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container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73
리나가 손을 든 채 자리에서 정지했다.
“···죽었다고? 당신이?”
리나의 굳은 표정이 조금 풀렸다.
“어떻게 부활했죠? 헬이 예외를 두는 성격은 아닐 텐데.”
“그녀는 드디어 서야 할 곳을 정했습니다. 오딘도, 제우스도 아닌 저 인간과 함께하기로 했죠.”
“아··· 그래서 헬헤임이 있던 이그드라실이 그렇게 빈약했던가.”
리나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토르, 리나는 재단사가 아니죠? 대체 정체가 뭔가요?”
“그녀는··· 마하(Macha)일세. 전쟁과 승리의 여신이지.”
전쟁의 여신과 전사들의 신 토르라니.
엄청나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
뺨 맞는 건 좀 안됐지만.
“마하라뇨? 저는 재단사 리나입니다.”
“미, 미안합니다. 리나.”
디아블로의 머리를 깨부수고 우주를 누비는 천둥의 신 토르.
그도 연인 앞에서는 그냥 남자다.
‘어휴. 솔로가 속 편하네.’
나는 연애를 못 하는 게 아니다.
이래서 안 하는 거지.
* * *
“토르, 궁금한 게 있어요.”
“무엇인가?”
토르가 이때다 싶은 얼굴로 한달음에 내게 달려왔다.
“이곳 긴눙가가프는 추상적인 장소라 했는데··· 대체 그게 무슨 뜻이죠?”
“흐음··· 뭐라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군. 이곳 대지 조각에 왔다는 건. 긴눙가가프의 경계를 경험한 거겠지?”
“경계요?”
“여긴 일종의 아공간이네. 그래, 자네 이그드라실에 있는 세계가 수백, 수천만 개도 넘게 있는 그런 장소지.”
“예? 그럼··· 그냥 무작위로 여길 헤매야 하는 건가요?”
그럼 토르를 만날 확률이···.
“아니네. 새로운 경계에 들어설 때 강렬하게 염원하는 것에 따라 떨어지는 곳이 달라지네. 그래서 추상적 공간이라 하는 거지.”
‘아···.’
리나.
그녀는 누군지도 모르는 나를 따라왔고, 토르를 만나자마자 뺨을 때렸다.
‘머릿속에 토르 생각으로 꽉 차 있었겠군.’
반면 딱히 생각이 없던 아서스나 내 영향을 없었을 테고.
‘운이 좋았다.’
토르를 만나 이런 정보도 듣게 되었으니.
물론 토르 입장에서는 운이 나쁜 걸 수도 있지만.
“헬님이 미리 알려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내 생각엔 일부러 알려주지 않은 것 같군.”
“예? 왜요?”
“이곳이 추상적 공간이기 때문이지. 무언가 한 가지를 강렬하게 염원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네. 잡생각이 끼게 마련이지.”
이곳에 오는 신이 아무리 없었더라도 신계에는 괴짜들이 있었기 마련이고 이곳에 대한 정보도 조금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뛰어들면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떨어진다.
반면,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로 경계를 지나면 태초의 혼돈이 가득 찬 곳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일단 태초의 혼돈을 만나면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네. 빠져나갈 수 없지.”
공간이동이 안 된다는 말.
오래된 RPG처럼, 강제로 싸우는 이벤트가 발생하는 셈이다.
‘태초의 혼돈을 만나면 튀려고 했는데, 그것도 안 되나 보네.’
“대체 혼돈이라는 게 어떻게 공격하는 거죠? 마법을 쓰나?”
“흐음··· 아쉽게도 나는 태초의 혼돈까지는 만나 본 적이 없군. 오딘님도 딱히 내게 알려준 적이 없고.”
토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르문간드는 그런 미지의 에너지 덩어리를 얼마나 먹었는지 모른다는 거지.’
어쩌면 모두를 소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토르, 대체 무엇을 찾으러 이곳에 온 거죠? 오딘이 뭘 시킨 거에요?”
토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에이트르와 다그다의 솥을 찾으러 왔네.”
“깔깔깔!”
갑자기 리나가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아이고, 결국 그것이었나요? 어쩐지 오딘이 멀린님의 계획을 지지했다는 것부터가 이상하다 싶더니. 깔깔깔!”
토르가 침통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게 뭔가요?”
리나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대신 설명해주지. 에이트르는 태초의 거인 이미르가 살아 움직이게 해준 액체다. 만들려면 오래된 독이 필요하지.”
다그다의 솥은 에린의 4대 보물 중 하나다.
음식이 끝없이 나오는 내 식료품 창고와 비슷한 기능을 한다.
그런데 숨겨진 능력이 하나 있다.
“솥 안에 들어간 자는 완벽하게 사라지지. 그게 영웅이면 신관의 연결이 끊어지고, 그게 인간이면 가족에게 잊혀질 것이며, 그게 신이면···.”
소멸과 마찬가지인 효과를 발휘한다.
에이트르는 소멸에 이르는 신조차 부활시킬 수 있는 신계 최고의 포션이다.
“오딘. 교활한 자. 그는 모든 신을 죽이고 자신조차 잊혀질 생각이었군요. 다그다의 솥으로.”
리나의 음성에 분노가 섞였다.
‘아···.’
이제야 이해되었다.
이곳에서 태초의 혼돈과 영원의 싸움을 이어가는 요르문간드.
토르는 요르문간드의 싸움 흔적에서 독을 채취할 생각이었다.
모든 신을 죽이고, 자신도 공식적으로 소멸한다.
다시 솥에서 나오면 오딘은 유일신으로 남게 된다.
에이트르는 비상용 포션.
철두철미한 준비성이다.
‘뭐, 새삼스레 놀랍지도 않군.’
씁쓸한 토르의 표정에서 그가 결코 원하는 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군요. 저희는 갈 길이 바빠서요. 토르님. 다음에 뵐게요.”
“나는 토르와 함께 가겠어.”
리나가 토르의 망토를 붙잡았다.
토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게 구원을 바라는 눈빛.
‘미안한데, 또 이상한 데로 빠지면 안 되니까.’
여기서 데려가 봐야 경계를 지나며 다시 토르에게 갈 가능성이 크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토르! 행복하세요!”
“아, 아니. 자네!”
나는 재빨리 배를 뛰어 대지 조각에서 벗어났다.
“대체 무슨 일인가? 리나는 왜 저기 남겨두고?”
“흐음··· 그럴 일이 있어.”
설명해봐야 입만 아프지.
“다시 경계로 가자.”
나는 추상적 공간의 개념과 블로크의 속성을 모두 설명했다.
“아, 그럼 아까 내가 실수한 것이로군. 미안하네.”
“괜찮아. 이제 알았으니 됐다.”
“그럼 처음 보았던 그 이상한 곳에 접근할 때 강하게 요르문간드를 생각하면 되나?”
“이론상으로는 그렇지.”
“그런데. 나는 그냥 괴물 뱀이라는 것만 알고 어떻게 생겼는지, 뭘 상상해야 하는지도 모르네만···.”
“나도 마찬가지야. 사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없이 우리는 최후의 방법을 쓰기로 했다.
“요르문간드, 요르문간드, 요르문···.”
“요르문간드, 요르문간드···.”
아서스가 멍한 표정으로 긴눙가가프를 바라보며 요르문간드라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별 수 있나.’
이렇게라도 해봐야지.
배가 다음 경계로 향했다.
우리는 요르문간드라는 단어를 더욱 빠르게 중얼거렸다.
그때, 상태창이 강제로 팝업되며 임무가 떠올랐다.
[임무가 발생했습니다.] [긴눙가가프에서 ‘디스켓’을 찾아라!] [보상 : 30 포인트]‘갑자기? 디스켓은 왜··· 어?’
코끼리를 상상하지 마라.
그러면 다들 코끼리를 상상한다.
디스켓이라는 문구가 뜨자마자 머릿속에서 옛날 디스켓이 그대로 떠올랐다.
‘망할.’
부유감이 느껴졌다.
상태창 운영자
“저 집 맛있네.”
“그럭저럭, 겜방 갈까?”
“크크크. 허접. 내가 발라주지.”
“즐하셈.”
맑은 하늘.
주변엔 건물이 가득했다.
빠아아아앙?!
시끄러운 경적과 익숙한 매연 냄새.
‘뭐지?’
나는 시내 한복판에 있었다.
“여, 여기는 어딘가?”
아서스가 검을 들고 싸울 준비를 하다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와 코스프레 하는 사람인가 봐.”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코스프레하네.”
“갑옷 되게 멋있네.”
“무겁고 더울 거 같은데.”
“잘 어울리긴 한다.”
사람들이 검을 들고 있는 아서스 옆을 지나며 수군거렸다.
아서스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슬그머니 검을 내려 검집에 집어넣었다.
‘이게 뭐지?’
나는 주변을 파악하기 위해 도롯가로 향했다.
‘한남동이군.’
멀리 한남대교와 한강이 살짝 보인다.
‘시간을 거슬러 온 건가?’
그럴 리는 없다.
나는 조금 전까지 긴눙가가프에 있었다.
‘추상적 공간.’
이곳은 생성된 장소다.
우리는 한참을 헤매고 다녔다.
‘되게 리얼하네.’
지나가는 버스에 가득 찬 사람들.
도로를 오가는 다양한 차량은 중복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길가에 깨진 보도블록조차 리얼했다.
한강공원에 앉아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디스켓을 생각해서 이곳에 떨어진 건가?’
디스켓이 서울 시내랑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모른다.
‘어디로 가야 하지.’
“여긴··· 수서 영지의 일부 아닌가? 저 다리의 위치와 강 모양이 익숙하군.”
“눈썰미가 좋은데? 맞아. 우리 세상이 망하기 전에는 이런 느낌이었어.”
“복잡하고, 안 좋은 냄새가 가득하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았나?”
“다들 투덜거리면서도 잘 살아.”
“자네가 마차를 왜 그렇게 운영하는지 알겠어. 이 모습을 재현하고 싶었었군.”
아서스가 감탄하며 도로를 가득 메운 차를 바라보았다.
‘생각해보자.’
디스켓이라 해서 저장 매체를 떠올렸다.
당연히 그게 기록의 서를 이야기하는 줄 알았고.
그러나 우리는 뜬금없이 서울 시내 한복판에 떨어졌다.
‘기록의 서가 아니다.’
디스켓이라는 매개는 다른 걸 가리키고 있었던 것.
‘FCCB가 내게 비밀스럽게 보낸 메시지라 치면···.’
자신이 갇힌 곳을 알려주는 걸 수도 있다.
‘감옥이나 폐쇄된 실험실을 생각했는데.’
이렇게 멀쩡한 세상 한복판에 갇혀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생각을 이어갔다.
‘FCCB는 오랜 지병으로 사회생활이 불가능했다.’
병상에 누워 게이밍 노트북으로 언제나 게임과 인터넷만 했다고 했지.
재정적인 어려움도 없었다고 들었다.
‘근처 병원 VIP실.’
마침 이 동네에는 대형병원이 있다.
“아서스. 가자.”
“오, 뭔가 단서를 찾은 건가?”
“아마도.”
나는 대사관이 밀집된 지역으로 이동했다.
* * *
“굳이 이렇게 언덕 위에도 집을 지어야 하나?”
아서스가 땀을 닦으며 투덜거렸다.
뙤약볕에 금속 갑옷.
땀이 줄줄 흐르는 모양이었다.
“마스터급 기사가 왜 이리 허약해?”
“말도 말게. 마스터급도 인간이야!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는 어림도 없군.”
“땅이 모자라니까 산에도 지어야지 어쩌겠어.”
“자네 영지를 보면 딱히 모자라지는 않아 보이던데.”
“내 영지 정도 크기에 이천만 명이 넘게 살았거든.”
“뭐, 뭐라고?”
아서스가 경악했다.
지금 내 수서 영지는 휴전선에서 천안까지 내려가 있다.
‘기존 한국 영토를 생각하면 이천만도 넘겠지.’
지금 살아남은 한국 사람들과 해외 피난민이 다 들어오고 나면 꽤 복잡해질 건 뻔하다.
‘거기에 나중에 일반인까지 부활하고 나면···.’
물리적인 땅 자체가 모자라다.
‘일반인이 부활할 때쯤 되면 일이 정리되고 난 다음이니까 각 국가로 돌려보내면 되긴 할 테고···.’
하지만 아직도 깊은 산속이나 구석구석에는 몬스터가 즐비하다.
‘영지를 확 늘리고 몬스터 토벌도 적극적으로 나서야겠어.’
이런저런 고민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
‘역시, 이곳은 만들어진 공간이구나.’
텅 빈 건물.
병원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등도 켜져 있고, 모든 집기와 장비도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이.
나는 벽에 붙어있는 안내표를 확인하고 VIP병실이 있는 별관으로 이동했다.
“흐음. 안내표가 아주 훌륭하군. 왜 이런 생각을 못했지.”
아서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그 짧은 틈에 옛 서울에서 여러 가지를 보며 정신없이 흡수했다.
VIP 병실이 있는 층에 도착했다.
벽에는 입실 중인 환자명단이 적혀있었다.
“아서스, 잠깐 밖에서 좀 기다려 줘.”
“알겠네.”
‘김정훈.’
병원에 있는 유일한 환자.
나는 심호흡을 하고 병실을 열었다.
* * *
일반 아파트 같은 깔끔한 VIP 병실.
소파에는 젊은 남성 한 명이 앉아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고인물 형님.”
“FCCB? 초보 너냐?”
“예.”
‘얼굴이 남아있어.’
오딘 앞에서 고통받던 소년.
그 모습이 남아있었다.
“물어볼 게 너무 많아서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군.”
“우선, 눈치를 채셨겠지만··· 이곳에 있는 저는 실체가 아닙니다.”
FCCB, 김정훈이 상상으로 만든 세상.
그게 이곳이었다.
“제가 어디 있는지는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보나 마나 어둡고 추운 공간에 누워있겠죠.”
그의 정신은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즉, 이곳이 그의 사무실이자 생활 터전인 셈.
긴눙가가프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다.
“긴눙가가프를 여행하며 저를 강하게 상상할만한 신도 없고, 인간은 더욱 없으니까요. 형님을 빼면요.”
전 우주에서 숨기에 제일 좋은 장소다.
“상태창은···.”
“그것부터 물어보실 줄 알았습니다. 사실 저는 그냥 평범하게 병원에서 살다가 죽을 줄 알았거든요.”
치료할 수 없는 병이었다.
병원에서 생활하며 유일한 낙은 게임뿐이었다.
“안 해본 게임이 없었어요. 집이 꽤 넉넉해서 아이템 지르는 것도 부담이 없었죠.”
그건 나도 알고 있다.
거의 모든 게임에서 랭킹에 들어있었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항상 온라인에 있던 소년.
그는 과거부터 존재하던 거의 모든 컨텐츠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형님께는 고마웠어요. 돈으로 바르지 못하는 게임은 처음이었거든요.”
진짜 실력으로 해야 하는 게임.
그게 김정훈의 흥미를 끌었다.
슬슬 그도 고인물화 되어가고 있을 때 쯤.
김정훈의 병실에 누군가 찾아왔다.
“멀린이라 하더군요. 처음엔 미친 사람인 줄 알았어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로브를 입고 지팡이를 든 외국인이 병실에 나타나면?
‘정신과 병동을 탈출한 사람인 줄 알았겠지.’
손을 한번 휘두른 게 끝이었다.
김정훈, FCCB는 지구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