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90
89회
뜻밖의 존재가 툭 튀어나오자 준의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여러 생각들이 오갔다.
어떻게 개인 번호를 알아냈는지는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난번 제 뜻을 분명히 전했으니 더 이상 얽힐 일은 없었다.
그런 그녀가 전화까지 걸어온 것은 그에게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당황한 마음이 고스란히 음성으로 드러났다.
“….아…안녕하세요? 무슨….일로….?”
수화기 너머의 이지가 제 입술을 깨물었다.
그와는 일 때문이 아니라 수시로 연락할 수 있는 관계이길 원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순간, 제 용무를 밝혀야만 했다.
비교적 담담한 음성이 준의 귀로 흘러들었다.
[ 새 드라마 때문에 원주에 계신다고 들었어요. 수고가 많으시겠네요. ]“네…감사합니다.”
안부를 나눌 사이는 아니지만 준이 일단 예의 있게 반응했다.
[ 바쁘실 텐데… 용건만 말씀드릴게요. 할 얘기가 있는데 제게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세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제가 그쪽으로 가죠. ]의아함을 품었던 준의 눈빛이 곧 담담함을 회복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와 마주앉아 할 얘긴 없었다.
준은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편이었지만 이 순간, 용기를 냈다.
“죄송합니다만, 그날 모든 걸 말씀드렸고 더 이상 만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뜻을 알린 그가 정중히 통화를 마무리하려는 찰나였다.
[ 김윤설 씨에 관한 얘기라면…. 저와 만나주시겠어요? ]담담했던 준의 눈빛이 급격히 당황으로 물들이 시작했다.
이지의 입에서 제 연인이 거론된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약속된 시간에 거짓말같이 이지가 나타났다.
타인의 이목이 차단된 공간, 마주앉은 이들에게 긴장감이 흘렀다.
상황을 빨리 마무리하고 싶었던 준이 어색함을 깨뜨렸다.
“멀리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중요한 얘기인 것 같은데….말씀하시죠.”
앙다물었던 붉은 입술이 가만히 열렸다.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지난번 준이 씨 얘기 듣고 한동안 많이 힘들었어요. 또다시 힘든 일을 자처하게 되었지만…. 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더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실례하지만, 김윤설 씨와 어떤 관계인지 대답해주시겠어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준이 곧 입을 열었다.
“제 연인입니다.”
단정한 대답 하나가 이지의 가슴을 관통하고 말았다.
“그, 그분과…사귄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하아…..”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은 이지가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참담했지만 한 가지 더 궁금한 걸 놓칠 수 없었다.
“얼마큼 사랑하세요?”
당황스러울 법도 한 질문이었지만 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윤설을 향한 제 사랑은 후회 없이 당당한 것이었다.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겨…결혼까지…생각하고 계신가요?”
“그렇습니다.”
친하지도 않은 이에게 사생활을 드러내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럴 의무도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대중이 주목하고 있는 배우였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준은 이지의 마음에 남아있는 일말의 미련을 느꼈고 이번 기회를 통해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냉정하단 원망을 들을망정, 남녀 간의 일은 깔끔히 매듭짓는 게 좋으리란 판단 때문이었다.
“그날보다 지금이 훨씬 더 잔인하시군요. 당신을 위해 노력했던 내 시간은….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니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분명 그런 이지 씨를 사랑할 누군가가 있을 테니까요.”
“그런 위로는 듣고 싶지 않아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준이 씨의 행복을 바라진 못하겠군요. 제 축복 따위 없다고 해도….당신에게 전혀 문제가 없을 테죠. 준이 씬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분이….참…부럽네요.”
-또각 또각 또각-
복도를 따라 걷는 그녀의 뺨 위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지만 이지는 애써 닦아내지 않았다.
적막한 공간에 핸드폰의 벨소리가 울리자 윤설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촛불에 의지해 막 이불을 펴던 중이었다.
상대가 정인임을 알면서도 놀란 이유는 바로 시간 차 때문이었다.
한창 바쁠 그가 1시간 간격으로 전화를 걸어온 건 처음이었다.
“그 사이에 짬이 나신 것입니까?”
윤설이 싱긋 웃자 화면 속의 준 역시 미소 지었다.
낭군을 바라보던 그녀가 폰을 가까이 들더니 곧 근심스런 얼굴로 물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혹여 너무 무리를 하신 건 아니신지요?”
[ 윤설 씨…… ]“예, 말씀하십시오.”
[ 사랑해요. ]수줍은 듯 윤설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의 고백은 처음이 아니었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설렘 속에 빠뜨렸지만 이 순간의 느낌은 사뭇 달랐다.
그저 달콤하기보단 담백하면서도 진지했다.
윤설이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준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 당신을 만나 사랑할 수 있어서 감사해요. 윤설 씨, 마음 깊이 사랑합니다. ]가슴이 벅차올라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이가 조심스레 화답하기 시작했다.
“내 님은 햇살처럼 따뜻하고 달빛처럼 온유하며 별빛처럼 다정하시네. 행여 외로울 새라…행여 잊을 새라… 그 마음, 고이 접어 보내주시네. 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찌 은애함을 알았을까? 심애로 묶인 두 마음, 천리 길도 지척이네.”
윤설의 고백이 자작시에 실려 닿는 순간, 준의 마음이 편안하게 녹아지고 있었다.
이지가 떠난 이후, 편치 않았던 그였다.
준은 제 연인에게 당당히 사랑을 확증하리라 결심했지만 오히려 그녀로부터 위로를 받고 있었다.
윤설의 고백은 곧 그의 고백이기도 했다.
준에게 그녀는 언제나 따사롭고 온유하며 다정한 존재였다.
한껏 감동한 그가 잔잔히 웃으며 화면 속, 연인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이지의 낯빛이 좋지 못했다.
그녀는 불안한 듯 손톱을 깨물다가 한숨을 내쉬었고 기어이 분노하고 말았다.
듣도 보도 못한 여배우의 욕설에 운전대를 잡은 이 대리가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만류하지 않았다.
무서운 건 둘째 치고, 이런 땐 그저 나서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한바탕 눈물을 쏟은 그녀가 제 백을 열었다.
그러나 티슈를 꺼내려 했던 손길은 곧 진동으로 부르르 떨고 있는 폰에 닿고 말았다.
장 실장일 줄 알고 무심했던 눈빛이 뜻밖의 인물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지가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 이지야, 많이 아프다며? 갑자기 촬영 취소라니….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야? ]‘강태주…..당신, 참 다정하다.’
[ 이지? 듣고 있어? 지금 어디야? ]“알려주면….올 수 있어?”
[ 지금 당장 가지. ]“태주 씨, 당신이랑 한 잔 하고 싶어. 우리, 술 마시자.”
이지가 약속 장소에 들어서자 태주가 벌떡 일어섰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더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진짜로 컨디션이 안 좋구나? 병원엔 다녀왔어?”
이지는 대답 대신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 정말로 무슨 일이 있긴 있구나. 이지, 오늘 좀 이상하다?”
“태주 씨가 내 상태를 어떻게 알아?”
“훗, 장난해? 서로 얼굴 맞대고 일한 시간이 얼만데….표정만 봐도 답이 딱 나오지. 그나저나 콧대 높은 아가씨가 날 먼저 만나자고 하고…..”
“그래서 좋았어?”
이지의 물음에 태주가 큰 소리로 웃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좋다기보단 설렜지. 이렇게 말한다고 또 혼나려나? 뭐, 옛날 생각도 나고 나쁘진 않아. 우리 신인 땐, 이런 자리 흔했잖아.”
“그래, 그런 시절도 있었지.”
이지가 독한 술을 주문하자 태주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량이 약한 것을 아는 그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지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 그녀는 제 무너진 자존심과 상한 마음을 독한 것에 의지해서라도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자그마한 잔에 술이 채워지고 서로 건배를 한 이들이 쓴 것을 삼켰다.
이지가 미간을 찡그리자 태주가 그녀를 만류했다.
“천천히 마셔. 하아…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왜? 스캔들이라도 날까 봐?”
“하핫. 이지, 오늘 진짜 이상하다. 몸이 아픈 건 아닌 것 같고… 말해봐. 대체 무슨 일이야?”
“묻지 마. 사람이 어떻게 매일 똑같아?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 오늘은 취하고 싶었고 마침 태주 씨가 전화했던 거야. 잠시 과거로 돌아간 셈 치고 마시자.”
두 번째 잔이 비워지고 세 번째 잔이 채워졌다.
대화는 데뷔 시절의 에피소드부터 시작해 현재 촬영 중인 로 옮겨갔다.
과거의 실수들을 떠올린 두 사람이 웃기에 바빴다.
하지만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은 각각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지의 시선이 태주를 담았다.
그는 그녀의 왼편에 앉아 시종일관 웃는 낯으로 투정 섞인 이야기를 다 받아주고 있었다.
‘강태주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가….?’
동기라는 이름은 공유할 거리가 많다는 의미였다.
끈끈함은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이었고 생각보다 편안한 느낌은 당연했다.
태주가 이지를 바라보았다.
조금씩 취해가는 듯 몽롱해진 눈빛은 뇌쇄적이었고 생글거리는 미소는 벌써부터 그를 홀리고 있었다.
‘이지….분명 무슨 일이 있어. 감추는 걸 보면 가볍진 않은 것 같은데…..하긴, 그게 무슨 상관이지? 네가 먼저 날 찾았다는 거… 그리고 이렇게 가까이에서 함께 있다는 거….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할 뿐…. 심이지, 널 갖고 싶다.’
테이블 위, 빈 술병이 2개로 늘어갈 무렵, 이지의 이성 하나가 끊어지고 말았다.
도수가 센 술에 태주 역시 몽롱해진 상태였다.
그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지를 응시했다.
“그만 마실까? 이거 꽤 센데?”
“….강…..태…주……”
살짝 혀 꼬인 발음에 그가 피식 웃었다.
“이지, 많이 취했네. 일어나는 게 좋겠다.”
“….아직도…..날…좋아해?”
뜻밖의 물음에 태주가 멈칫했다.
제 귀를 의심하는 사이, 또다시 질문이 날아와 그의 가슴에 꽂혔다.
“날…. 좋아하냐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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