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aughter Is the Final Boss RAW novel - Chapter (212)
212화
유은혜는 새하얀 공간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내 공간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벽이 세워졌다.
가구가 하나하나 들어오고, 서서히 집은 익숙한 풍경으로 변했다.
과거, 이서준의 자취방이었다.
공로를 인정받은 덕분에, 이서준과 유은혜, 설아는 큰 집 한 채를 받아 그곳에 살고 있었다.
꽤 오랜 기간 머무르긴 했지만, 밖에 나가 있는 경우가 많아 좀처럼 집 같은 느낌이 없었다.
“와.”
오랜만이었다.
신기하게도 여기가 제일 익숙하고 편한 느낌이었다.
유은혜는 기억 그대로 재현된 자취 집을 둘러보다가, 의자에 앉았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니, 또 다른 유은혜가 나타났다.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입니다.”
문득 유은혜는 또 다른 유은혜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짐작했다.
유은혜는 최근 좀처럼 양도를 사용하지 않았다.
위험할 때는 가끔 사용하긴 했지만.
스킬을 사용하다 보니, 또 다른 유은혜에게 의존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자신의 스킬이라지만, 스스로 위기를 넘으며 성장하는 것도 필요하다 생각했다.
‘그렇다면, 또 다른 나는.’
계속 이 공간에 갇혀 있는 걸까.
지레짐작이었지만, 측은지심이 들었다.
“가끔 양도를 쓰는 게 좋을까요?”
“배려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또 다른 유은혜는 유은혜의 생각을 모두 읽고 있었다.
그 덕분에, 유은혜가 자신을 배려한 것이라는 것도 눈치챘다.
“제가 도와줄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지금처럼 개인의 성장을 도모해야 합니다.”
딱 한 번뿐이었지만.
또 다른 유은혜는 유은혜의 스킬에 응답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를 말하는 것이리라 생각한 유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불러 주신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유은혜,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제안이요?”
유은혜는 어리둥절한 눈을 깜빡였다.
또 다른 유은혜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기껏해야 설아를 보고 싶다고 한 게 전부였다.
완전히 또 다른 유은혜를 신뢰하게 됐을 때, 유은혜는 설아 앞에서 몸을 양도한 적이 있다.
또 다른 유은혜는 가만히 설아를 지켜보다가, 몇 초 지나지 않아 유은혜에게 몸을 돌려줬다.
그때 이후로는 어떤 요구도 제안도 먼저 한 적이 없었는데.
“뭐든지 괜찮아요.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자신의 스킬이지만, 유은혜는 또 다른 유은혜를 인격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을 도와준 걸 고마워하고 있었는데, 감사를 표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유은혜는 자신을 위한 제안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에르제베트에 대한 겁니다.”
“에르제베트 씨를 아세요?”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니까요.”
유은혜가 에르제베트를 알게 된 것은 튜토리얼 타워 한참 이후다.
스킬을 획득한 것은 튜토리얼 타워 때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에르제베트의 행방을 알고 있습니다.”
“……네? 정말요?”
“예. 그렇습니다.”
유은혜의 안색이 밝아졌다.
에르제베트는 현재 행방불명된 상태.
이서준이 이를 애타게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또 다른 유은혜가 에르제베트의 행방을 안다면.
에르제베트의 안전도 확보하고, 이서준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에르제베트 씨는 무사한가요?”
“신체적으로는 어떤 무리도 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정신적으로 내몰린 상황 같습니다.”
“정신적으로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흔히 말하는 PTSD의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유은혜는 심각한 얼굴이 됐다.
다치거나 죽지 않은 건 좋은 소식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신이 불안정한 것 같았다.
“여태까지 연락이 없었던 건.”
“에르제베트는 현재 힘을 잃고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갇혔다고요? 어디에요?”
“여기서 제안입니다.”
또 다른 유은혜는 지금부터 본론이라는 듯, 책상에 양손을 올리고 깍지를 꼈다.
“에르제베트의 행방을 알려 드린다면, 당분간 스킬 ‘양도’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네? 어째서…….”
“저는 몸을 양도받아 돕는 역할을 할 뿐, 이런 정보의 전달은 원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유은혜는 인상을 찡그렸다.
또 다른 유은혜를 믿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자신의 스킬임에도, 아직 또 다른 유은혜는 의문투성이였다.
그러고 보면, 에르제베트의 현재 상황과 위치는 어떻게 알았던 걸까.
“그렇기에 정보를 전달할 시, 당분간 양도를 사용할 수 없을 겁니다.”
“……괜찮아요. 말해 주세요.”
당장 유은혜가 가진 비장의 카드가 사라지는 셈이었지만.
유은혜는 그것보다 에르제베트의 안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에르제베트는 유은혜에게 있어서 은인이었다.
이서준도 도왔고, 설아를 가르치고 지켜 주기까지 한 고마운 사람.
도울 수 있다면 돕고 싶었다.
또 다른 유은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유은혜. 에르제베트는 당신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인물입니다.”
“네? 그거야 그렇죠. 서준이의 은인이고, 설아도 도와줬고…….”
“저는 당신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유은혜는 인상을 찡그렸다.
또 다른 유은혜는 곧 자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유은혜. 당신은 대학교에 입학하기 이전의 일을 기억합니까?”
“……아니요.”
여태껏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유은혜는 대학교 이전의 일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도, 유년기나 학창 시절의 기억도 없었다.
“하나도요.”
병원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억상실증이라고 했다.
물론 유은혜도 자신의 기억을 찾으려고 해 본 적이 있었다.
확인한 결과, 부모님은 붕괴 당시 모두 사고로 사망 처리되어 있었다.
친척은 없었고, 출신 학교도 찾아가 봤지만, 유은혜를 기억하는 동창은 없었다.
유은혜는 이것이 자신의 결함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이서준에게 숨겼다.
-그럼 반대로 기억을 되찾는 약 같은 건 없을까?
이서준이 암네시아를 사용할 때 넌지시 물어봤으나, 부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튜토리얼 타워에서 포인트 상점을 통해 기억을 되찾으려고도 했지만.
결국 포인트 부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에르제베트를 찾으십시오.”
“네?”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반 정도는 포기하고 있던 일이었다.
유은혜는 지금의 삶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었다.
비록 대한민국의 던전화로 불안하긴 했지만.
이서준, 설아와 함께 사는 건 행복했다.
그렇기에 굳이 관계를 바꾸려고 하지 않고, 유지되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공간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또 다른 유은혜는 조금 급하게 말을 마쳤다.
“눈을 뜨면, 에르제베트의 위치를 알 수 있을 겁니다.”
* * *
수색팀 백재현은 생각했다.
이서준은 참 특이한 사람이다.
“하아.”
하얗게 새어 나온 입김마저 얼어붙을 것 같은 추운 겨울.
모두 빨개진 코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와중에도, 가장 앞서가는 이서준은 멀쩡해 보였다.
안전지대 성북을 최초로 구상하고, 앞장서서 형성하기도 한 인물.
그에게 구해진 사람의 수는 한둘이 아니었다.
수색팀의 오더를 맡고 있기도 해서, 팀 내에서는 대장이라 불리고 있었다.
팀원들이 보내는 존경의 표시였다.
“대장은 안 추워요?”
“추운 건 익숙해서.”
“시베리아 같은 데서 살다 오셨나.”
“그럴 리가.”
이서준은 이상하리만치 추위에 익숙한 모습을 보였다.
겨울은 언제나 보다 추웠고, 온도는 분명 영하를 기록했다.
항상 가장 많이 움직이기 때문에 몸에 열이 나는 건가 싶었지만.
백재현은 아무리 열심히 움직여 봐도 추위에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장은 굳이 수색팀에서 활동할 필요 없지 않습니까?”
최근 수색팀에 들어온 막내 하나가 질문했다.
그 역시 백재현처럼 이서준의 손에 구출된 사냥꾼이었다.
이서준의 사정을 모르는 만큼,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성북에서 이서준의 지위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수준으로 대단했다.
실질적으로 성북을 구축한 장본인.
거의 모든 사람이 이서준을 알았고, 그중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항상 최전방이라고 할 수 있는 수색팀을 이끌며, 사람들을 구해 내기까지 한다.
성북의 인구 중 절반 정도는 이서준에게 구출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바보야. 조용히 해.”
“왜요?”
“대장은 찾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
“찾고 있는 사람이요?”
“그래.”
이서준은 한 번도 자신의 입으로 사정을 밝히지 않았지만.
수색팀은 이서준이 사람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걸 알 수밖에 없었다.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지위에 있음에도 매번 수색에 나서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누구요?”
“아마도…… 유성.”
“유성? 아자누스 사냥꾼 말입니까?”
“그래. 그 유성이 대장 여동생이다, 이 말이야.”
“아. 허, 그러고 보니 이름이 비슷하네요.”
백재현을 비롯한 수색팀은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유성, 이서윤은 이서준의 여동생으로,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최근 교류가 있었던 고려검가에서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찾고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실제로 이서준이 찾고 있는 건 에르제베트였으나, 그들이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안 그래도 6개월이나 못 찾아서 심란하실 건데, 괜히 얘기 꺼내지 마.”
“넵.”
백재현은 막내에게 입조심을 시켰다.
이번 수색은 정기적인 정찰이었다.
주변에 괴물이 있는지 확인하고, 있으면 제거한다.
겸하여 성북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오는 생존자를 수색하고 구출하는 게 임무다.
아무래도 던전화 이후로 꽤 시간이 지난 터라 오늘은 생존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돌아가죠.”
“끝입니까? 휴! 철수랜다!”
“으갸갹!”
“홈, 스윗 홈.”
이서준의 오더가 떨어지자, 수색팀은 반색했다.
모두 누가 시켜서 한 일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수색팀에 들어온 것이긴 했지만.
이토록 추운 날씨에 오랜 시간 바깥을 돌아다니는 건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색할 때보다 부지런하게 걸어, 성북 경계에 도착했다.
“수색팀 돌아왔습니다.”
넓고 높은 벽이 성북을 두르고 있었다.
경비를 서던 사냥꾼들이 경례하며 문을 열어 줬다.
벽 위에서 누군가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이서준이 벽 위의 인물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별일 없으시죠?”
“어! 서준이! 정찰 잘 다녀왔냐!”
“예. 추운데 작업해도 괜찮으세요?”
“괜찮아. 사람은?”
“오늘은 없네요.”
“고생했다. 들어가 쉬어.”
“아저씨도 수고하세요.”
“오냐!”
곽두팔.
안전지대 성북의 모든 벽을 총괄 담당하고 있는 건축 책임자였다.
비전투 직업, 건축가들을 비롯해 많은 일반 인부들도 그의 아래에 있었다.
그가 부단히 노력한 결과로, 성북은 이렇게 커다란 벽을 두르고 있는 안전지대가 된 것이다.
이서준이 영입했다는 말이 있는데, 그만큼 친해 보였다.
“아! 저기, 기다리더라.”
“네? 누가요?”
“얼른 가 봐!”
이서준은 곽두팔의 말에 따라 성북 안쪽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걸 본 수색팀은 탄식을 내뱉었다.
“하아. 부럽다.”
“누군 기다려 주는 예쁜 마누라도 있고.”
“마누라 아니라니까.”
“젠장. 대장. 언제 계급장 떼고 한판 뜹시다.”
“옆구리가…… 시리다.”
큰 보온병을 든 유은혜가 보였다.
이서준은 매번 부정하긴 하지만.
둘이 사실혼 관계에 가깝다는 건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유은혜 옆에는, 무언가 털 뭉치 같은 게 오도카니 서 있었다.
“압빠!”
옷을 몇 겹으로 껴입어, 파묻힌 펭귄 같은 모습을 한 설아였다.
목도리가 목과 입까지 돌돌 말고 있는 탓에, 발음이 조금 뭉개졌다.
설아는 이서준을 향해 뚱땅뚱땅 열심히 걸어오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풀썩 엎어졌다.
마침 눈이 쌓여 있어 다치진 않았지만, 눈 속으로 폭 파묻혀 사라져 버렸다.
“풉.”
“아이고.”
“저게 저래 쏙 들어가 버리네.”
고된 수색으로 힘들었던 정신과 몸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수색팀은 설아를 귀여운 조카처럼 여기고 있었다.
심심치 않게 장난감 같은 걸 챙겨 와 설아에게 쥐여 주는 팀원도 있었다.
“괜찮아?”
이서준은 눈 속에 파묻힌 설아를 캐내듯이 번쩍 들어 올렸다.
머리카락과 얼굴에 묻은 눈을 털어 주자, 설아가 해맑게 웃었다.
“으헤헤. 차갑따.”
“안 다쳐서 다행이네. 조심히 걸어야지.”
이서준이 딸 바보인 건 익히 알았기에, 수색팀은 유은혜 쪽으로 갔다.
유은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따라서 수색팀에게 나눠 줬다.
“수고하셨어요.”
“아닙니다. 사모님.”
“사모님이라뇨.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대장 엉덩이 좀 차 드릴까요? 사냥꾼으로는 존경할 만하지만, 남자로서는 너무 괘씸한데.”
“농담도.”
백재현은 차를 홀짝였다.
조금 뜨겁지만, 몸을 녹이기에는 딱 좋은 온도.
시렸던 목구멍을 타고 따뜻한 차가 넘어가며, 마음까지 풀리는 기분이었다.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들긴 하지만, 질투가 난다기보단 보고 있으면 흐뭇해지는 쪽이다.
한 팀원이 장난스레 투덜거렸다.
“귀여운 딸에, 예쁜 아내에. 아주 세상 혼자 다 가지셨어.”
“그러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