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9
8회
윤설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그녀의 부담을 이해하게 된 해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세상에…. 예순 여섯 할아버지에게 스무 살 처녀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너도 그리 생각한 것이니? 그럼, 내가 이상한 것은 아니지?”
“어우, 당연하지. 여기에서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뉴스에 나오겠다. 윽, 생각만 해도 끔찍해.”
해인이 자신의 심정에 공감해주자 윤설의 얼굴에 한결 편안한 기색이 감돌았다.
아무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감정을 털어놓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시원했고 혼자만의 생각이 불경스러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되자 마음속에 부대끼던 것이 사라지고 말았다.
윤설은 다시금 조심스레 제 마음을 드러냈다.
“난….. 혼인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만약에 하게 된다면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이길 바랐었어. 내가 좋아하는 천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 말이지. 임금님이 그런 분이셨다면 그분의 보령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야. 하지만…. 난 아버지께 분명히 들었단다. 그분은 망원경을 깨뜨리셨다고….. 무서웠어. 이해받지 못하는 곳에서 그저 인형처럼 사는 것이 말이야. 자유롭지도 못 할 테지…… 법도에 얽매어 천문을 보는 일은 절대로 없을지 모른단다. 왕비가 된다면 왕실과 가문 사이에서 눈치만 보다가 숨이 막힐 지도 몰라.”
입을 다물지 못하던 해인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처녀단자를 낸다고 다 뽑히는 건 아니잖아. 너무 겁먹었던 건 아니야? 전국에서 규수들이 모여들지 않니? 사극에서 보면 꽤 많은 아가씨들이 궁궐에 와서 면접보고 막 그러던데?”
“그래, 금혼령이 내려지면 전국에서 처녀단자를 낸단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조선 팔도에서 단자를 내는 경우는 대부분이 한양과 주변의 가까운 지방들뿐이라고 들었단다. 그 연유는 처녀단자를 내는 조건이 까다롭기도 하고 팔도에서 당도하려면 시일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지. 그러나 더 중요한 연유는 따로 있단다.”
가뜩이나 역사, 특히 왕실 여인들에 관해 관심이 많던 해인이었다.
계속 이어지는 윤설의 이야기들은 그녀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시작했고 해인은 어느덧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진지하게 빠져들어 갔다.
“그게 뭔데?”
“아버지께선 간택령이 그저 허울 뿐이라고 하셨지. 달리 말하면 바로 정해진 처녀가 있다는 것이란다.”
“뭐? 말도 안 돼! 한 명을 이미 정해두고 나머지를 들러리 세운다는 거야? 헐…… 그냥 그 처녀랑 딱 혼인시키면 그만이지 왜 불필요한 과정을 거친데? 다른 처자들이 그런 사실을 알면 얼마나 약이 오를까? 게다가 네가 그렇게 염려한 이유는 뭐야? 서, 설마…. 그, 정해진 사람이 너였어?”
윤설이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답은 할 수 없지만 가능성은 크단다. 왕실의 혼인이기에 법도에 따라 그런 과정을 시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만, 실은 왕실 어른들의 입김이 작용하거나 또는 조정에서 권세를 잡은 가문의 입김이 들어가곤 한단다.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이미 어쩔 도리가 없다고 하셨어. 게다가 최근 청나라에 두 번이나 다녀오셨기에 아마 임금님의 신임이 두터웠을 것이고…… 모범을 보여 앞장서야 할 입장이셨기에 여러 면에서 거절하기가 어려우셨을 거야.”
“세상에나…… 너의 가문이 정말 대단했던 모양이구나? 그래, 얼핏 들은 것도 같아. 안동 김 씨의 세도정치……”
“난 사실 자세히는 몰라. 그저 우리 가문에서 정승 몇 분을 배출하셨다는 것 외엔…….다른 일엔 관심이 없었어. 내겐 위로 오라버니만 셋이었기에 부모님의 사랑이 남다르셨단다. 내가 다소 늦게까지 처녀로 남았던 것은 나를 귀히 여기는 그분들의 마음 덕분이었지. 그런 날 혼인시키는 일이….. 더군다나 왕가로 들인다고 생각하면 아마 부모님께서도 편치만은 않으셨던 것 같구나. 난….. 두 분의 괴로움을 마주하자마자 정신없이 처소로 달려왔고 두려워 떨던 중에 쓰러지고 말았어. 그리고 눈을 떠보니 이곳으로………”
윤설이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한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멍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경청하던 해인이 동그래진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유, 윤설아………”
친구로서 해인이 처음으로 윤설의 이름을 부르는 찰나, 파르르 떨리던 입술이 응답했다.
“부모님이 너무 그리워. 지금쯤 얼마나 걱정하고 계실까? 나, 돌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몇 백 년을 뛰어넘어 예까지 올 수가 있는 것이니? 하늘의 별들을 보며 후손들을 궁금하게 여기긴 했어. 하지만……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냔 말이다! 해인아, 나 어떡하면 좋으니….. 제발 돌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해다오.”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이 무너지더니 윤설에게서 눈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차라리 격한 흐느낌이었다면 그러려니 했을지 몰랐다.
하지만 윤설의 눈물은 조용했고 그녀만큼이나 가녀렸다.
너무도 낯설어 황당하기만 한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여린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윤설아, 너무 염려하지 마. 네가 이쪽으로 왔다면 다시 그쪽으로 갈 수 있는 방법도 반드시 있을 거야! 그래, 어쨌든 문이 있으니까 오갈 수 있는 게 아닐까? 난 그렇게 믿어. 내가 도와줄게. 내가 모든 걸 다 동원해서라도 널 도와줄 거야. 정말 그러고 싶어.”
제 어깨를 도닥이는 손길에 감동한 윤설이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뜻밖의 일이 생기고 말았지만 낯선 곳에서 동갑내기 은인을 만난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라 할 수 있었다.
이해하고 돕겠다는 마음은 눈물이 날 만큼 고마운 일이었다.
“정말….. 고맙구나. 너와 같은 은인을 만난 것은 그나마 다행 중 다행이란다. 정말….. 고마워………”
어디선가 발그레한 빛 한 줄기가 들어와 한참동안 어둠속에 묻혀있던 이를 가만히 흔들었다.
꿈 하나 없는 말간 잠이었다.
그래서 훨씬 개운했는지도 몰랐다.
윤설은 제 눈꺼풀위로 스며든 것에 아침이 온 것을 깨닫고는 가만히 눈을 떴다.
허공을 향해 눈을 몇 번 깜빡이던 그녀가 흠칫 놀라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불안한 눈빛이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낯선 공간엔 난생 처음 보는 세간들이 무심한 얼굴로 이방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멈칫한 윤설이 제 몸을 살폈다.
낯선 이불자락 속으로 더욱더 낯선 옷감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어깨 아래로 조금밖에 내려오지 않는 소매로는 맨 팔이 훤히 드러났고 바지라는 것은 무릎 선을 올라와 있었다.
민망하기가 이를 데 없었지만 신세를 지게 된 입장에서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정말 염치없는 짓이었다.
명문가의 규수로서 그런 예법쯤은 잘 알고 있는 윤설은 차마 해인에게 다른 것을 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토록 옷감을 적게 쓰다니…… 해인이의 살림살이가 풍족치는 않은 모양이로구나. 내가 괜스레 입 하나를 더하게 된 것은 아닐까? 휴우……. 어제 주막에서 본 그 처자도 그럼 유복하진 않았던 것이구나. 내가 생각이 이리도 짧았다니….. 부끄럽구나.’
윤설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자신을 살폈다.
온통 낯선 모습 속에서 온전히 유지되고 있는 건 길게 땋아 내린 댕기머리 하나뿐이었다.
땋은 머리를 어깨 앞으로 가져와 가만히 쓰다듬던 윤설이 멍한 얼굴로 시선을 떨구었다.
‘눈을 뜨면 나의 처소이길 바랐건만……. 낯선 이곳이 꿈이길 바랐건만…… 하늘도 무심하시구나. 과연 돌아갈 수 있을까…… 두렵고…. 또 두렵다.’
제 처지를 비관하던 윤설은 곧이어 다른 이유로 떨기 시작했다.
전날 밤, 그녀의 머리맡 높다랗고 푹신한 것에 누워 자던 해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고 해인은 윤설에게 침상을 몇 차례 권했었다.
하지만 낯설고 미안한 마음은 이번 호의에 관해선 기어이 거절하고 말았었다.
윤설이 다시금 침상을 응시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어질러진 이불 사이로 해인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앉은 채로 불안에 떨던 윤설의 귓가에 둔탁한 쇳소리가 흘러들었다.
철문에 열쇠를 돌려 여는 소리였다.
흠칫 놀란 시선 속으로 곧 해인이 담겼다.
“어? 윤설아, 일어났어?”
“해인아!”
반가운 마음이 앞선 탓에 잠시 음성이 높아지자 안으로 들어서던 해인이 놀란 얼굴로 윤설을 응시했다.
“아….하하… 미안. 놀랐지? 내가 새벽에 일을 하거든. 너 깨우기 미안해서 말도 못하고 나갔다 왔어. 일어나기 전에 오려고 서둘렀는데 네가 한 발 빨랐구나?”
“새벽….? 미명을 말하는 것이로구나. 그 이른 시간에 일이라니….. 참으로 놀랍다.”
윤설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해인을 바라보자 신을 벗던 그녀가 겸연쩍듯 서둘러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바닥 불편하지 않았어? 침대에서 자라니까…… 달랑 매트리스뿐이긴 하지만….. 손님을 홀대한 것 같아서 자면서도 미안하더라.”
“아니다.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니. 그것은 어쩐지 물렁거려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야. 늘 자던 자리는 이곳이니 정말 잘 잤단다.”
“정말? 히잇…. 기쁘다. 참,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줘.”
안으로 들어선 해인은 처소 안에 있는 나무문으로 쏘옥 들어갔다.
곧 물소리가 들려오자 윤설은 흠칫 놀라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처소 안에서 입는 것, 먹는 것 그리고 씻는 것까지 모두 해결된다는 것은 매우 실용적이었지만 낯선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윤설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낯선 촉감을 손으로 만져보던 그녀는 제 이불을 차곡차곡 개어 벽 한쪽으로 가져갔고 곧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던 해인의 이불도 차곡차곡 개었다.
그 사이, 얼굴을 닦으며 밖으로 나온 해인이 까르륵 웃었다.
“손님이 일까지 한 거야? 땡큐. 어? 그런데 침대 위의 이불은 그냥 펴두어도 괜찮아. 히잇. 원래 그런 거야.”
“아…… 그런 것이구나?”
“히잇, 미안해할 필요까진 없고…… 조선시대엔 없던 것이니 낯설 만도 할 거야. 잠시만 기다려 줘.”
“으, 응.”
먼 훗날의 사람과 벗이 되어 대화하고 있는 현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윤설은 부엌인 듯한 곳으로 걸음을 옮겨 무언가를 열고 꺼내는 해인의 뒷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었고 곧 자신도 나무 문을 열고 작은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냉장고를 열어 재료들을 꺼내던 해인은 욕실의 문소리가 들리자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미소 짓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의 또래와 벗이 된 것과 함께 있는 것은 그 자체로도 가슴이 떨리는 일이었다.
과학적으로 해석이 안 되는 일이 여럿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만 같았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계란을 내려놓은 손이 불현듯 제 볼을 꼬집었다.
꽤 아팠다.
‘세상에….. 더군다나 꿈도 아니네. 우째 이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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