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aughter Is the Final Boss RAW novel - Chapter (226)
226화
문 너머로 보인 것은 새까만 방이었다.
원념이 뚝뚝 묻어나는 새까만 저주로 들어찬 공간.
침대에는, 에르제베트가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앉아 있었다.
설아가 에르제베트를 불렀다.
“스승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까.
에르제베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상황을 주시하던 고희연이 넌지시 은혜에게 물었다.
“저분 맞아요?”
“맞는데, 상태가 조금 안 좋은 것 같네.”
섣불리 접근하는 건 위험했다.
설아에 의해 침대까지 후퇴한 저주는, 똬리를 튼 뱀과 같은 모양새로 우리를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저 저주에 닿으면 좋은 꼴은 못 볼 게 뻔했다.
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에르제베트를 불렀다.
“에르제베트?”
정신을 잃어버린 걸까.
퀘스트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는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꺼져.”
상대하기 싫다는 듯한 어조.
설아는 놀란 듯 멈춰 섰고, 나 역시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기껏 구하러 왔는데, 꺼지라니.
에르제베트는 고개를 들었다.
푸석푸석한 머리카락과 생기가 죽은 눈.
내가 알던 에르제베트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
“내가!”
다 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른다.
소리칠 힘도 없는지 색색거리며, 증오심 서린 눈으로 나를 본다.
설아도 겁에 질린 듯 조금씩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또 속을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하지 말라고!”
에르제베트가 악을 쓰는 것과 동시에, 저주가 폭발했다.
스멀스멀 에르제베트의 주위를 기어 다니던 저주들이 맹렬하게 꿈틀거렸다.
저주가 가까이 있던 상대를 향해 날아들었다.
가장 앞에 있는 건, 문을 연 설아.
“설아야!”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이가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부모는 초인적인 일을 해낸다.
저주가 폭발하는 속도는 내가 반응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러나, 은혜는 그것보다 한발 빠르게 설아를 감싸 안았다.
기적에 가까운 반응 속도.
하지만, 이대로라면.
‘안 돼!’
은혜와 설아, 둘 다 위험하다.
낫을 집어삼키는 속도로 봤을 때, 몸으로 저주를 막는 건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
그때 설아가 자신을 감싸 안은 은혜 너머로 양손을 쭉 뻗었다.
“때찌!”
꾸짖는 듯한 목소리.
그러자, 신기하게도 죽일 듯이 맹렬하게 퍼져 오던 저주가 멈췄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저주는 풀 죽은 강아지처럼,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설아는 은혜에게 안긴 채 저주를 나무랐다.
“혼나!”
저주는 마법에 가까운 힘이다.
힘이 생물체도 아니고,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지만.
저주는 정말 설아에게 혼나는 게 두려운 듯 스르륵 물러났다.
에르제베트는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다.
나는 은혜와 설아를 뒤로 물리고,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스르륵.
바닥에 깔려 있던 저주가 나를 경계하듯 움직였다.
나는 모더를 뒤로 내던지고, 아무것도 없는 두 손을 보였다.
‘그때랑 똑같다.’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에르제베트는 우리를 경계하고 있었다.
튜토리얼 타워에서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겁을 집어먹었지만, 두려운 나머지 센 척을 하는 어린아이.
그때의 모습이 지금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저리 가라고 했어.”
저주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니, 내 목에 다가왔다.
뒤에 있던 설아가 나서려고 했지만, 나는 손을 들어 저지했다.
차라리 내 명줄을 쥐고 있는 편이 경계를 푸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괜찮아. 다치게 하려는 거 아니야.”
에르제베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전히 경계는 풀어지지 않았지만.
명백히 동요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도와주려는 거야. 가까이 갈게.”
발목에 수갑이 채워져 있는 게 보였다.
천천히 다가가자, 겁먹은 듯 뒤로 조금 물러난다.
에르제베트는 혼란스러운 듯 나를 가만히 노려봤다.
“진짜, 이서준이야?”
“진짜야.”
“구해 주러 온 거야?”
“아니. 나도 잡혔어.”
“뭐?”
에르제베트는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놀랐다.
그러고 보면 에르제베트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다.
이건 모르겠구나.
“농담이야. 구해 주러 왔어.”
“……진짜구나. 이상한 소리 하는 거 보면.”
저주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에르제베트는 경계를 풀었다.
나도 조금 긴장을 풀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믿어 준 모양이었다.
“하이람 씨. 톱 같은 거 있습니까?”
“수갑 끊을 만한 거? 찾아볼게.”
나는 하이람에게 도구를 받아, 에르제베트에게 다가갔다.
이번에 에르제베트는 물러나지 않았다.
보호하듯 몸을 감싸고 있던 저주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던 상처가 드러났다.
목과 손목에 상처가 맺혀 있었다.
‘고문?’
고문이라기에는 상처의 부위가 너무 제한되어 있다.
문득 보인 에르제베트의 손톱은 다 닳아 있었다.
스스로 긁은 것이다.
‘무슨 일을 당한 거야?’
6개월이다.
수갑으로 묶여 있는 데다가, 바깥의 조리 시설을 볼 때.
에르제베트는 어떤 방법으로 이 방에 구류되어 있는 것이다.
안타까움에 괜찮은 척 농담을 꺼내기도 힘들었다.
발치에 꿇어앉아, 수갑을 끊어 냈다.
침대에 앉아 있던 에르제베트는 잘 들리지 않는 소리로 웅얼거렸다.
“……이번엔, 다르구나.”
* * *
다소 소란이 있었지만, 에르제베트를 무사히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방 앞에 있던 부엌 같은 공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은혜는 식자재를 녹이더니 익숙한 솜씨로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우리는 에르제베트의 말을 들었다.
“박수찬 짓이라고?”
“응. 마지막으로 봤던 건 그놈이야.”
예상한 일이었다.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긴 하지만.
설아와 은혜에 이어, 에르제베트까지 노린 놈이다.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 와중에, 검성은 가만히 에르제베트를 바라봤다.
“에르제베트라고 했나?”
“……응. 그런데.”
“한국말이 능숙하군, 혹, 미국 사람인가?”
“아니야.”
“그렇군. 하면, 나를 알고 있나?”
“알지. 검성.”
에르제베트는 얼음 녹인 물을 홀짝였다.
식사는 꾸준히 주어졌으나, 며칠 전부터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상당히 야윈 데다가 힘도 없어 보였다.
“아자누스 때를 말하는 거지?”
“……역시. 그 마법사였군. 어째 하나도 안 늙었어.”
“어르신. 에르제베트 씨를 아십니까?”
에르제베트를 아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고마웠네.”
“감사 인사 듣자고 한 건 아니야. 네가 여기에 올 줄은 몰랐는데.”
에르제베트는 나를 흘긋 봤다.
뭘 의미하는 건진 알고 있다.
설아의 가장 큰 적 중 하나였던 검성을 끌어들인 데다가, 설아까지 데려왔으니.
설아를 끔찍이 아끼는 에르제베트로서는 불만스러웠던 모양이다.
“어쩔 수 없었어.”
변명하는 기분이었다.
고희연은 에르제베트에게 바짝 다가갔다.
“에르제베트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어, 어? 응.”
에르제베트는 심히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하긴 고희연의 거리감은 좀처럼 익숙해지기 어렵다.
“서준 오빠 말대로라면, 공간 이동도 가능한 거예요?”
“응. 가능하지.”
“헉. 진짜구나.”
다행히, 에르제베트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게 아니었다.
이 이상한 던전에 갇혀 있어서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우리 전부 서울로 이동시킬 수도 있어?”
“여기가 어딘데?”
“부산. 대한민국 남단이야.”
“그 정도 거리면 문제없어. 저번에 갔던 거기가 노르웨이거든.”
아무래도 에르제베트의 능력은 내 생각 이상인 모양이었다.
에르제베트는 품에 안겨 있는 설아를 확인하듯 매만졌다.
덕분에 설아의 볼이 찹쌀떡처럼 뭉개지고 있었지만.
설아는 오랜만에 에르제베트를 본 게 마냥 좋은 모양이었다.
“슈슝님! 이거!”
볼이 잡혀 있는 탓에 발음이 뭉개졌다.
설아는 자신이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에르제베트에게 내밀었다.
볼이 주물러지고 있던 탓에 발음이 다 뭉개졌다.
에르제베트는 얼떨떨한 눈으로 목도리를 받아 들었다.
“이게 뭐야?”
“선물!”
에르제베트의 목에 있던 상처가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무슨 애가 이렇게 기특하단 말인가.
에르제베트도 같은 생각인지, 좀처럼 웃지 않다가 처음으로 살짝 웃었다.
“고마워.”
에르제베트는 목에 목도리를 둘렀다.
조금 짧긴 했지만, 그래도 상처는 다 가려 줬다.
설아는 만족한 듯 콧김을 내뿜으며 다시 품에 안겼다.
“으헤헤. 맛있는 냄새 난다.”
“여기서 이래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
에르제베트는 불안한 듯 눈을 돌렸다.
백재현이 에르제베트를 안심시켰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여긴 지금 그린이니까요.”
“그린?”
“안전하다는 뜻이야.”
오승훈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백재현의 세이프 체크에도 뭐가 안 걸리는 걸 보면, 마음 놓고 휴식을 취해도 될 것 같았다.
에르제베트는 조금 불안해 보였지만, 먹어야 마법도 쓴다는 말에 수긍했다.
“됐다. 식사하세요.”
“잘 먹겠습니다!”
은혜는 금방 식사를 준비했다.
간단한 재료로 급하게 만든 거지만.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은혜의 솜씨 덕분인지.
음식의 맛은 상당히 좋았다.
허겁지겁 식사하던 백재현이 꿀꺽 음식을 삼키고 질문했다.
“한데, 팀장님 딸은 뭘 어떻게 한 겁니까?”
“뭘?”
“그거요. 검은 거. 마법인가? 하여튼, 그걸 물렸잖아요.”
“아티팩트야.”
“로브 말고도 아티팩트가 있습니까?”
“있어. 뭔지 밝히진 못하지만.”
당연히 그딴 거 없고, 설아의 능력이지만.
이것 말고는 변명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수직형 구조에,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기에 돌아가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에르제베트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터라 제대로 걷지 못했다.
결국 은혜와 고희연의 부축을 받으며 걷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네.”
“뭡니까?”
“보스가 없잖아.”
하이람은 당연한 의문을 제시했다.
보스의 부재.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일이다.
하지만 백재현이 확인한 던전 내부는 전부 그린.
즉, 모든 괴물을 클리어한 상태였다.
‘보스라고 부를 만한 골렘이 있었나?’
없었다.
모두 동일한 골렘이었다.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일단 돌아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문에 다다르자, 무미건조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던전 : 마녀의 은신처가 확장됩니다.] [관문이 개방되었습니다.]시스템 메시지.
관문이라는 건, 이 문을 뜻하는 걸까.
“뭐지?”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확장?”
“관문은 또 뭐야.”
사람들은 인상을 찡그렸다.
문 앞에 선 나는 조금 주저했다.
어쩌면 던전 안에 또 다른 숨겨진 공간이 있는 건 아닐까.
“일단 밖으로 나가야 해. 여기선 마나가 안 움직이니까.”
에르제베트의 말대로, 여기에 있어서 나아질 것도 없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그때 보스를 찾아봐도 늦진 않다.
문이 열렸다.
끼익.
굳게 닫혀 있던 전과 달리, 문은 확실히 열렸다.
우리는 바깥쪽, 그러니까 처음 들어왔던 구멍 아래로 다시 나왔다.
“나갈 수 있네요?”
“보스가 없는 던전인가?”
“그럼 확장됐다는 건 무슨 소리였지?”
추측이 난무했다.
나는 마나를 확인했다.
다행히 문밖이라 그런지, 제대로 움직였다.
순간 강화도 문제없었고, 스킬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르제베트. 이동 준비해 줘.”
에르제베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와중에, 나는 한 가지 의문점을 느꼈다.
‘왜 퀘스트가 안 깨지지?’
에르제베트는 분명 그 방에서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혹시 완전히 안전한 장소, 그러니까 부산 밖으로 나가야 성공인 걸까.
어쨌든 성공이나 다름없었기에, 조금 마음을 놓은 상황.
은혜가 돌연 고개를 들었다.
“어?”
그보다 한 발자국 늦게, 검성과 설아가 위를 올려다봤다.
나도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지만, 보이는 건 하늘뿐이었다.
후욱!
돌연, 머리 위에서 강풍이 터져 나왔다.
나는 팔뚝으로 앞을 가린 채 위를 주시했다.
그리고, 나는 왜 퀘스트 성공 메시지가 들리지 않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펄럭!
거대한 날개가 펄럭이며, 그것은 위쪽에 내려앉았다.
잠에서 깨어난 그것이 파충류 특유의 노란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압도감에, 사람들이 어깨를 움츠리며 본능적으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드래곤.’
거대한 용이, 목을 아래로 내린 채 우리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