔디를 배경삼아 흰색의 욕조가 강렬한 컬러의 대비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안,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표정 위로 무지개가 피어났다.
수줍어서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던 이들은 조금씩 조금씩 웃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두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들이 카메라 안으로 조용히 쌓여갔다.
신혼의 풋풋함과 달콤함이 제대로 녹아들어 흐뭇함을 유발하는 찰나였다.
“꺄악!”
이지가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하이힐이 거품에 미끄러진 탓이었다.
몇 초 후면 뒤로 넘어져 있을 상황이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있었다.
두 눈을 꼬옥 감은 그녀의 등으로 남자의 단단한 팔 근육이 느껴졌다.
“어?”
이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태주의 놀란 표정이 그녀의 시선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괜찮아?”
카메라 밖에 선 이들이 움찔거렸다.
이지의 매니저, 장 실장의 얼굴이 가장 파랬다.
감독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어쩐 일인지 상황을 관망하기만 했다.
그는 기어이 주변을 진정시키려는 듯 손짓까지 했다.
카메라는 그대로 돌아가고 있었고 촬영 중인 이상, 그의 “컷”소리가 나기 전까진 끝난 게 아니었다.
태주는 한손으론 이지의 손을 잡은 채 그녀의 등을 받친 팔을 끌어당겼다.
그의 완력에 기울어진 몸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고….고마워.”
“휴우… 완전 놀랐네. 손 안 잡고 있었음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어색한 상황이 미소로 마무리되었고 오래지 않아 드디어 반가운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컷! 오케이, 아주 좋아요. 그림 최곱니다. 이지 씨, 괜찮은 거죠?”
감독의 외침에 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식겁했던 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현장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장 실장이 한 걸음에 달려왔다.
“이지야, 괜찮아? 휴우…. 진짜 깜놀했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지가 거품이 가득한 욕조에서 나가려던 찰나였다.
“이게 뭐지? 물이 빨개졌어.”
“뭐? 야, 너 설마 발 다친 거 아냐? 어디 봐봐.”
장 실장이 그녀를 밖으로 끌어내더니 쪼그리고 앉아 발을 살피기 시작했다.
흰 거품이 묻었던 발엔 페디큐어만 선명할 뿐이었다.
“어? 아닌데?”
제 발을 내려다보던 이지가 흠칫 놀란 얼굴로 태주를 바라보았다.
“태주 씨, 설마… 발 다친 거야? 어디 봐.”
막 욕조를 나오려던 그가 피식 웃고 말았다.
“영광으로 여길게.”
“뭐?”
“놀랐을 테니 좀 쉬어둬. 다음 촬영을 위해서……”
스스로 욕조를 빠져나간 그가 맨발로 절뚝거리자 먼발치에 서있던 그의 매니저가 달려왔다.
이지의 시선이 그의 뒷모습을 따라갔지만 곧 돌이키고 말았다.
장 실장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 강태주 다쳤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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