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aughter Is the Final Boss RAW novel - Chapter (197)
197화
에르제베트는 눈을 떴다.
물속에서 오래 숨을 참던 사람처럼 힘겹게 숨을 내뱉었다.
찰나의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
함성이 환청처럼 귓전에 메아리쳤다.
기이하게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어?”
당시에는 독할 대로 독해져,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서러웠던 건지 응어리진 무언가 터져 버린 건지, 자꾸 눈물이 나왔다.
에르제베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트라우마 스위치(Trauma Switch). 진정하자.’
마탑주의 마법이다.
상대가 기억하는 끔찍한 기억을 꺼내 강제로 경험시키는 마법.
감정의 동요를 끌어내거나 정신을 붕괴시킬 목적으로 사용하는 악질적인 의도다.
저주에 영감을 받아서 만들어 냈다고 들었는데, 직접 경험해 볼 줄은 몰랐다.
실제로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겠지만, 에르제베트는 그 상황을 방금 겪고 온 느낌이었다.
스스로는 이미 잊어버렸다고, 의연히 이겨 냈다고 했지만.
‘빌어먹을.’
감정의 통제라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호흡이 흐트러짐에 따라, 마나 컨트롤에도 지장이 갔다.
비록 빠르게 정신을 붙잡고 마법을 사용하려 했다.
감정의 동요 때문에 지체된 건 불과 1초도 안 되는 시간.
그러나 그 1초도 안 되는 시간은, 승부를 가르기에 충분했다.
쾅!
땅에서 튀어나온 기사단장이 에르제베트를 붙잡았다.
날려보냈던 현상금 사냥꾼은 어느새 제자리로 복귀해, 에르제베트의 목에 검을 겨눴다.
그리고 마법을 무효화시킨 마탑주는, 에르제베트의 이마에 또다시 손을 올렸다.
죽음 대신 찾아온 것은, 지독할 정도로 짙은 수마였다.
강도 높은 슬립(Sleep)에, 에르제베트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예언가와 성기사를 죽이는 데 힘을 꽤 소진했다더니. 진짜였군.”
“어떻게 살아난 건지 모르겠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한 힘을 잃어버린 것 같군.”
“아아, 아…….”
“맞다. 애초에 이 정도 전력으로는 어림없었을 테지. 군대라도 끌고 와야 하나 싶었는데.”
마탑주는 박수찬 쪽으로 눈을 돌렸다.
박수찬은 멀뚱히 서 있었다.
“우리처럼 제약에 걸려 있는 게 사실이었던 모양이군.”
“그분께서 거짓말을 하실 리 없지 않습니까.”
“어쨌든 우리는 계약을 이행했다.”
“먼저 넘기시지요.”
박수찬은 에르제베트를 넘기라는 듯 손을 내밀었으나.
기사단장과 마탑주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일단 거래했다고 하나, 상대의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 전에, 네가 첫 번째 계약을 일으킬 힘이 있을지가 궁금한데.”
“세 분을 이곳에 불러들였지 않습니까? 더 증명이 필요한가요?”
“고작 셋을 불러오는 것과, 군대를 끌어오는 건 다른 이야기지.”
“걱정하시는 바는 이해했습니다. 거기 언데드님, 이쪽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박수찬의 말에, 현상금 사냥꾼은 에르제베트에게서 검을 거뒀다.
마탑주와 기사단장을 번갈아 보며 시선을 교환하더니, 박수찬에게 다가갔다.
박수찬은 현상금 사냥꾼의 단검을 잡아, 제 목에 끝을 겨눴다.
“제가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바로 찌르시지요.”
“대단한 자신감이군.”
“저한테는 그럴 힘이 없지만, 그분께는 있으니까요.”
마탑주는 박수찬의 눈에 서린 광기를 얼핏 읽었다.
바란다면 기꺼이 목숨마저 헌납할 수 있는, 맹목적인 믿음.
주로 이단자가 보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이런 자와 계약한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자누스가 사냥당한 지금, 달리 방법이 없었다.
“풀어 주도록.”
마탑주의 말에, 기사단장은 움켜쥐고 있던 에르제베트를 놓았다.
몸은 쓰러지는 대신, 무언가 지탱한 듯 부드럽게 떠올랐다.
박수찬은 간단하게 균열을 열어, 에르제베트를 안쪽으로 보냈다.
세 마리의 괴물들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균열이 닫히자, 박수찬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 한 가지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습니다.”
“뭐? 인제 와서 말을 바꿀 셈은 아니겠지?”
“설마요. 다만,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제물이 필요하다 하십니다.”
“제물? 뭐, 제물이야 얼마든지 준비할 수 있지. 어느 정도 필요하다 하나? 백? 천?”
“아니요. 그리 많이는 필요 없고, 강한 힘을 가진 셋 정도면 충분하다 하십니다.”
“셋?”
마탑주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 순간, 박수찬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강한 힘을 가진 셋이라 하면, 이곳에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가장 먼저 이상을 보인 것은 가까이 있는 현상금 사냥꾼이었다.
퍽.
뼈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터졌다.
눈을 부릅뜬 마탑주는 옆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한 수압에 눌려 찌그러지듯, 기사단장이 입고 있던 갑옷이 안쪽으로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끼긱! 끼긱!
팔다리가 기괴하게 뒤틀린다.
얼마나 강한 힘이 짓누르는 건지, 기사단장은 반항조차 못 해 보고 찌그러져 죽었다.
마지막 남은 건, 마탑주였다.
* * *
.
마녀, 에르제베트의 처형일.
수많은 사람이 그 최후를 지켜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예언가를 비롯한 각국의 유명 인사는 물론, 왕족들까지 모인 국가 단위의 행사가 됐다.
마탑주는 각국의 사절과 마녀사냥에 공헌한 사람들 사이에 당당히 서 있었다.
두 번째 단상, 왕족들 아래 단두대가 가장 잘 보이는 위치였다.
혹시 모를 상황에 마녀를 제압하는 역할도 지니고 있어, 꽤 긴장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다행히도, 처형 진행에 큰 차질은 없었다.
마녀는 오랜 기간 감옥에서 힘을 빼놓은 데다가, 몸과 정신이 많이 무너진 상태.
저항할 힘은커녕 유언을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렇기에 마탑주 또한 크게 나설 일이 없다고 판단하고, 기다렸다.
세상을 멸망시키는 데 실패한 마녀가 마지막으로 내뱉을 말.
예언을 파훼한 역사적인 순간에, 그것을 직접 듣고 싶었다.
“……전부 괴물이야.”
마녀, 에르제베트는 그렇게 말했다.
침묵이 깨지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누구보고.”
“가증스러운 년.”
천박한 욕지거리가 섞여 있었다.
만약 허가됐다면, 군중 대다수가 마녀에게 돌팔매질했을 것이다.
마탑주도 체면을 생각하여 굳이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같은 마음이었다.
홀로 군대를 꺾고, 수십 년이라는 시간을 도망친 괴물이 바로 마녀였다.
그 손에 죽은 수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마녀 핑계를 못 대는 건 조금 아쉽지만.’
마탑주는 이따금, 비인도적인 행위를 마녀의 짓으로 돌리곤 했다.
이를테면 실험 차원에서 타국의 마을 하나를 무너트렸을 때도.
괴물과 괴물을 엮어 만들어진 키메라가 탈출했을 때도 그랬다.
아마 공공연하게 그런 사람이 비단 마탑주뿐만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상대는 인간이 아닌 괴물이었기에, 미안한 마음도 없었다.
“……집행하라.”
국왕의 명령이 떨어지고, 단두대가 작동했다.
마녀가 목이 잘려 죽음과 동시에, 희열에 찬 환호가 쩌렁쩌렁 울렸다.
멸망을 막아 낸 국왕을 칭송하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깔끔하게 진행된 처형에, 마탑주는 만족했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
20년에 달하는 추적도.
마녀로 인해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도.
마탑주가 마녀를 통해 덮었던 온갖 행위들도 모두 끝이었다.
후련한 마음에, 마탑주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까지도 마탑주는 몰랐다.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끄아아아아아아아악!”
함성에 묻혀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고통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놀란 듯한 사람들이 새된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꺄아악!”
“괴물이다!”
군중 사이에서, 괴물 한 마리가 튀어나온 것이었다.
마탑주는 인상을 찡그렸다.
왕족도 있는 자리인 만큼, 보안은 철저하게 했을 텐데.
어찌 수도 한복판에 괴물이 들어왔단 말인가.
‘마녀가 풀어놓은 건가.’
사람이 몇 죽고, 혼란이 좀 생기긴 하겠지만.
최후의 발악치고는 귀여운 수준이었다.
기사단장이 수신호를 보내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곧바로 출동했다.
그러나, 그건 정말 시작에 불과했다.
꾸륵.
바로 옆에서 불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탑주는 인상을 찡그리며 시선을 돌렸다.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던, 뚱뚱한 부호였다.
이번 처형 기획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나, 품성은 좋지 않다.
아이들을 사들인다는 뒷소문이 있는 자였다.
처음에는 배탈이라도 났겠거니 생각했다.
꾸르륵.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부호는 눈을 뒤집고 발작하기 시작했다.
놀란 이들의 시선이 부호에게 쏠렸다.
머지않아, 부호의 목 안쪽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기다랗고 두꺼운 혀였다.
“끄에에엑.”
기이한 단말마와 함께, 서서히 부호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배는 터질 듯 부풀어 올랐고,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서 물갈퀴가 자라났다.
터져 버린 옷 너머로 보이는 등짝에서 둥근 혹이 오돌토돌 자라났다.
그것은 거대한 두꺼비의 모습을 한 괴물, 겔릭으로 변했다.
“흐아아아악!”
놀란 이들이 물러났고, 기사단장이 검을 뽑고 겔릭과 대치했다.
마탑주는 군중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수많은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방금까지는 멀쩡했던 사람들이 괴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불현 듯 머리를 스쳐 지나간 것은, 마녀의 마지막 말.
‘저주.’
언젠가 들었던 말이다.
마녀의 마지막 저주는, 그 어떤 저주보다 강한 힘을 가진다고.
괴물이 된 사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는 단상에 있던 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탑주!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마녀의 저주 같습니다! 당장 자리를 피해야!”
옆에 있던 귀족에게 눈을 돌렸다.
마탑주에게 말을 건 귀족은 이미 몸이 무너지기 시작한 상태였다.
인상을 찡그린 마탑주는 귀족을 마법으로 죽였다.
서걱!
마탑주는 자기만이라도 몸을 빼려고 했다.
국왕이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물러나는 게 보였다.
그러나, 이미 저주는 떨어진 뒤였다.
“어어어억!”
손끝에서 느껴진 통증에, 마탑주는 무심코 비명을 질렀다.
손가락이 액체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법으로 어떻게 차단해 보려고 했지만.
이미 몸 전체가 조금씩 녹아 가고 있었다.
신체가 있던 자리에는 검은 그림자만이 남았다.
“이……건.”
성대가 녹았는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마탑주는 로브를 걷어 자신의 팔을 확인하며, 끔찍한 참상을 마주했다.
광장에 있던 대부분 군중이 괴물의 모습으로 변해, 서로 엉켜 목 놓아 울었다.
개중에는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다른 괴물을 물어뜯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세상의 멸망과 같은 광경이었다.
‘예언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단 말인가.’
마탑주는 허망한 듯 지옥도를 바라봤다.
이윽고, 끔찍한 고통과 함께 피부가 전부 녹아내렸다.
그렇게 예언은 실현됐다.
마녀가 최후로 내뱉은 저주는, 끝내 미드하임은 멸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