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aughter Is the Final Boss RAW novel - Chapter (256)
256화
고희연은 가만히 이서준을 바라봤다.
이서준은 끝까지 고희연을 공격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제압당한 걸 볼 때, 분명 여력은 있었다.
애초에 이서준은 직업 스킬도 사용하지 않았다.
완전한 패배.
고희연은 깔끔하게 결과를 받아들였다.
‘다 설명할 수 있다고 하셨으니까, 기다리자.’
감정에 휩쓸렸다.
그 사실을 부인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의 고희연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짙고 어두운 감정이었다.
잠시나마 이성을 잃고 이서준을 몰아붙였다는 게 부끄러웠지만.
아직 고희연은 이서준을 완전히 믿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있어.’
이서준의 반응으로 볼 때, 단순한 허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설아는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
고희연은 그저 대단한 수준이라고만 생각했지만.
만약 기억이 사실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 증거로.
‘저렇게 많은 사람이 설아를 노린다는 건.’
암살자들은 이서준과 싸우고 있었다.
거대한 스켈레톤 하나가 이서준과 설아를 보호하고 있었다.
암살자들은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아무리 이서준이라도 지쳤는지, 조금씩 밀렸다.
‘……아. 몰라!’
설명을 듣는 건 나중에도 괜찮다.
고희연은 이서준을 돕기 위해 뛰어들었다.
* * *
여름이었는데도, 세계는 얼어붙어 있었다.
빙하기가 찾아온 듯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땅.
모자를 푹 눌러쓴 이설아는 앞으로 걸었다.
눈보라 속에서, 이설아는 한 기사와 마주쳤다.
“이 앞으로는 보내 줄 수 없다.”
이설아는 기사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고 있었다.
그리스어.
시야를 가리고 있던 하얀 눈보라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기사의 등 뒤로 희미하게 보이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철컥.
갑옷으로 완전히 무장한 기사단이 오와 열을 맞춰 서 있었다.
모두 같은 자세로 검을 잡은 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수는 언뜻 봐도 수천, 일개 군대에 달했다.
그리스 최대 규모의 길드, 나이츠 (Knights)였다.
“난 기사가 싫어.”
이설아는 적의를 드러냈다.
이설아가 가장 혐오하는 인물 중 하나가 기사를 표방했기 때문이다.
선두에 있던 기사, 소피아 람비두는 압도감을 느꼈다.
“과연 이게 마녀인가.”
최종 보스, 마녀라는 별명이 걸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 뒤에는 그리스 최대 규모의 안전지대, 아테네가 있다.
이설아를 보내 준다면,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아테네가 무너지는 건 기정사실이다.
그렇기에, 소드 마스터 소피아는 검을 들었다.
보통 살의만 보여도 공포에 질려 전의를 상실하기 마련인데.
나이츠는 그 누구도 흔들림 없었다.
이설아는 중얼거렸다.
“죽을 텐데.”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았겠지.”
소피아는 결의를 다지듯, 검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뒤에 있는 기사들에게 소리치듯 묻는다.
“모두, 죽을 준비 됐나!”
“예! 그렇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겁먹었을지언정, 압도되었을지언정, 목소리에 흔들림은 없었다.
나이츠의 기사들이 검으로 바닥을 찍었다.
이설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시끄러워.”
“용맹한 기사들이여! 겁먹지 마라! 상대는 하나다!”
소피아의 측면에 있던 측근, 알렉시스 조르바가 말을 이어 나갔다.
이설아는 귀가 아프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 가만히 있었다.
기사들은 고양된 듯 자세를 고쳤다.
“신이 있다면, 우리를 도울 것이다!”
“내가.”
“정의는 우리의……!”
“시끄럽다고 했지.”
이설아는 한 손을 휘둘렀다.
그리고 소피아는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걸 느꼈다.
짧은 순간 거대한 양의 마나가 몸을 쓸고 지나갔다.
오랜 세월에 거쳐 단련된 감각이 맹렬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죽는다.
“알렉스!”
이설아가 파리 쫓듯이 가볍게 손을 휘두른 방향은 왼쪽이었다.
소피아가 알렉시스가 있는 왼쪽을 봤을 때.
“어?”
그곳에는 거대한 얼음이 있었다.
좌측으로 비스듬히 솟아난 얼음은 나이츠의 군세 좌측 전체를 모두 얼려 버렸다.
이설아가 손을 가볍게 움켜쥠과 동시에, 얼음이 산산이 부서졌다.
후욱!
그것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얼음 알갱이로 변했다.
눈보라와 함께, 한때 사람이었던 것이 살아남은 나이츠의 길드원들을 쓸고 지나갔다.
불과 일 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나이츠의 절반이 전멸한 것이다.
그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그토록 많은 생명이 순식간에 죽은 것이다.
이내 상황을 인지한 사냥꾼이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질렀다.
“흐아아아아악!”
인간의 목구멍 끝자락에서 나오는, 절망에 들어찬 목소리였다.
너무도 허무한 죽음이었다.
장렬한 최후도, 정의도, 결의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히 신의 힘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 인간이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 걸로 마나를 많이 소모했을 것이다!”
소피아의 목소리가 공포에 질린 비명을 뚫고 나왔다.
그것은 거의 악다구니에 가까웠다.
소피아도, 투구 안쪽에서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이자 나이츠의 길드 마스터이기 이전에, 소피아 또한 인간이었다.
슬펐고, 두려웠고, 절망했다.
괴물을 눈앞에 둔 어린아이처럼 몸이 떨렸다.
“전투준비!”
소피아의 고유 스킬은 ‘기사단장’.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것만으로, 지휘받는 군대의 마나를 강화한다.
절반의 길드원들이 죽었으나, 남은 이들은 스킬의 효과로 두 명분의 몫을 할 수 있었다.
아직은 지지 않았다.
소피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돌격!”
* * *
“허억, 허억.”
전투가 끝났다.
소피아는 숨을 몰아쉬었다.
검을 쥔 손에 한계가 찾아온 것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탓에 어지러웠다.
몸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아마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게.’
소피아는 검을 떨어트렸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휘두른 검은, 이설아의 손목과 팔뚝에 긴 상처를 남겼다.
접근조차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유효한 공격을 한 번 성공한 것이다.
이 정도 상처라면 분명 마녀라도 물러설 것이다.
그러나.
쩌적.
이설아는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제 손목에 손을 얹었다.
하얀 피부를 찢은 상처 위로 얼음 결정이 뒤덮였다.
문제없다는 듯 태연하게 주먹을 쥐었다 펴 보인다.
“하.”
소피아는 허탈한 마음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스 최대 규모의 길드, 나이츠 전멸.
수많은 사람이 목숨과 맞바꾼 건, 간단하게 치료되는 상처 하나였다.
“쿨럭.”
소피아는 피를 토했다.
이미 얼음 송곳이 복부를 관통한 상태였다.
지금까지는 정신력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방금 긴장이 풀린 걸로 끝이었다.
뒤를 돌아봤다.
시체들이 즐비했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한 번의 전투로 셀 수 없을 정도의 생명이 사라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게냐.”
소피아와 이설아의 눈이 마주쳤다.
나이츠는 마녀에 의해 전멸했다.
“불쌍하구나.”
그러나 기이하게도, 소피아는 이설아를 동정하고 있었다.
이설아는 쓰러지는 소피아를 내려다봤다.
푸확!
복부에 박혀 있던 얼음 송곳이 꽃처럼 만개했다.
소피아의 목숨을 거둔 이설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람을 죽이는 건 처음엔 무섭고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각.
땅을 뒤덮은 눈이 이설아의 신발에 뭉개졌다.
그간 자신을 죽이려 한 수많은 이를 죽인 이설아는, 이미 살인에 무감각해져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망설임은 곧 자신의 위험으로 다가왔다.
사람에 대한 믿음은 배신으로 돌아왔다.
그렇기에, 이설아는 무뎌지는 것을 택했다.
* * *
이설아는 생각했다.
만약 성북에서 이서준이, 사냥 팀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이서준이 처음부터 유은혜를 받아들였더라면.
만약 이설아가 마녀로 몰렸을 때, 편을 들어 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만약은 이루어지지 않기에 만약이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
‘왜.’
지금과 그 계기와 크기는 조금 다르지만, 이 또한 마녀사냥이다.
이설아가 마녀사냥을 당할 때, 도와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만에 하나 도와준다고 접근하더라도 이용하거나, 기회를 노려 죽이려 들었다.
하나뿐인 아버지마저 자신을 배신했다.
그런데.
‘나는 이토록 불행한데.’
저 아이는 모든 것을 가졌을까.
같은 상황이지만, 결과는 달랐다.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저기 이서준에게 안겨 있는 설아는 자신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아니었다.
‘저 아이는…….’
자신을 그토록 죽이기 위해 이를 갈던 고희연마저도 저 자리에 있었다.
이설아는 유은혜와 에르제베트도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모든 걸 가지고 있는 아이.
둘 중 하나는 구원받았고, 다른 하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만.”
만들어 낸 마녀사냥이다.
설아를 버리고 도망가기라도 했다면 차라리 후련했을 텐데.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서준은 끝까지 설아를 지키고 있었다.
이 촌극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이설아는 이서준을 공격하는 암살자들을 내려다보다가, 손뼉을 쳤다.
얼음 꽃이 만개했다.
* * *
푸학!
사람들의 몸에서 사방으로 얼음 송곳들이 솟아났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꽃 위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돌연 나를 몰아붙이던 암살자들이 전멸한 것이었다.
“어?”
어느샌가부터 나를 돕던 고희연도 검을 내렸다.
살아 있는 암살자는 모두 예외 없이 죽었다.
살상력이 강한 광범위 얼음 마법.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건, 설아뿐이다.
나는 내 품에 있는 설아를 내려다봤다.
“아니요. 설아 아니에요.”
그러나 설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부정했다.
아무래도 설아는 아닌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면 설아가 아닐 수밖에 없다.
설아는 이런 정교한 마법은 아직 사용하지 못한다.
애초에, 살인을 태연하게 저지를 수 있는 아이가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 순간.
나는 아주 익숙한 한기를 느꼈다.
무언가 나를 끌어당기는 듯한 기분.
고개를 들었다.
‘……어?’
마주한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아닐 거라고, 부정해 왔던 가능성이었다.
에르제베트와 같은 챙이 넓은 고깔모자에, 로브 차림.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눈동자는 분명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아니면 환상을 보고 있는 걸까.
죄책감에 사로잡혀 드디어 미쳐 버린 걸까.
“저건.”
그런 생각을 부정하듯, 고희연이 황망히 중얼거리는 게 귓가에 들려왔다.
내 눈앞에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진짜였다.
목소리가 목에 걸린 듯 잘 나오지 않았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는 결국 마주했다.
“……설아야.”
내가 구하지 못했던 내 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