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aughter Is the Final Boss RAW novel - Chapter (295)
295화
“지금부터는 늙은이 넋두리라고 생각하고 듣게나.”
키츠네 키쿄우의 눈이 신사 아래를 향했다.
안전지대의 중심이니만큼,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나는 운명이 있다고 생각한다네. 꼭 운명 같은 거창한 말이 아니더라도, 사람에게는 주어진 무언가가 있어.”
유은혜는 가만히 들었다.
이 의견에 반대하고 나설 생각은 없었다.
이서준이 없었다면, 유은혜도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마 자네들 말대로, 월드 보스는 많은 사람을 죽일 걸세. 어쩌면 이 시부야마저 무너질지도 모르지.”
“그러면 왜 가만히 계시는 건가요?”
“이 늙은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키츠네 키쿄우는 조금 씁쓸한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유은혜는 그 감정을 느껴 본 적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무력감.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 봐야, 잠깐이라도 더 살리는 것 정도라네.”
“그래서 말리신 거군요.”
유은혜는 그제야 키츠네 키쿄우가 완강하게 거절 의사를 내비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생면부지의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키츠네 키쿄우는 그들을 살리고자 한 것이었다.
유은혜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미 저희의 운명을 점괘로 보신 건가요?”
“일부뿐이지만, 보았지. 하지만 그곳에는 죽음뿐이었다네.”
“운명이 있더라도, 바꿀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무녀님께서 저희를 막은 것처럼요.”
“아니. 나는 너희를 잠깐 막은 것뿐이야. 너희는 분명 그 괴물을 사냥하러 가겠지.”
유은혜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아마, 분명히 그럴 것이다.
미래의 설아를 막기 위해선, 월드 보스를 사냥해야만 했다.
하물며 미래의 설아가 이번 일에 연루되어 있다는 걸 확인하기까지 했으니.
이서준도, 유은혜도 결코 사냥을 중단하고 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저는 죽을 뻔한 적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살아 있는걸요.”
“그렇다면 살 운명이었던 게야.”
“아니요. 죽었어야 했어요.”
확신에 찬 목소리.
키츠네 키쿄우는 슬며시 눈을 뜨고 유은혜를 바라봤다.
“……그럴 리가.”
눈을 똑바로 마주 보던 키츠네 키쿄우는 부정하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다시 흘끔 유은혜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그 눈은 경악으로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아이야. 너는, 너는 진실을 말하고 있구나.”
키츠네 키쿄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유은혜는 이서준이 회귀하기 전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자누스에 의해, 유은혜는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 운명은 바뀌었다.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설아가 마탑에 잡혀가는 것도, 마녀사냥을 당하는 것도.
원래 벌어져야 할 일이었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바뀌어 가는 운명을, 유은혜는 두 눈으로 여러 차례 목격했다.
“어찌…… 잠깐.”
키츠네 키쿄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마치 오류라도 난 듯 잠깐 멈추더니, 뭔가 놓친 게 있다는 듯 허둥대며 돌아섰다.
“따라오거라.”
“네? 네.”
유은혜는 영문도 모른 채 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키츠네 키쿄우를 따라갔다.
얼마나 급하게 걷던지, 한 번 발을 헛디디기까지 했다.
반사신경이 뛰어난 유은혜가 부축해서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그대로 넘어졌을 것이다.
“미안하구나.”
“조심하세요.”
신사.
그 앞에는 작은 판과 항아리가 있었다.
키츠네 키쿄우는 항아리 속에 쑥 손을 집어넣었다.
알 수 없는 말로 뭐라 중얼거리더니, 항아리에서 손을 뺐다.
그리고 항아리에 들어 있던 무언가를 판에 집어 던졌다.
툭, 투둑, 툭.
그것은 쌀알이었다.
키츠네 키쿄우는 판 위로 흩뿌려진 쌀알을 유심히 바라봤다.
“아이야.”
“네?”
“너희, 몇 명이더냐?”
“어어.”
유은혜는 당황하며 일행의 수를 헤아렸다.
생각보다 함께 온 사람들이 많았다.
스펙터의 이서준, 설아, 에르제베트, 하이람, 고희연, 강대호.
거기에 스기하라 신야와 키코, 야마토 다이스케.
“저까지 열 명. 열 명이네요.”
“열 명이라고?”
키츠네 키쿄우는 쌀알의 수를 헤아렸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쌀알 하나까지 포함해서, 판 위에 놓인 쌀알의 수는 총 일곱.
이럴 리가 없다는 듯, 키츠네 키쿄우의 미간 사이 주름이 깊어졌다.
“이럴 수가. 셋이 비는데.”
“쌀알이요? 아까 세 개가 튕겨 나가는 걸 봤어요.”
“뭐라? 어디서?”
“저기서요.”
키츠네 키쿄우는 유은혜가 가리킨 곳을 봤다.
그 말대로, 판에서 벗어난 쌀알 세 알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유은혜의 동체 시력이 좋다는 걸 알아챈 키츠네 키쿄우가 질문했다.
“어떻게 떨어지는지 보았느냐?”
“네. 두 알이 이렇게, 판 끝에 걸쳐지더니, 좀 늦게 떨어진 하나가 두 알을 밀쳤어요.”
유은혜는 곧이곧대로 본 것을 말했다.
키츠네 키쿄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쌀알을 연거푸 확인했다.
판 위의 쌀알의 수를 몇 번이고 다시 센 뒤, 무릎을 꿇고 앉아 떨어진 쌀알을 확인했다.
“……아이야. 혹여 너 이외에도, 운명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이가 일행에 하나 있더냐?”
“네? 어, 네.”
유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은혜의 딸, 설아가 그랬다.
키츠네 키쿄우는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너희 중에는, 운명에 거스를 수 있는 이가 하나 있는 것 같구나.”
* * *
우리는 키츠네 키쿄우의 도움으로 잠깐 머물 곳을 얻을 수 있었다.
외곽이긴 했지만 무려 집 두 채를 빌려준 것이었다.
안전지대 시부야의 규모가 커서 가능한 일이었다.
비교적 큰 2층짜리 집은 스펙터에서, 작은 것은 스기하라 신야 일행이 사용하기로 했다.
짐을 풀던 강대호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여긴 성북보다 상황이 나아 보이기도 하고.”
“그러게요. 결계가 정말 효과가 있나 봐요.”
“전류까지 통했으니까. 성북에도 전류 펜스는 일부밖에 못 쳤는데.”
성북을 책임진 하이람도 시부야의 안전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큰 의문은 따로 있었다.
“그보다 왜 갑자기 말을 바꿨을까?”
키츠네 키쿄우는 월드 보스 사냥에 있어서 상당히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그 의지를 느낀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잠깐 에르제베트와 이야기를 나누고 온 사이.
키츠네 키쿄우는 태도를 바꿨다.
-지원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주게. 그동안 머무를 곳은 마련해 줄 터이니.
얼핏 은혜와 키츠네 키쿄우가 같이 있는 모습을 봤다.
은혜가 키츠네 키쿄우를 설득했다고 보고 있었지만.
은혜는 무슨 일인지 설명하지 않고 있었다.
강대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그동안 월드 보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게 좋겠네.”
“정보 수집. 중요하죠. 해 본 적은 없지만.”
고희연은 진지하게 에르제베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하이람은 머리라도 아픈 건지 엄지로 미간을 꾹 눌렀다.
“네 생각은 어때?”
“어. 저 말입니까?”
“그래. 길드 마스터면 좀 자각을 가져라.”
“영 익숙해지지 않네요.”
나는 회귀 전만 해도 권력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더불어, 지금 내 주변에 유능한 사람이 많았다.
에르제베트와 하이람은 내가 못 하는 일을 척척 처리해 줬다.
“일단 하이람 씨 말대로 월드 보스에 대한 정보 수집을 우선시하겠습니다.”
“직접 도움을 청해 보는 건?”
“고려해 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으니, 섣불리 행동해서 반감을 살 필요는 없겠죠.”
“나랑 생각이 똑같네.”
“그럼 왜 물어본 거예요?”
“자질 확인.”
막상 길드 마스터 자리를 준다고 하면 거부하면서.
왜 저러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월드 보스에 대해서 알 만한 사람이 있을까?”
“여기도 한국의 안전지대와 비슷하다면, 명칭이 다르긴 해도 수색팀이 있겠지.”
“아. 맞네.”
시부야도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을 것이다.
사람을 구출하고 물자를 구해 오는 수색팀이 분명 있을 터.
외부를 돌아다니는 수색팀은 뭔가 아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처음 우리에게 활을 겨눴던 그 사람들이겠지.
“그럼, 누가 갈까?”
“내가 갈게.”
하이람이 자원하고 나섰다.
하지만 뭐랄까.
“희연아. 너도 같이 가.”
“좋아요! 재밌겠다.”
“왜. 나로는 못 미더워?”
“어, 그건 아니긴 한데요.”
하이람은 정보는 잘 알아낼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말해도, 사교성은 떨어졌다.
이곳 수색팀은 경계심이 꽤 많아 보였으니까.
“괜찮아요. 저만 믿으세요.”
반면 고희연은 조금 못 미더웠다.
대신 사교성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강대호도 스스럼없는 편이지만, 사교성은 조금 다른 부분이다.
적어도 여기서 고희연과 사교성으로 견줄 수 있는 건, 설아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저 조합은 좀 신선하네.”
“벌써 피곤하다.”
“히히. 가요.”
고희연은 당연하다는 듯 하이람의 팔짱을 꼈다.
하이람은 대놓고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놓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저런 걸 보면 하이람도 참 무른 면이 있었다.
* * *
나는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 눈 좀 붙인다는 게 그대로 잠들어 버린 것 같았다.
‘이 옷은, 옛날에 받았던 보급품이네.’
무심코 웃음이 나올 정도로 질이 안 좋은 슈트를 입고 있었다.
꽤 옛날 일을 꿈으로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처음으로 설아를 만났던, 지금은 이사 간 그 집이 있었다.
‘지금이 언제지? 내가 사냥꾼 때로 있을 때니까.’
아마 은혜가 죽고, 내가 사기 계약에 당했을 때일 것이다.
불쾌한 감각이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은혜가 죽는다니.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었다.
‘여기서라도, 설아한테 뭔가 말할 수 있다면.’
꿈이라도 좋으니, 바로잡고 싶었다.
내가 구하지 못한 내 딸이 문 너머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득, 나는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우당탕!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길한 느낌이 목 뒤를 스쳤다.
집 안에는 설아가 있을 것이다.
꿈이라는 것도 잊은 채, 벌컥 문을 열었다.
“설아야!”
설아를 부르며 들어간 집은 완전히 엉망이 되어 있었다.
창가에서 시름시름 죽어 가던 식물이 무성히 자라 온 집 안에 늘어져 있었다.
책장과 의자가 식물에 밀려 넘어져 있었다.
설아는 그 한가운데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제야 떠올랐다.
‘설아는 이 마법 때문에 마탑에 잡혔다.’
희미한 기억 속의 설아는, 분명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은혜의 활이었다.
‘은혜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탓에 마법이 폭주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뭔가 달랐다.
설아의 마법이 폭주할 때면, 무언가 얼어붙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식물이 자라나지 않았는가.
‘뭔가를 부수려는 게 아니라, 살리려고 했던 것처럼…….’
설아는 마법을 사용한 게 아니었다.
회귀 전, 이 시점의 설아는 에르제베트에게 마법을 배우지 못했다.
제어되지 않은 마나는 모든 것을 얼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법이 아니야. 마나를 대가로 한 주술인가?’
아마 알고 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잠깐. 설아는 의식에 관심이 많다고 했지.’
에르제베트는 설아가 의식에 관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현시점에서 설아가 살리고자 할 만한 건, 한 사람뿐이었다.
은혜.
설아는 은혜의 부활을 시도하다가, 마탑에 그 마나를 들킨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설아에게 다가갔다.
‘아. 안 돼. 제발.’
내 몸이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꿈이기 때문일까.
“이설아!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설아를 다그쳤다.
설아의 힘을 숨겨 달라는 건, 은혜의 유언이었다.
그걸 이유 삼아, 나는 멍청하게도 엄마를 잃은 딸에게 화를 냈다.
“왜 마법을 써?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
어서 이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건 악몽 같은 게 아니라 내 기억이었다.
내 업보였다.
큰 소리에 놀란 설아가 몸을 움츠렸다.
“자, 잘못했어요.”
“그거 이리 내.”
겁에 질린 설아는 활을 껴안았다.
설아는 빼앗기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당연하게도, 아이가 완력으로 어른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설아에게서 활을 빼앗았다.
우득!
활을 부러트렸다.
유품이 있으니, 설아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부러진 활을 본 설아는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우아아아앙!”
빚을 떠안고 노예처럼 일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았다.
겨우 집에 왔더니, 집은 난장판이 됐다.
거기에 아이 우는 소리까지 들으니, 짜증이 났다.
활을 보면 죽은 은혜가 떠올라서 괴로웠다.
“울지 마. 시끄러우니까.”
그딴 걸 자기합리화라고 하며, 나는 설아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
나는 난장판이 된 거실을 보다가, 우는 설아를 내버려 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할 수만 있다면 내 입을 때리고 싶었다.
“히끅, 엄마아아아…….”
나는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가슴이 답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