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85
84회
윤 매니저였다.
지난번과 같은 우연을 생각했던 그는 스스로에게 어이없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네, 형. 말씀하세요.”
[ 헐, 살아는 있었냐? 짜식, 하여튼 사춘기 아들처럼 속 썩인다니까? ]준이 피식 웃자 그가 말을 이었다.
[ 웃는 걸 보니 정신은 멀쩡하군. 좋아. 일어나 있어라. 손님 모시고 갈 테니까. ]“손님이요? 누구…..”
[ 보면 알아. 30분 후에 도착한다. ]폰을 내려놓은 준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윤설 씨가 오는 걸까?’
해명을 위해선 그럴 수도 있었다.
준은 서둘러 일어서더니 찬물에 세수했다.
청량함이 살갗에 스미자 곧 머릿속이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윤설 씨가 오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난 아직…. 그녀를 만날 준비가 안 되었는데…. 하지만…. 보고 싶다.’
30분 후, 벨소리에 문을 연 준은 그 앞에 서있는 윤 매니저와 해인을 발견했다.
“어? 해인 씨……”
“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아, 아닙니다. 들어오세요.”
준이 두 사람을 소파로 안내했다.
“뭐, 마실 거라도?”
“아, 아니에요. 저….. 준이 씨랑 상규 오빠에게 중요한 얘길 하려고 해요. 이건 우리 셋이 무덤까지 가져갈 이야기에요.”
사뭇 비장한 한 마디에 두 남자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윤 매니저가 동그래진 눈으로 제 연인을 바라보았다.
“어우, 뭔 얘긴데 그렇게 세게 나오냐? 무섭다. 야.”
“오빠, 윤설이에 관해 정말로 중요한 얘기라서 그래요. 두 분, 끝까지 비밀 지킬 수 있나요? 그럴 준비가 되셨다면 얘기할게요.”
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이자 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아무 것도 손에 잡지 못하고 있는 그로선 꽤 절실했다.
윤설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무엇이라도 듣고 싶었고 들어야만 했다.
“네, 끝까지 지킬 겁니다. 말씀해주세요.”
담담한 준의 대답에 윤 매니저도 고개를 끄덕였다.
“휴우, 이쯤 되면 궁금해서라도 들어야겠다. 걱정 마. 우리 둘 다 입 무거운 걸로 둘째가라면 서러우니까. 우리 네 사람 연애에 관한 비밀도 아직까지 잘 지켜지고 있잖아.”
“알았어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모두 진실이에요. 꾸며낸 것도 아니고 과장한 것도 아니에요.”
해인이 심호흡을 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윤설이 말이에요. 사실은 조선시대에서 왔어요.”
꽤나 강렬한 첫 마디였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자부한 이들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윤 매니저가 해인을 만류했다.
“헐, 오빠 방금 소름 돋았다. 어우, 이거 어메이징 스토리야? 뭐야? 진실만을 말한다면서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상규 오빠! 나 지금 진지하거든요? 그리고 모두 진실이에요.”
그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자 준이 나섰다.
“해인 씨, 모두 다 말해주세요. 듣고 싶습니다.”
해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야간 알바를 하던 날이었어요. 그날은 비가 오려는지 저녁부터 흐렸었죠. 손님도 없고 해서 책이나 좀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경적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눈을 들어 보니 사람들이 모여 있었죠.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밖으로 나갔는데 그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니 한복 차림의 한 여자가 땅에 누워 있었어요.”
많이 놀란 듯 남자들에게선 탄식 소리 하나 나오지 않았다.
“흔치 않은 풍경이라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도울 생각도 하지 않고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 때문에 몹시 화가 나고 말았어요. 그들을 다 쫒아낸 후에 그 여자에게 말을 건넸었죠. 굉장히 초췌한 얼굴로 많이 떨고 있더라고요. 우선은 진정시킬 목적으로 편의점 안으로 들였고 자초지종을 묻게 되었어요. 가출을 한 건지, 길을 잃은 건지… 어쨌든 집엘 보내줘야 하니까요. 그런데 영 듣도 보도 못한 얘기들을 하는 거예요.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윤설이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인지…. 노숙자인지…… 미안한 소리지만, 그때는 정말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었어요.”
“헐, 그래서?”
윤 매니저가 빠져든 듯 거들자 해인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화번호를 알아야 어디로 연락이라도 해볼 텐데 그것도 모른다고 하고….도무지 아는 것이 없으니 청학동에서 가출했나 싶기도 했죠. 그런데 윤설이의 눈빛엔 거짓이 없는 거예요. 누굴 속이려는 느낌보다는 절박하고 간절한 그런 심정이랄까? 제가 사람 상대를 많이 해봐서 조금은 알거든요. 결국 시간이 너무 늦어서 우리 집으로 데려갔어요. 윤설인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들에 대해서도 문외한이었죠. 두려워하기도 하고 신기해하기도 했어요. 그런 모습들에서 좀 특별한 걸 느꼈었죠. 저는 윤설이의 이야기가 궁금했고 그 아인, 기억나는 걸 모두 말해줬어요. 그 말을 토대로 전 검색에 들어갔죠. 윤설이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었어요. 아니, 거짓이라면 그 모든 걸 그렇게 잘 외운다는 게 가능할까요? 윤설이의 말과 행동은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두 분도 아시잖아요.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것도 아니에요. 윤설인 지혜로워요. 후대가 너무 발전해서 모르는 것들이 많지만 조선의 지혜를 가진 친구란 말이에요.”
흥분을 이기지 못한 음성이 기어이 울먹이기 시작하자 곁에 있던 윤 매니저가 흠칫 놀란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럼, 그럼. 윤설 씨 지혜로운 건 다 알지. 우리가 안 겪어봤냐? 어우, 해인아, 왜 울고 그래? 네가 우니까 오빠 마음이 넘 아프다.”
담담히 해인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준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 위론 충격과 당황이 여전했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여유는 찾지 못한 듯했다.
윤 매니저가 티슈를 뽑아 해인에게 건네주자 그녀가 제 눈가를 닦아내더니 준을 응시했다.
“……윤설인 자신의 존재가 준이 씨에게 부담이 될까 봐 연애도 망설였던 친구에요. 20년 만에 이성을 향해 처음으로 느껴보는 설렘이 두려워서…. 감정을 꽁꽁 숨긴 아이라고요. 도저히 떨쳐내지 못한 마음 때문에 숨죽여 우는 윤설일 보던 날, 너무나 안타까워 가슴이 미어졌어요. 내 친구는…… 언제나 조선으로 돌아가길 소망했지만 이젠 준이 씨와의 사랑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었죠. 준이 씨, 윤설이는 언젠가 조선으로 돌아갈지 몰라요. 부탁드릴게요. 어렵게 시작한 이 사랑을 후회하지 않도록 지켜주세요. 그때, 서로가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면….얼마나 좋겠어요? 쉽지 않겠지만….준이 씨, 우리 윤설이를 이해해주시고 더욱 사랑해주시면 안될까요?”
홀로 남은 준은 멍한 얼굴이었다.
그는 해인의 말을 듣는 순간부터 두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한 채였다.
윤설의 자태, 행동 그리고 말투까지……
독특해서 이상하게 여겼던 부분들이 제법 많았었다.
하지만 해인의 이야기는 그의 머리에 흩어져있던 것들이 제자리를 잡도록 도와주었다.
하나하나의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는 순간, 곧 조선의 규수 윤설이 완성되고 말았다.
몹시 당황한 그에게 문득 해인의 마지막 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준의 뒤통수는 물론, 가슴까지 세게 강타하기 시작했다.
윤설이 그동안 간절히 소망했던 것보다 그를 더욱 생각한다는 건 더없이 고마웠다.
하지만 그녀가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준을 견딜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
‘사실이라면….. 그녀가 돌아간다면…!’
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 안에 윤설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해인은 잠시 나갔다오겠다며 나선 후,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분주한 벗을 애써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앉아있는 것뿐이었다.
‘공연한 말을 꺼내어 그분을 힘들게 만들었구나….. 참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허나, 그분이 느낄 고통에 비할까…… 이제 이것으로 연을 끊자 하시면…. 그리 따라야 할 테지. 그래, 이제 모든 것을 털어놓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허나….’
자책을 이어가며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이에게 불현듯 풍악소리가 들려왔다.
윤설이 흠칫 놀라 몸을 떨고 말았다.
지난번처럼 실수할까 봐 애당초 멀리 놓아두었던 폰이 분명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
[ 윤설 씨? 저에요. 지금 나올 수 있나요? ]“주…준이 님…. 지, 지금이라 하셨습니까?”
[ 네. 윤설 씨네 마당으로 나와 주세요. ]윤설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재빨리 신을 신더니 곧 현관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어느덧 해가 진 옥탑방의 마당 위로 달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시선이 님을 찾는 찰나, 계단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높은 곳까지 단숨에 올라온 이는 바로 민준이었다.
윤설이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발견한 순간, 그가 서둘러 다가왔다.
“준이 님…..여긴 어떻게…..”
준이 윤설을 꼬옥 안았다.
“미안해요. 윤설 씨,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나요? 난, 내가 당신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했었어요. 늘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니까….늘 숨어서 만나야만 하니까요. 그래서 당신이 점잖게 헤어지자고 말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군요. 해인 씨에게 모두 들었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믿기 힘들고 여전히 믿기지 않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당신의 모습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하는군요. 이상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이제야 모두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윤설 씨, 당신의 진심을 몰라줘서 미안해요. 언젠가 내가 말했었죠? 당신이 외계인이어도 상관없다고요. 그저 함께할 수 있다면 당신이 조선의 규수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난, 김윤설이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니까요.”
그의 가슴에 폭 안긴 윤설이 조용히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민준이라는 남자를 만나며 그의 배려와 사랑에 저절로 이끌렸던 그녀였다.
종종 그가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이런 날이 오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늘 그랬듯….. 님께선 저를 따뜻하게 배려해주시는군요. 은애하는 분께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고 여겼고 그렇게 다가서고 싶었습니다. 허나…. 엄청난 현실의 무게는 저 하나로 족하다 여기어….차마 발설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언젠가 헤어져야 하는 한계도 두려웠습니다. 그 와중에 설렘이 커질수록 이곳의 여인이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난 사람이라면…. 준이님께 부담이 되진 않을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님의 고민과 행복에 그 어떤 이질감 없이 함께 공감해주고 싶었습니다. 헌데…. 그 모든 것을 다 이해해주신다고 하시니…..또한 부족한 저를 받아준다고 하시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윤설 씨, 내가 더 고마워요.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요. 그리고 내게 와줘서…… 우리, 언젠가 닥칠 이별을 애써 떠올리진 말아요. 그저…. 함께 할 수 있는 나날들을 최고로 행복하게 만들어가요. 이제 더 이상 속상해하는 일은 없는 겁니다. 알았죠?”
윤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떨리는 음성이 들려오자 준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어있는 모습에 안쓰러움이 저절로 밀려들었다.
“휴우, 당신을 이렇게 힘들게 하다니…. 전 정말 나쁜 놈이네요.”
“아, 아닙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당치 않습니다.”
윤설이 고개를 가로젓자 그가 피식 웃었다.
“윤설 씨, 그 마음, 변하면 안 됩니다.”
“예에?”
“언제나 저를 좋게 여겨주는 그 고운 마음씨 말이에요.”
눈물짓던 이가 살며시 미소 짓자 준이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이젠 울지 말아요. 당신의 미소,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죠? 그리고 지금처럼 당당히 나를 바라봐주세요. 예쁜 얼굴, 자주 보고 싶으니까요.”
“부끄럽지만…. 그리하겠습니다.”
윤설이 다시금 웃는 얼굴을 내보이자 준이 가까이 다가섰다.
“윤설 씨, 사랑합니다.”
준의 입술이 윤설의 이마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은은한 달빛으로 물든 자그마한 마당…..
오해를 풀고 사랑을 확인하는 두 사람이 서로를 꼬옥 품고 있었다.
여리게 떨고 있는 윤설에겐 정인의 사랑이 각인되고 그녀에게 닿은 준에겐 사랑이 굳건해지는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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