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84
83회
“저는…… 조선시대에서 왔습니다. 저희 집을 물으셨죠? 한양의 북촌에서 태어나 줄곧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의 존함은 김, 시자 혁자 되시고 판돈령부사이십니다. 위로는 오라버니 셋을 두었고 저는 고명딸로 자라났습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날이었죠. 허나, 그러던 어느 날…… 금혼령이 내려지고 말았습니다. 예순 여섯이신 임금님이 계비를 맞이하시려는 절차였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아버지께서 퇴청을 하실 때면 인사를 드리러 가는데….. 그날은 참으로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달빛조차 너무나 흐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죠. 겨우 치맛자락을 붙잡고 안채로 건너갔는데……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부모님의 탄식을 듣고 말았습니다. 금혼령에 참여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가문에서도 조정에서도 그것을 원한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습니다. 궁궐에 들어간다는 건,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임금님께선 강직하기로 소문이 자자하셨죠.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근 저는 온 몸을 떨며 쓰러지고 말았죠. 그것이 조선에서의 마지막이었습니다. 떨리는 몸으로 눈을 뜬 곳은 바로 해인이가 일하는 가게 앞이었죠. 사람들이 저를 이상히 여기며 몰려들자 해인이가 저를 위해 나서주었답니다.
조선에서 온 저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해인은 자신의 집으로 기꺼이 저를 데려가주었고 그날부터 신세를 지게 된 것입니다. 돌아갈 궁리만을 하며 제 정체를 숨겨왔지만…… 혹여 후대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몰라서…… 해인과 머리를 맞대다가 우연한 기회에 낙안당을 돕게 되었고 결국 촬영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준의 눈썹이 꿈틀댔다.
초반, 다정한 미소로 연인을 향했던 얼굴은 이미 싸늘히 식어 있었다.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고정된 채였지만 그의 눈빛엔 의구심이 가득했다.
윤설이 그 눈빛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준이 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초반에 당신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건…. 제 처지가 님께 부담이 될 거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여린 음성이 가녀리게 떨리는 동안, 준의 얼굴은 끝내 굳어버리고 말았다.
잠시의 침묵 끝에 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윤설….씨……저와의 만남이 많이 부담스러우셨나요? 제가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라 많이 힘드셨다는 것쯤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헤어지고 싶었다면 차라리 솔직히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윤설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너무도 황당하군요.”
연인으로부터 끝내 시선을 거둔 준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의 팔을 붙잡고 있던 윤설의 손이 힘없이 내려앉았다.
님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 윤설의 손이 그를 향했지만 끝내 붙잡지는 못했다.
정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그녀의 가슴을 찢어놓고 있었다.
아픈 마음은 기어이 눈물을 쏟아냈다.
‘송구…..합니다. 허나, 제 진심만은 믿어주십시오. 님만을….은애합니다.’
고통을 느끼는 이들의 시간이 마치 박제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둘이라서 기뻤던 화사함은 빛을 잃었고 설렘의 생기 역시 사라져갔다.
소리 없이 변해가는 것들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 동안 달콤한 소리로 연인을 부르던 핸드폰의 소리 역시 기어이 멈추고 말았다.
해인은 언제부터인가 퉁퉁 부어 있는 윤설의 얼굴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먹는 것, 입는 것 그리고 자는 것에 이르기까지 생활의 모든 면에서 이전보다 더욱 신경을 써주고 있었지만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윤설은 조선에서 이곳으로 처음 왔던 날처럼 두려움에 떨곤 했고 날마다 초췌해져갔다.
벗에겐 애써 드러내지 않던 마음은 옥탑방에 홀로 남을 때마다 눈물에 잠기기 일쑤였다.
그런 친구를 바라보는 해인의 마음이 타들어갔다.
겨우 용기를 내 시작한 연애였다.
중간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윤설과 민준은 서로 신뢰를 쌓으며 예쁘게 만나는 중이었다.
해인은 준의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었다.
자신 역시 조선에서 온 친구를 믿어주기까지 놀람과 당황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휴우, 이 고비만 넘기면 괜찮을 텐데…. 준이 씨의 충격이 많이 컸던 거겠지? 그나저나 내가 윤설이에게 모든 것을 밝히라고 부추긴 셈이 되었으니 어쩌면 좋아. 나 때문에 친구가 이렇게 아파하다니….그래, 내가 책임을 지는 의미에서 아무래도 두 사람을 도와야겠어.’
윤설이 겨우 잠든 사이, 해인이 폰을 들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상규 오빠, 준이 씨는요?”
[ 아휴, 말도 마. 아주 입이 딱 붙었다. 난 그 녀석 안 웃는 거 처음 봤어. 아 놔, 살얼음판도 이런 얼음판은 없을 거다. 스케줄까지 펑크 내고 나도 정말 죽을 맛이라니까? 몸살이 나도 제 할 일은 다 했던 녀석인데 말이지. 아니, 무슨 사랑 다툼을 이렇게 살벌하게 하냐? 그날 대체 무슨 말들이 오갔던 건데? 나도 좀 알자. ]윤 매니저의 볼멘소리가 해인의 귀로 스며들었다.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해 꽤나 답답한 듯했다.
해인은 형처럼 따르는 매니저에게까지 사실을 밝히지 않은 준에게서 일말의 희망을 보았다.
그 정도로 입이 무겁다면 윤설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오빠, 자세한 건 나중에 다 말해줄게요. 그럼, 준이 씨는 집에 있는 거예요?”
[ 응, 집에만 콕 박혀서 나갈 생각도 않더라고. 녀석, 무슨 생각을 그렇게나 하는지….묻는 말에도 별 대답이 없고…. 답답해 미친다니까. 윤설 씬? 그쪽도 이 난리냐? ]“휴우…. 우리 윤설인….매일 울어서 얼굴이 퉁퉁 부어있어요. 잘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잔다니까요? 정말 안쓰러워서 못 보겠어요.”
[ 헐, 진짜? 아휴, 두 사람 때문에 우리까지 죽겠구만. 이거 무슨 방법이 없을까? 아니, 윤설 씨에게 무슨 대단한 과거라도 있었던 거야? 도저히 그런 사람 같진 않은데? ]의문을 포기하지 못하는 소리에 해인이 서둘러 나섰다.
“어우, 오빠도 참… 우리 윤설인 그런 아이가 아니라고요. 잘 아시면서…. 나중에 얘기해줄게요. 그건 그렇고… 오빠, 제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뿌루퉁해 있던 그가 화색을 띠기 시작했다.
[ 오, 우리 해인이 부탁이라면 뭐든지…. 말만 해. 우린 얘들처럼 싸우지 말자고. 에효,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기분이다. 인생 뭐있냐? 사랑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짧구먼…. ]해인이 미소 띤 얼굴로 그에게 무언가를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암막 커튼이 드리워진 거실은 낮인지 밤인지 구분이 안 되었다.
테이블 위엔 의 대본과 맥주 캔 두 개가 빈 채로 놓여있었다.
정지된 것만 같은 공간에서 홀연히 피어나는 한숨만이 누군가의 존재를 알릴뿐이었다.
소파 위에 누운 채 왼손으로 제 이마를 짚은 이는 민준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지만 잠든 상태가 아니었다.
며칠 동안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 극도로 고단한 상태였고 잠시나마 잠을 청해볼까 하던 차였다.
하지만 깊은 생각 속에 잠긴 마음은 찾아오려는 잠을 도리어 쫒아내고 있었다.
‘나란 존재가 큰 부담이 되었던 게 분명해. 그래, 그랬을 거야. 윤설 씨도 지난번 스캔들 기사에 많이 놀랐을 테지…… 평생의 인연을 만났다고 생각했고 참 행복했는데…. 이제, 그녀와 헤어져야 하는 건지… 휴우….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평범한 연인들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건, 나에게 사치인 건가? 머리가 아프다. 여자의 입장에선 충분히 부담이 되고 불만일 수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윤설 씨의 변명은 정말 이상하잖아. 왜 하필이면 그런 핑계를 대신 걸까? 이해할 수 없어. 조선시대라니…. 하아….’
윤설의 성격 상, 싫은 내색을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준에게 그녀의 고백은 정말 생뚱맞은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상식을 뛰어넘는 생각들은 상상력이 뛰어난 작가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차라리 그럴 듯한 거짓말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지 몰랐다.
아니, 속아주는 척이라도 했을 것이었다.
준은 자신이 무딘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남의 횟수는 많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윤설과 마음이 통하는 것을 느꼈기에 둘의 사랑엔 이상이 없다고 믿었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툭 떨어진 상황은 그를 당황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고민과 탄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왼쪽으로 몸을 뒤척인 그가 살며시 눈을 떴다.
‘윤설 씨의 그 댕기머리…… 특별했어. 그래, 처음 그녀를 봤을 때부터 돋보였었지…. 그녀의 범상치 않은 언행들도….. 그렇다면……사, 사실일까? 휴우… 말도 안 돼.’
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느낀 윤설은 좋은 사람이 분명했다.
그를 대하던 눈빛과 진심어린 말들은 적어도 그랬다.
더군다나 윤설은 준이 배우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녀가 그를 일부러 모른 척할 이유는 없었다.
그동안 보고 느꼈던 윤설의 모습들은 그녀의 고백 쪽으로 기우는 것만 같았다.
고개를 가로젓던 준이 몸을 일으켰다.
급히 일어난 탓에 현기증을 느낀 그는 제 이마를 감싼 채 잠시 앉아 있다가 주방으로 걸어갔다.
준은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마개를 돌리더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잠시 타들어가는 속을 달랜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말을 믿는 건 대단한 모험이었고 믿지 않는 건 사랑에 대한 모독 같았다.
그 어떤 결정도 쉽지는 않았다.
생수병을 든 채 머뭇거리던 준이 다시 소파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았다.
어지러운 마음을 어쩌지 못한 시선으로 곧 스마트폰이 담겼다.
서랍 속에서 잠을 자기 바빴던 개인 폰이 손이 닿는 곳에 놓이게 된 건 순전히 윤설 때문이었다.
그녀와 통화가 시작된 이후, 그의 폰은 자유를 얻은 셈이었다.
저절로 윤설을 떠올리던 준이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보고 싶었다.
그리운 마음은 여전했다.
하지만 준은 핸드폰을 집어 들지 못했다.
윤설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납득이 먼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고 그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끙끙 앓고 있었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갑작스런 진동에 준이 깜짝 놀란 얼굴로 폰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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