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aughter Is the Final Boss RAW novel - Chapter (282)
282화
쿵.
회의실 맞은편, 빈방.
유은혜는 에르제베트를 벽에 몰아붙였다.
유은혜의 팔에 가로막혀 오갈 데가 없어진 에르제베트는 난처한 듯 말했다.
“박력 있긴 한데, 난 이런 취향 없는데.”
“……그런 거! 아니거든요.”
당황한 유은혜는 저도 모르게 올라갔던 목소리를 낮췄다.
행여나 들렸을까 걱정하는 듯 문 쪽을 흘긋 봤다.
하지만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에르제베트는 벽에 뒤통수를 기댔다.
피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저번에, 제가 제 과거에 대해서 질문했던 거 기억하세요?”
에르제베트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의 설아를 만나고 성북으로 돌아가는 길.
유은혜는 에르제베트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질문했다.
에르제베트는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저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하셨죠.”
너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또 다른 유은혜가 했던 것과 똑같은 말.
그 한마디는 유은혜에게 불안감을 심어 주기 충분했다.
유은혜는 과거의 자신을 일절 기억하지 못한다.
사라졌던 기억을 되찾는 것을 계기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궁금하지만.’
유은혜는 자신의 과거가 궁금했다.
하지만, 동시에 현재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이서준이 있고, 설아가 있으면 충분했다.
굳이 기억을 찾아 바뀔 필요는 없다고 합리화했다.
결국 유은혜는 에르제베트를 추궁하는 걸 포기했다.
하지만.
“저, 봤어요.”
유은혜는 과거의 편린을 보게 됐다.
처음에는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희미한 꿈이었다.
백은발의 여자아이가 무수히 많은 사람에게 쫓기는 꿈.
그러나 그 꿈은 아자누스에게 죽는 악몽처럼, 조금씩 선명해졌다.
그리고 이내 유은혜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에르제베트.’
사람이라는 괴물들에게 쫓기는 여자아이는, 분명 에르제베트였다.
유은혜는 매일 밤 긴 꿈을 꿨다.
빠르게 장면들이 전환되긴 했지만.
그것은 에르제베트의 생애였다.
태어난 이래로, 사람들을 피해 도망만 다녔던 기억.
결국 붙잡혀 사형당하는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저는 혹시…….”
유은혜는 말꼬리를 흐렸다.
만약 에르제베트의 경고가 사실이라면.
기억을 되찾으면서, 스스로를 잃어버릴 수 있었다.
행여나 자신이 사라질까 걱정됐다.
하지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르제베트 씨의 환생인가요?”
에르제베트는 유은혜를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대답하는 대신, 제 턱을 살짝 잡았다.
인상을 찡그린 채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어…… 아닌데?”
“엑.”
기억의 주인은 분명 에르제베트다.
유은혜는 다른 사람이 아닌, 에르제베트 시점에서 그 기억을 봤다.
그렇기에 분명 에르제베트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딸인 설아가 하필 에르제베트와 같은 마녀인 것도.
부산에서 에르제베트와 묘하게 연결된 듯한 느낌을 받은 것도.
자신이 에르제베트의 환생이기에 그렇다고 추론했다.
“그럼, 혹시 에르제베트 씨의 자손……? 그런 건가요?”
“나는 애 낳은 적 없어. 처녀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유은혜는 당황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틀렸다고 일축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에르제베트는 한숨을 내쉬며 간단하게 반박했다.
“애초에 내가 환생한 게 너라면, 나는 어떻게 존재해?”
“어?”
“봐 봐. 내가 죽고 환생한 게 너라는 얘기잖아?”
유은혜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에르제베트는 목이 잘려 죽었다.
하지만, 눈앞에 멀쩡히 살아 있었다.
“그럼 내가 있을 수 없잖아.”
“그, 그러네요.”
유은혜는 완벽히 논파당했다.
꿈속에서 본 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까.
하긴 그건 기억이 아니라 그저 꿈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어쨌든 에르제베트 씨는, 과거의 저를 알고 계신 거죠?”
“응. 알고 있어.”
에르제베트는 부정하지 않았다.
이미 또 다른 유은혜가 유은혜에게 언질을 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또 다른 유은혜가 직접 설명하는 것보단, 자신이 하는 게 나을 것이다.
합리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잔인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왜 안 알려 주시는 거예요?”
“너무 일찍 알아서 들켜 버리면, 선택지가 하나 줄어들거든.”
유은혜는 에르제베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에게 무얼 들킨다는 건지, 선택지가 무엇인지.
어느 하나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준한테 했던 질문이긴 한데, 너한테도 물어봐야겠네.”
에르제베트는 유은혜를 마주 봤다.
“미래의 설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미래의 설아요?”
“그래. 너랑은 별로 관련 없잖아.”
이서준은 미래의 설아를 애틋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회귀하기 전의 세계에서 자신이 지켜 내지 못한 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은혜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지금의 유은혜는 미래의 설아를 몰랐다.
수서와의 전쟁에서 한 번 만난 게 전부.
하지만.
“……그래도, 제 딸인데.”
유은혜는 미래의 설아 또한 자신의 딸, 설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 의외의 대답에 에르제베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러면, 지금의 설아와 미래의 설아. 둘 중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
이서준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었다.
조금 악질적인 질문이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에르제베트에게는 이 질문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누굴 구할 거야?”
“어, 음.”
에르제베트는 유은혜가 현재의 설아를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미래의 설아를 자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다르다.
현재의 설아는 직접 낳아, 키우며 6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했다.
하지만 미래의 설아는 유은혜가 최근에 한 번 본 것이 전부.
같은 딸이라고 해도 그 중요도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은혜는 에르제베트를 바라보며 이렇게 되물었다.
“……혹시 둘 다 구할 수는 없나요?”
에르제베트는 유은혜와 눈을 마주쳤다.
이서준과 신기할 정도로 똑같은 대답이었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피식 웃은 에르제베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 알았어. 그러면, 네 과거는 말해 줄 수 없어.”
“어응? 왜 그게 그렇게 돼요?”
“그러게. 그게 그렇게 되네.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될 거야.”
* * *
에르제베트는 성북의 밤거리가 내다보이는 지붕에 앉아 있었다.
허벅지 위에 자리를 잡고 몸을 웅크린 캐시가 갸르릉거렸다.
에르제베트는 습관적으로 캐시를 쓰다듬어 주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던전화가 풀렸으나, 그다지 달라진 건 없었다.
겨울의 밤공기는 여전히 차가웠고, 서울의 밤하늘은 어두웠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에르제베트는 고개를 돌렸다.
유은혜가 그 자리에 있었다.
아니, 말투와 눈을 보니, 또 다른 유은혜였다.
또 다른 유은혜가 추궁하고 있는 건 하나였다.
“왜? 내가 전부 말했어야 했어?”
“그게 합리적인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우리가 개입하긴 편해지겠지만, 유은혜의 선택지는 없어질 거야.”
“유은혜도, 우리입니다.”
또 다른 유은혜와 에르제베트의 시선이 충돌했다.
조용한 눈싸움에서 먼저 눈을 돌린 건 에르제베트였다.
또 다른 유은혜는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미래의 설아는 생각지 못한 변수였습니다.”
“알아. 나는 내가 정신 나간 줄 알았다니까.”
“들켰습니다.”
“……이서준? 유은혜?”
“둘은 아직 괜찮습니다. 문제는 미래의 설아입니다.”
“하아, 마구엘 보니까 어차피 나도 반쯤 들킨 것 같던데. 내가 어떻게 해 볼게.”
“그럼 당신은…….”
“애초에, 내 존재 이유가 그거잖아.”
또 다른 유은혜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내 눈을 지그시 감고, 사라졌다.
에르제베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얼핏,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보였다.
* * *
봄이 왔다.
성북과 고려검산을 시작으로, 서울은 빠른 속도로 안정되기 시작됐다.
검성이 직접 각 안전지대의 사냥꾼을 모아 토벌대를 구성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고희연, 이서준과 강대호까지 포함된 이 토벌대는 빠른 속도로 괴물로부터 서울을 탈환했다.
각 안전지대는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됐다.
아직 외곽에는 괴물이 남아 있었지만, 이전보다 훨씬 안정됐다.
“시간 참 빠르네요.”
“그렇지. 씨발. 그러니까 내가 서른이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잖아요.”
“죽여 버린다.”
서울, 성북, 스펙터의 길드 하우스.
하이람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웬만하면 그냥 놀렸을 텐데, 이번에는 진심 같았다.
장난 아니라 총을 들었다.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무섭다.
“하아. 나도 회귀하고 싶네.”
“언제로요?”
“글쎄다. 한 고등학생 때로?”
“헐. 하이람 씨가 고등학생이었던 적이 있었어요?”
“너 나랑 대련 안 해 봤지? 나와. 이 새끼야.”
가장 크게 바뀐 것 중 하나는 스펙터의 지위였다.
대한민국의 던전화 전까지만 해도 그저 유망한 길드에 불과했던 스펙터다.
하지만 던전화가 풀린 이후에는, 그 인지도가 급속도로 올라가 버렸다.
“나 왔다!”
“대호 형. 어서 와요.”
하이람은 사실상 성북을 운영했다.
서울 내에서도 가장 안정된 안전지대의 중추였으니, 그 능력을 인정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던전화가 풀리면서 정부 측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고 들었다.
강대호는 권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여러 사람을 구조했다.
주먹을 쓴다는 특이한 점과 선행이 겹쳐 금방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도 왔어요!”
“희연이도 왔네. 밖에 사람 없어?”
“말도 말아요.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선글라스를 쓴 고희연도 들어왔다.
좀 유난스러워 보였지만, 저러지 않으면 사람이 너무 따라왔다.
고희연은 원래부터 검성의 손녀로 유명인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실력 상승으로 주목을 모았다.
토벌대에서 쉬지 않고 괴물을 도륙하며, 기어코 검귀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희연이도 좀 무서워지긴 했지.’
원래도 검을 휘두를 땐 진지했지만.
이제는 검을 잡으면 사람이 변하는 느낌이었다.
한없이 밝기만 한 사람이 진중해지니, 그 차이가 극명하게 느껴졌다.
“은혜 언니랑 설아는요?”
“이제 오지 않을까?”
스펙터 내에서 인지도가 낮던 은혜는 마구엘에게 결정타를 날린 것으로 단숨에 유명해졌다.
물론 마구엘 사냥 자체는 고희연을 제외한 스펙터와 에르제베트, 설아의 기여까지 있었다.
하지만 결국 마무리한 것은 은혜였기 때문에, 마구엘을 사냥한 장본인으로 공표되고 말았다.
은혜는 질색했지만, 당시 성북에 목격자가 워낙 많았던 탓에 무마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웅.
포탈이 생기더니, 기진맥진한 모습의 은혜가 나왔다.
설아를 안아 든 에르제베트도 함께였다.
“은혜야. 괜찮아?”
“힘들어 죽겠어…….”
웬만해선 약한 소리 않는 은혜는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똑 부러진 면모가 있지만, 은혜는 은근히 낯을 가린다.
그런데 지금 은혜가 하는 일은 대부분 인터뷰.
막상 인터뷰에서 버벅거리거나 당황하진 않지만, 끝나면 힘이 쭉 빠져서 돌아온다.
나는 흐물흐물 늘어진 은혜를 잡아 일으켰다.
소파에 앉혀 놓고, 그 위에 설아를 앉힌다.
그제야 은혜의 표정이 조금 편하게 풀어졌다.
“으윽. 부럽다.”
“지금은 은혜한테 양보 좀 해 줘.”
“저러고 있는데 뺏어 가진 않거든요.”
고희연은 대신 은혜 옆에 앉아, 설아를 쓰다듬었다.
신기하게도 설아는 저럴 때면 참 얌전히 있었다.
손길을 즐기는 건지, 그냥 얌전한 건지 잘 모르겠다.
하이람이 손에서 굴리던 탄피를 책상에 내려놓고 말했다.
“어쨌든, 다들 들었지?”
모두 정신을 차리고 진중한 눈이 됐다.
우리가 모인 이유는 하나였다.
“월드 보스가 출현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