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aughter Is the Final Boss RAW novel - Chapter (356)
356화
세계가 정지했다.
이내 물감이 천에 스며들 듯, 하얀색이 일대를 채웠다.
튜토리얼 타워의 마지막에서 시스템의 보상을 받을 때 본 풍경이었다.
시스템의 공간.
내 앞에 선 시스템은 말하라는 듯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이게 맞나 싶었지만, 일단 입을 열었다.
“설아의 직업을 바꾸고 싶어.”
튜토리얼 타워에서 이미 확인한 사항이다.
시스템은 개인 시스템에 표기된 직업을 바꿀 수 있다.
놈이 저주의 대상으로 지정한 건 설아가 아니라 마녀.
설아가 마녀가 아니게 된다면 저주는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태양의 신이 바보라서 그런 조건을 내건 것은 아니었다.
“불가능합니다.”
“이유는?”
“세계가 이미 운명을 피해 간 마녀를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설아의 직업을 없었던 걸로 하진 못한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운명을 피해 간 마녀는 반드시 존재해야 합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운명을 피해 간 마녀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설아의 직업을 바꾸는 건 물론, 없애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뜻.
아직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주어진 운명은 뭘 말하는 거지?”
“마녀가 태어난 세계를 멸망시키는 것을 이릅니다.”
“그 운명은 왜 있는 거야? 저주인가?”
“태양의 신이 세계에 간섭한 결과입니다.”
“그 운명을 애초부터 없었던 걸로 하는 건?”
“역시 불가능합니다.”
“나는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거 아니야?”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시스템을 바라봤다.
어쩌면 시스템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나를 회귀시킨 것도, 신을 죽이는 상황을 만든 것도.
모두 시스템이니까.
“어떻게 해야 설아를 살릴 수 있는지는 말 못 하는 거야?”
시스템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을 뿐이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무언으로 답한 것이다.
여기서 무언이 의미하는 건, 말하지 못한다는 뜻.
“정보도 보상의 일부. 말하는 순간 주어진 보상이 줄어드는 건가. 그러면, 설아를 살리지도 못하게 되는 거고. 그렇게 생각할게.”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스템은 분명 우리를 도우려고 했다.
시스템은 설아를 살리기 위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자문자답하며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설아를 살리기 위해서 요구되는 보상의 크기가 아슬아슬한 모양이었다.
‘아니. 내가 제시한 가능성에는 대답했잖아.’
대답 역시 정보일 것이다.
그 대답으로 옳고 그르냐를 판단할 수 있게 되니까.
직접적으로 방법을 제시할 수 없을지언정, 간접적으로 정보를 준 셈이다.
나는 다시 한번 시스템이 했던 말과 태양의 신이 남긴 마지막 저주를 되새겼다.
주어진 운명을 피해 간 마녀는 또 다른 운명을 맞을지니, 그것은 죽음일지어다.
‘운명을 바꿀 힘?’
그딴 게 있으면 뭘 한단 말인가.
당장 설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주를 풀어낼 방법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죽어 가는 몸.
차라리, 내가 죽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잠깐.”
비어 있던 퍼즐 한 조각을 찾은 느낌이었다.
뒤죽박죽이었던 머리가 정리되기 시작했다.
‘세계는 이미 운명을 피해 간 마녀를 인식했다.’
‘마녀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마녀는 태어난 세상을 멸망시키는 운명을 타고났다.’
‘시스템은 운명을 바꿀 수 없다.’
설아의 직업을 바꿀 수 없는 이유는, 세계가 운명을 피해 간 마녀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식한 것은 마녀지, 설아가 아니다.
마녀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면.
다른 사람이 마녀가 되면 된다.
“시스템.”
“말씀하시길.”
“설아의 직업을 다른 사람과 교환할 수 있어?”
“직업을 서로 바꾸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시스템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운명에서 벗어난 존재라면, 가능합니다.”
“나랑 설아의 직업을 바꿀 수 있다는 얘기네.”
“마녀는 본디 남성에게 적용되지 않는 직업입니다만.”
시스템은 시선을 내렸다.
내 손목에 감긴 체인저가 보였다.
“이서준, 당신은 그 조건을 충족할 수 있습니다.”
“가능하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좋아.”
내가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저주를 푸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내가, 운명을 피해 간 마녀가 되면 된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게 해 줘.”
“그게 최종적으로 당신이 원하는 보상입니까?”
설아를 내려다봤다.
나는 회귀했을 때 결심했다.
이번 생은 설아를 위해서 살겠노라고.
“응. 그거면 돼.”
죽음은 여전히 무서웠다.
하지만 설아를 위해서라면.
나는 웃으면서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싫어.”
목소리가 바뀌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물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은혜가 있었다.
겨우 짧게 한마디 내뱉은 은혜는 울지 않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은혜야.”
“싫어. 내 말 들어.”
“이 방법밖에 없어.”
“아니야.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이게 최선이야.”
“더 말하지 마. 제발.”
은혜는 어린아이가 떼쓰듯 내 말을 가로막았다.
내 앞으로 다가와 내 팔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설아 대신 네가 죽으면, 설아 마음이 어떨 것 같아?”
“그렇다고 설아를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그럼 내가 너를 죽게 내버려 두는 건 괜찮고?”
은혜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결국 흘러 버린 눈물이 턱 끝에 맺혔다.
“왜 네가 희생해야 되는 건데?”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내가 죽을게.”
“안 돼.”
“너는 되고, 나는 안 돼?”
“나는…….”
어차피 죽을 몸이다.
죽지 않더라도, 머지않아 인간성을 전부 잃어버릴 것이다.
그래서야 살아 있을 의미도 없다.
아니, 모두 변명이었다.
나는 변명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은혜를 설득하고 싶었다.
“나는 운명을 바꿀 수 있잖아.”
“그래서?”
“살아 볼게.”
“어떻게?”
“어떻게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나, 사실 저주에 걸려 있거든.”
미래의 설아는 내게 죽지 말라고 했다.
죽지 말고 살면서 후회하라고 했다.
“난 죽으면 안 돼. 그러니까, 안 죽을 거야.”
“어떻게 확신하는데? 그 저주가 널 지켜 주기라도 해?”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설령 벗어나더라도, 다시 멀쩡한 몸으로 가족들에게 돌아올 수 있을지.
나 자신은 물론, 세계도 속일 수 있었지만.
은혜만은 속이고 싶지 않았다.
“시스템.”
계속 얘기한다면, 죽기 싫어질 것 같았다.
나는 은혜 대신 시스템을 불렀다.
은혜는 나를 붙잡았다.
“안 돼, 서준아. 가지 마.”
“다녀올게.”
“싫어!”
시스템과 은혜가 몸을 교체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싫다는 말이 자꾸 귀에 밟혔다.
시스템은 아주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보상을 부여합니다.] [개인 시스템을 갱신합니다.] [당신을 죽게 내버려 두진 않겠습니다, 이서준.]* * *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정신을 잃고 있던 설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으음.”
“설아야! 괜찮아? 어디 아프진 않아?”
고희연은 놀랐다.
방금까지만 해도 시름시름 앓던 설아였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정신을 차렸으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알 수 없었다.
하물며 유은혜의 설명을 들어 볼 때, 설아가 걸린 저주는 예삿일도 아니었으니까.
설아는 긴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몇 차례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설아 안 아파요.”
“다행이다.”
안도하는 고희연을 뒤로하고, 설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유은혜와 미래의 설아는 물론 고희연과 강대호, 검성, 소피아 람비두까지.
전투에 참여했던 모두가 있었지만, 어째선지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근데, 아빠는요?”
사람들은 설아를 따라 주위를 살폈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설아를 끌어안고 있었을 터인 이서준은 어디에도 없었다.
“뭐야? 얘 어디 갔어?”
하이람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이서준이라도, 이런 상황에 장난을 칠 것 같진 않았다.
강대호는 조용히 주변을 살폈지만,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감각이 예민한 강대호를 속이고 기척을 지우는 건 유은혜 정도만 가능한 일.
즉, 이서준은 이 근처에 없다.
풀썩.
그때, 유은혜가 주저앉았다.
놀란 하이람과 강대호가 유은혜에게 다가갔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지만, 흘러내리는 눈물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은혜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서준이가…….”
유은혜는 대답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목이 매여 흐느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단 한 명,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엄마, 아빠 어딨어요?”
* * *
1년 후, 대한민국, 서울.
오랜만에 고려검산에서 내려온 고희연은 새삼스럽다는 듯 도심지를 바라봤다.
부서지고 방치되었던 도시는 금방 복구되어 원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건축가 등 비전투 직업을 지닌 사람들이 힘쓴 결과였다.
“후웁, 하아.”
크게 심호흡한 고희연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구가 멸망 직전에 몰린 것도 옛적 이야기였다.
괴물들의 왕에게 죽었던 일, 미래의 설아를 만났던 일.
모두 한여름 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고희연은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확인하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 이상하다.”
주차해 놨던 차가 없었다.
매번 같은 자리에 차를 대기 때문에, 잃어버릴 걱정은 없었는데.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고희연은 주차장 관리인을 발견했다.
“관리인 아저씨!”
“예!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제 차 못 보셨어요? 여기에 대놨던 것 같은데.”
“희연 아가씨 차라면, 검성 어르신께서 타고 나가셨는데요.”
“네에? 할아버지가요?”
“예. 양복 입으셨길래, 검성 어르신이 아닌 줄 알았다니까요.”
검성은 나서서 운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항상 도복 차림인 검성이 양복을 입었단다.
고희연은 검성이 어디로 갔는지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아. 소피아 할머니 오셨다더니, 드라이브 가셨나 보다.”
연합 작전 이후로, 소피아 람비두와 검성은 주기적으로 교류하고 있었다.
둘의 사이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건 비단 고희연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제 차라도 빌려드릴까요?”
고희연은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목적지는 고려검산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가볍게 톡톡 뛴 고희연은 고개를 저었다.
“고맙습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시간도 아직 남았으니까, 뛰어가면 돼요!”
“어디 가시는데요?”
“삶의 낙 보러요!”
고희연은 핑크색 상자를 소중히 끌어안았다.
잘못하면 리본이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내 고희연은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