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aughter Is the Final Boss RAW novel - Chapter (107)
107화
유은혜는 낯선 공간에 있었다.
누런 하늘 아래,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죽음 같은 적막 너머로 비명이 들려왔다.
자연재해가 휩쓸고 간 듯한 풍경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공간이었음에도 묘하게 익숙했다.
‘여긴 어디지?’
유은혜는 의문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면서도 앞으로 향했다.
머지않아 보인 것은 한 무리의 사냥꾼들이었다.
같은 슈트를 입고 있는 걸로 보아 모두 같은 길드 같았다.
대부분 검을 들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선두에 선 건 유은혜도 아는 얼굴이었다.
성수현, 길드 기사단의 길드장이었다.
“유은혜. 살아 있었군. 다행이야. 쓸 만한 사냥꾼이 하나라도 더 남아 있어서.”
유은혜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섞어 본 적도 없었는데, 목소리를 듣자마자 기분이 나빠졌다.
성수현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지만, 싫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어째선지 눈앞의 성수현은 가증스럽게만 보였다.
“자. 전열 정비하고, 놈을 쫓는다.”
“너무 위험해요. 이미 후퇴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공략은 실패예요.”
유은혜는 차분하게 반박했다.
그러나 성수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니. 놈은 치명상을 입었다. 우리가 할 일은 마무리뿐이야.”
“그게 될 것 같아요? 치명상은커녕, 우리 힘으로는 생채기도 낼 수 없어요.”
“여기 있는 떨거지들은 불가능하지만, 너랑 나라면 가능해.”
성수현은 태연하게 자신의 길드원들을 떨거지 취급했다.
다른 길드원들은 익숙한지 반박조차 하지 않았다.
유은혜는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었다.
‘이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거야? 미쳤어.’
성수현은 놈에게 치명상을 줄 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건 유은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유은혜는 주변을 둘러봤다.
고층 건물이 무너져 있었고, 땅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도저히 괴물 한 마리가 지나간 흔적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건 괴물이 아니라 재해예요.”
“자연재해를 막는 거야. 그래서 의미가 있는 거고.”
“전 할 수 없어요. 성수현 씨 혼자 하세요.”
유은혜는 집에 두고 온 설아를 생각했다.
사실 이곳에 오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성수현의 무리한 독단을 따르라니.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성수현은 유은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할 수 없나?”
“네. 집에서 애가 기다려서요. 이런 데서 죽을 수는 없어요.”
“그 애가 문제일 텐데. 마지막으로 묻지. 정말 할 수 없나?”
“……하.”
유은혜는 한숨을 내쉬었다.
성수현의 질문에는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래도 다른 길드원들이 있다는 걸 의식했는지, 직접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유은혜는 간단하게 성수현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진짜 애를 위한다면, 성수현의 명을 거부할 권리는 없다.
‘설아가 마법사라는 사실만 몰랐더라면.’
성수현은 우연한 계기로 설아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것이 유은혜의 약점이라는 걸 깨닫고, 이용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서준은 자신의 딸이라서 그런지, 이 사실을 악용하진 않았다.
비록 유은혜와 설아를 받아들이진 못했지만, 이에 대한 비밀은 엄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최악.’
이 약점을 빌미로 계약 조건을 터무니없는 수준으로 조정했다.
무리한 스케줄을 강요하는 건 물론이고, 고사하던 방송에도 억지로 나가야 했다.
사실 이번 공략도 유은혜에게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유은혜는 그저 설아와 함께 조용히 살 수 있을 정도의 수입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성수현의 야망은 그렇지 않았다.
유은혜의 재능을 알아보고, 약점을 이용해 철저하게 이득을 취하고자 했다.
‘아까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유은혜는 난생처음으로 사람에게 살의를 느꼈다.
성수현은 대비책으로, 자신의 측근인 허만수에게 설아에 대한 사실을 전달해 놓은 상태였다.
애초에 유은혜는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한 위인이 되지 못했다.
활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을 감고 화를 삭이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참여하겠습니다.”
“그렇게 나왔어야지.”
성수현은 만족스럽다는 듯 피식 웃었다.
다른 길드원들은 이런 질문도 필요 없었다.
아마 이 길드원들 대부분이 불공정한 계약서에 사인했거나, 약점을 잡혔을 거다.
성수현은 그런 인물이었다.
“가지. 따라오도록.”
성수현은 어둠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길드원들은 체념한 듯 그 뒤를 따랐다.
유은혜는 그 자리에 서서 상념에 잠겼다.
‘금방 돌아갈게.’
설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공략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짐을 굳힌 유은혜는 죽음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애옹.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유은혜는 이른 새벽에 깨어났다.
훈련 때문에 평소에도 일찍 일어나는 편이긴 하지만.
오늘은 그보다 한발 앞서 이서준이 깨는 시간에 일어났다.
“우응.”
옆에 있던 설아가 잠꼬대하며 뒤척거렸다.
유은혜는 몸을 일으키고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냈다.
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악몽?’
유은혜는 인상을 찡그리고 이마를 짚었다.
이서준과 만난 이후로 쭉 기분이 괜찮았는데.
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악몽 탓인 것 같았다.
‘뭐였지?’
하지만 되짚어 봐도 여전히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평소에 좀처럼 꿈을 꾸지 않는 유은혜다.
그런데 연달아 악몽을 꾸다니.
‘요새 좋은 일만 있어서 그런가?’
튜토리얼 타워를 무사히 공략하고, 수입도 안정을 찾았다.
단순히 이서준이라는 사람이 개입한 것뿐인데.
기묘하게도 일이 술술 풀리는 기분이었다.
‘불안한가 보네.’
너무 좋은 일만 생기면 오히려 불안한 법이다.
어쩌면 유은혜도 무의식적으로 반대급부 격인 일을 떠올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눈을 붙여 보려고 했지만, 잠은 완전히 달아난 후였다.
유은혜는 세수라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컥.
문이 열리고, 이서준과 눈이 마주쳤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이었는지, 이서준은 머리를 말리며 나오다가 흠칫 놀랐다.
“깜짝이야. 왜 벌써 일어났어?”
“어? 아니, 그냥 갑자기 눈이 떠지네.”
“괜찮아? 악몽 꿨어? 땀 좀 봐.”
이런 데서는 묘하게 눈치가 좋다.
이서준은 유은혜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신기하게도, 그것만으로 조금 기분이 괜찮아졌다.
“괜찮아. 그냥 꿈자리가 뒤숭숭했던 거야.”
“그래? 여기 터가 안 좋은가. 이사 갈까?”
“어떻게 결론이 그렇게 나와.”
“갈 만한 돈이 모였으니까 생각 중이었거든. 집이 좁기도 하고.”
이서준은 아주 자연스럽게 설아와 유은혜가 같이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작 유은혜는 잠시 의탁할 생각으로 온 건데.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뭐라 말을 하려는데, 아래로 눈이 갔다.
‘……얘 몸이 이렇게 좋았었나?’
이서준은 상의를 입지 않고 있었다.
운동을 제대로 시작한 건 몇 주 안 됐을 텐데.
운동 강도 때문인지, 아니면 사냥꾼이 된 덕분인지.
이서준의 몸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이 시간에 유은혜와 설아는 보통 자고 있다.
이서준도 그것 때문에 편하게 샤워하고 나온 것 같았다.
다행히 바지는 입고 있었지만 말이다.
“변태.”
“뭐, 뭐래!”
이서준은 새초롬한 표정으로 양팔을 교차해 제 몸을 가렸다.
너무 빤히 봤던 걸까, 유은혜는 당황해서 큰 소리를 냈다.
이서준의 입가에는 예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애 깨겠다.”
“으, 비켜. 나 들어가게.”
“샤워할 거야? 같이 들어갈까?”
이서준은 길을 비켜 주면서도 기회라는 듯 알짱거렸다.
유은혜는 분하다는 듯 이서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게 아주 한 번 이겨 먹었다고 신나선.”
“아, 알았어. 안 할게.”
“후우.”
“보기만 할게.”
“야!”
유은혜의 언성이 높아지자, 이서준은 재빨리 도망쳤다.
한없이 어른스러운 면모도 보이지만, 자주 저렇게 유치한 모습을 보인다.
유은혜는 이서준이라는 사람을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세면대 앞에 선 유은혜는 숨을 골랐다.
여간 당황했는지 귓바퀴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익. 두고 보자.’
요즘 이서준을 가끔 놀렸다고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복수를 감행할 줄은 몰랐다.
유은혜는 세면대를 잡고 분한 듯 떨었다.
찬물이 얼굴에 닿으니 금방 분한 마음도 사그라졌다.
“재는 언제 철이 들려고.”
대학 때보다는 훨씬 나아졌지만, 아직 철부지긴 한 모양이다.
세면대 거울에 비친 유은혜는 어느새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찝찝하기 그지없었던 악몽에 대한 기억은 이미 다 사라진 후였다.
* * *
나와 은혜는 번갈아 가며 설아를 본다.
큰 감정의 변화만 없다면, 설아는 스스로 마법을 조절할 수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상황은 나아졌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애옹.
먼저 추가된 반려묘, 스승님이 걸렸다.
관찰한 결과, 스승님은 사람에게 우호적이고 매우 온순한 편이었다.
냥아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고양이 중에는 성깔 더러운 녀석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스승님은 흔히 말하는 ‘개냥이’였다.
생전 처음 보는 고희연이 손을 내밀어도, 가까이 다가가 몸을 비비적거릴 정도였으니까.
‘묘하게 설아랑 닮은 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잠도 많아서, 낮의 절반가량은 식빵을 구우며 잠을 잔다.
좀처럼 발톱을 세우지도 않고, 높이 있는 물건을 떨어트리지도 않았다.
이게 고양이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다만 설아가 발톱에 다칠 가능성도 있기에, 이 부분은 유의하고 있었다.
설아가 의식만 한다면 고양이는커녕 호랑이가 와도 안 다칠 테지만 말이다.
‘그리고 로브.’
일단 에르제베트의 말도 있고 해서 로브를 설아에게 주긴 했지만.
마녀의 로브는 마법을 사용하기도 하는 아티팩트다.
설아는 로브와 친해 보이긴 했지만, 당분간은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오늘은 엄마랑 아빠 둘 다 안 나가요?”
“일요일이잖아.”
“일요일 조아~ 최고로 조아~.”
설아는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기분 좋다는 티를 냈다.
은혜와 내가 설아에게 충실하기로 약속한 날이다.
요컨대 오늘은 일을 쉰다.
심지어 훈련도 쉰다.
휴식도 훈련의 일환이라는 걸 생각하면, 훈련 중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간에 일요일은 가급적 설아와 함께 보내려고 하고 있었다.
설아도 엄마와 아빠를 매번 번갈아 가면서 보면 좋지 않을 테니까.
“아. 내 정신 좀 봐.”
“왜 그래?”
냉장고를 확인하던 은혜가 몸을 살짝 비켰다.
유난히 텅텅 빈 냉장고가 눈에 들어왔다.
은혜가 집에 온 이후로는 항상 들어차 있던 냉장고다.
웬일로 장 보는 걸 깜빡한 모양이었다.
“새벽에 봤던 것 때문에 뭐가 머릿속에 안 들어와?”
“새벽에 봤던 거……?”
“내가 좀 치명적이긴 하지.”
“……너어, 옆에 설아 없었으면 한 대 맞았어.”
나는 설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 돌리는 거 맞았다.
“설아야. 맛있는 거 먹을래?”
“떡볶이?”
“아니! 치킨!”
“치킨?”
설아가 그게 뭐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난 큰 충격을 받았다.
“설아, 치킨 안 먹어 봤어?”
“네!”
세상에.
우리 설아는 아직 치느님을 영접해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은혜야.”
“응?”
“오늘 점심은 치킨으로 하자.”
“치킨? 시켜 먹자고? 시간 좀 걸릴 텐데.”
“치킨.”
“으음, 튀긴 거는 건강에…….”
“치킨.”
“어, 응. 알았어. 치킨 먹자. 그래.”
묘하게 압도됐는지, 은혜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