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aughter Is the Final Boss RAW novel - Chapter (26)
26화
언젠가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적 있다.
높은 층에 살아 봤다면 공감하겠지만, 계단을 올라가는 건 여간 고역이 아니다.
특히 운동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대인들이라면 더욱 그랬다.
나는 자체적인 훈련을 어느 정도 거친 몸인 만큼, 그 정도 계단은 쉽게 오를 수 있다.
하지만 계단이 산등성이 전체에 걸쳐져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허억.”
나는 무심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날카로운 공기가 목구멍을 찌르는 기분이었다.
어지러운 시야 안에는 계단, 계단, 그리고 계단이 있었다.
은혜도 어지간히 힘든지, 무릎을 잡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쉬는 중이었다.
‘체력은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천천히 걸어갔다면 큰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보라고 해야 할까, 살짝 뛰는 듯한 속도가 기본이었다.
그 속도를 유지하며 계단을 오르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침을 억지로 삼킨 은혜가 입을 열었다.
“희연아. 조금만 천천히…….”
“에이. 이제 다 왔어요!”
반면 고희연은 아주 쌩쌩했다.
설아를 업은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오른다.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은 건 물론, 땀 한 방울 흘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유지하고 있어, 업혀 있는 설아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역시 차이가 심하네.’
고희연이 사냥꾼이 된 것은 이제 고작 3년쯤 됐을 거다.
하지만, 붕괴가 일어나기 전부터 고희연은 수련해 왔다.
단순히 고려검가의 후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본인은 원하지 않았더라도, 탄탄한 그릇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랑 은혜는, 아직 그릇을 만드는 단계.’
나와 은혜의 경우에는 사냥꾼 준비를 시작한 지 불과 한 달 조금 넘었다.
그릇을 채우기는커녕, 아직 그릇 자체를 만들지도 못한 상태였다.
꾸준한 훈련과 영약 섭취가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 몇 년간 훈련을 거친 고희연과는 간극이 있었다.
“다 왔어요!”
“……와.”
은혜는 감탄했다.
그야말로 대궐 같은 한옥이었다.
기왓장을 쓴 담벼락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거대한 나무 문 양옆에는 도복 차림의 사냥꾼 둘이 서 있었다.
“희연 아가씨. 정말 약속을 지키셨군요.”
“제가 금방 온다고 했잖아요.”
“매번 그러시고 몇 시간 뒤에 오시잖아요.”
“쉿.”
“그런데 이분들은?”
“제 손님들이에요. 신원은 제가 보장할게요.”
고려검가의 사냥꾼은 나와 은혜, 설아를 차례로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나무 문이 열렸고, 드넓은 내부가 드러났다.
“희연이 너, 되게 좋은 집에 사는구나.”
“아니에요. 넓기만 하고 제 공간은 별로 없어요.”
수련생들이 일제히 검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특이하게도 고려검가는 기존의 길드와 다른 체계를 갖추고 있다.
사냥꾼을 실전에 투입해 훈련시키는 게 아니라, 반대로 훈련시킨 뒤 실전에 투입한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사냥꾼에 대한 교육은 현재 엉망진창이었다.
실제로 라이선스 학원 같은 곳도 은퇴한 사냥꾼이 대략적으로만 가르칠 뿐, 진짜 훈련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시키진 않았다.
“자, 자. 이쪽으로 오세요.”
고희연은 우리를 이끌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만나는 수련생들마다 인사를 빼먹지 않는 걸 보면, 평판이 꽤 좋은 것 같았다.
하긴, 직접 겪어 본 결과 고희연은 상당히 성격이 좋았다.
사람들의 대우도 그에 따라 좋아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별채라고 부를 만한 곳이 있었다.
“여기예요!”
확실히 전체적인 규모를 생각하면 소박했지만, 그래도 내 원룸보다는 몇 배 큰 곳이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자, 외부와 달리 상당히 현대적인 내부가 드러났다.
큼지막한 인형에, 컴퓨터도 있었다.
나와 은혜는 바닥에 앉아 방을 구경했다.
“언밸런스하네.”
“커피? 차? 어느 쪽이 좋으세요?”
“뭐든 차가운 걸로.”
“알겠어요. 설아야. 이제 일어나.”
“우응.”
고희연의 등에서 내려온 설아는 비척거리며 내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나는 내심 감동했다.
대체로 이렇게 정신이 없을 때, 설아는 은혜에게 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나도 아이스크림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서준아, 너 진지하게 라이벌 의식 가지고 있는 거 아니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역시 설아의 사랑을 받는 은혜는 모른다.
아이스크림에 진 아빠의 패배감을 말이다.
“설아야. 일어나자.”
“네에…….”
비몽사몽한 와중에 대답한 설아는 꾸벅꾸벅 졸았다.
자꾸 고개가 떨어졌다가 바로 서기를 반복한다.
“그냥 재워, 어차피 이야기만 나눌 건데.”
“알았어.”
은혜의 말대로 나는 설아의 몸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뒤통수를 명치에 기댄 설아는 뒤척이며 자리를 잡더니, 결국 다시 잠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희연이 차가운 보리차를 내왔다.
나와 은혜는 무슨 생명수를 탐닉하는 것처럼 그것을 원샷 했다.
“캬!”
“쥑이네!”
“목마르셨나 보네요.”
“그야 물 한 모금도 안 마시고 이 높이를 올라왔는데, 당연하지.”
“설아는요?”
“그냥 자게 두려고. 원래 낮잠 자는 시간이거든.”
“그러면 침대에서 재워요. 여기.”
나는 설아를 안아 들고 침대로 옮겼다.
침대에는 인형들이 한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설아는 곰 인형 하나를 안고 행복한 얼굴로 잠들었다.
고희연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핸드폰을 꺼내 그것을 찍었다.
“사진 찍어도 괜찮아요?”
“뭐라 할 건 아니지……?”
“아싸.”
“넌 무슨 설아 팬이냐?”
“팬클럽 만들어지면 말해 주세요. 제가 회장 할게요.”
고희연은 여러 각도에서 수십 장의 사진을 찍은 뒤에야 만족했다.
얼핏 보인 갤러리에는 은혜가 보내 준 듯한 설아의 사진이 가득했다.
“아 참.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부탁할 게 있어서.”
“부탁이요?”
“희연이 네가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여기에 필드 있지?”
“수련생들이 쓰는 필드요? 있죠.”
균열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저번 미전조 균열 때처럼, 괴물을 토해 내고 사라지는 단발성.
붕괴한 백화점처럼 어떤 건물을 장악해 던전을 만드는 침식성.
그리고 단발성과 반대로, 사라지지 않고 일정한 주기로 괴물을 내보내는 영구성이 있다.
필드는 이런 영구성 균열이 다수 나타난 지역을 일컫는 말이었다.
“거기 잠깐 쓸 수 있을까?”
“으음. 언니 오빠는 무소속이죠?”
“응. 길드는 없어.”
“사실 제가 역량만 있다면 고려검가로 영입하고 싶긴 한데.”
고희연은 흘끔 나를 바라봤다.
“그럴 생각은 없으시죠?”
“맞아.”
“하긴, 서준 오빠 정도면 어떤 길드 잡고 문 두드려도 환영식을 펼칠 테니까요.”
“서준이를? 그래?”
은혜는 처음 듣는 일이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예상은 한 일이었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협회 측에서는 응시생에게 점수를 매긴다.
비단 통과 기준이 아니라, 여러 가지 역량을 기준으로 말이다.
필기는 만점, 실기도 아마 만점.
나비효과로 비틀어진 최종 시험 또한 만점 처리했다고 했으니.
“네. 서준 오빠, 꽤 유명해요. 슈퍼 루키가 등장했다면서 말이 얼마나 많은데요.”
“슈퍼 루키? 으. 오글거려.”
나는 닭살 돋은 양 팔뚝을 잡고 쓸었다.
슈퍼 루키라니.
내겐 너무 과분한 칭호였다.
15년을 굴렀으니 이제 처음 검을 잡아 본 애들보다야 낫겠지만.
은혜는 꽤 놀랐다는 듯 나를 봤다.
“그랬구나. 몰랐어.”
“은혜 언니도 꽤 준수한 성적이라, 주목받고 있기는 매한가지예요.”
“나, 나도?”
“네. 최종 시험을 거의 혼자서 치르셨다면서요?”
이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은혜가 최종 시험을 통과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무난하게 좋은 팀을 만나서 수월하게 통과했다고 했는데.
“어, 음. 어쩌다 보니.”
“한 명은 도망에, 다른 한 명은 점수 보니까 걸림돌이던데요. 이게 혼자 공략한 거죠, 뭐.”
은혜는 멋쩍은 듯 볼을 긁었다.
은혜 정도 실력이면 초보자용 소형 던전 하나 혼자 공략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금 현역으로 뛰고 있는 사냥꾼 중 이름 있는 궁수를 데려와도 저렇게는 못한다.
“아무튼, 필드를 쓰고 싶으시다는 거죠?”
“응. 둘이서만 쓸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야 수련생들 사이에 있으면 불편하시겠죠.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정말? 괜찮겠어?”
“그럼요! 강철이 어르신도 소개받았잖아요.”
“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붕괴한 백화점에서 무기를 잃은 고희연은, 내게 무기 제작자에 대해 질문한 바 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강철이를 소개하긴 했는데.
‘미래를 너무 섣불리 바꾼 건 아닐까 몰라.’
나비효과에 대해서 조금 찾아봤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바뀐다면 그것이 이후 가져오는 영향은 지대하다.
특히 강철이의 경우 검성과 훗날 만나게 되기에 더욱 그랬다.
그 시기를 일찍 앞당겨 버리면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알 수 없었다.
‘이건 아직 가설일 뿐이지만.’
나비효과는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을 수 있다.
당장 은혜만 해도 원래대로라면 기사단에 들어가 활동하고 있어야 한다.
사소한 것뿐만 아니라, 나는 큰 것도 하나하나 바꿔 가고 있었다.
미래가 틀어짐에 따라 나비효과가 발생하는 거라면.
은혜에게도 나비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법은 없다.
“새로 제작한 검도 자랑하고 싶은데, 여기 없네요.”
“응. 나중에 보여 줘.”
“좋아요. 일단 필드 출입, 가능한지 여쭤보고 올게요!”
고희연은 생각한 건 바로 실행에 옮기는 타입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한마디 말도 없이 쌩 나가 버렸다.
그리고 또 얼마나 지났을까.
똑똑.
누군가 노크를 했다.
뭔가 해서 열어 보니, 여자 수련생 하나가 있었다.
수련생은 누구냐고 묻는 듯한 눈으로 나를 봤다.
“어. 손님입니다.”
“고희연 아가씨 여기 계신가요?”
“아까 잠깐 나갔는데. 무슨 일 있나요?”
“손님이 오셔서요. 으음.”
“뭐가 문제지?”
나는 그제야 수련생 뒤쪽을 봤다.
아주 꼴 보기 싫은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성수현?”
“……누군가 했더니, 그때 봤던 응시생이잖아.”
“아. 예.”
성수현은 역시나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잠깐 본 사인데 저 콧대 높은 놈이 이름을 기억하는 게 이상하다.
“나도 들어가서 기다리지.”
“죄송합니다. 아가씨께서 허락 없이 손님을 방에 들이지 말라고 하셔서요.”
“저건 되고, 난 안 된다는 건가?”
“죄송합니다.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성수현이 고희연을 찾아왔다.
고희연이 그 정도로 면박을 줬는데, 왜 찾아온 걸까.
회귀 전의 일을 찾아보려 했지만, 이런 개인적인 관계까지 알지는 못한다.
백화점에서 말했던 걸로 봐선 서로 초면이었던 것 같은데.
성수현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너, 나 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