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iary is an SSS-class reward RAW novel - Chapter 107
107화. 악마의 미궁 (15)
김신욱은 닫히는 벽 너머로 몸을 날렸다. 그 탓에 현재 바닥에 꼴사납게 엎어져 있었다.
눈앞에는 철창에 갇힌 정하나가 있었다. 뒤에 있던 벽은 김신욱과 고주연이 뛰어 들어오기 무섭게 닫혀버렸다.
이유영이 그렇게 걱정하던 낙오를 김신욱이 당하고 만 것이다.
같이 뛰어든 고주연은 금세 일어나 정하나를 살폈다.
그러나 김신욱은 일어나지 않았다. 김신욱은 그대로 엎어진 채, 자신이 왜 이런 미친 짓을 했는지 곱씹으며 후회하고 있었다.
고주연은 그런 김신욱에게 다가와 말했다.
“일어나.”
슬쩍 올려다본 고주연의 얼굴은 좀 무서웠다.
보기 드문 미인이지만, 하는 말마다 사람 살 떨리게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고주연은 김신욱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어쩐지 손을 잡고 일어나긴 좀 그래서 혼자 일어났다.
내밀었던 손이 뻘쭘해진 상황이었지만, 고주연은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정하나는 그런 두 사람을 보고서는 소리쳤다.
“이 바보들아! 날 구하러 오면 어떡하냐고!!”
철창에 갇힌 채로 소리 지르고 있는 정하나를 보고 있자니 순간 드는 생각이 있었다. 김신욱은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너 그러고 있으니까 동물원 원숭이 같다.”
“뭐, 이 자식아?”
김신욱은 그런 정하나를 보며 낄낄대고 웃었고, 정하나는 그 말에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고주연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끄러워. 지금 장난칠 상황 아니야.”
고주연의 한마디에 정하나는 입을 다물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김신욱도 고주연의 서늘한 표정을 보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조용해지자, 고주연은 손목을 가볍게 돌리더니, 주먹을 쥐고는 철창을 내리쳤다.
깡!!
저 주먹에 한 대만 잘못 맞아도 일반 사람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살벌한 펀치였다.
하지만 철창은 흠집 하나 없이 멀쩡하기만 했다. 저 정도 펀치에도 멀쩡하다면, 엄청나게 단단한 재질인 게 틀림없었다.
그 모습을 본 정하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주연 언니, 혹시 이거 화살로 폭발시켜볼 수 있어요? 제가 방어하고 있을게요.”
“그러려던 참이야. 잘 막고 있어.”
고주연이랑 정하나는 대체 언제 친해진 건지 서로 편하게 말하고 있었다.
김신욱은 아직 고주연이랑 제대로 대화해본 적도 없었는데, 정하나 주제에 벌써 친해진 모양이었다.
고주연은 정하나의 말을 듣자마자 한 번에 화살을 다섯 개나 만들더니, 철창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화살을 한꺼번에 쐈다.
콰과광!!
화살은 철창에 닿자마자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화살만으로는 저런 화력이 나올 수가 없었다. 서브 스킬까지 쓴 모양이었다.
저 정도면 철창이 부서지고도 남았을 거라 생각해, 김신욱은 별생각 없이 멀뚱멀뚱 서 있었다.
그러나 연기가 걷히며 보인 것은 흠집조차 나지 않은 매끈한 철창이었다.
“뭐야…?”
김신욱은 당황한 채로 중얼거렸다. 정하나와 고주연 역시 당연히 철창이 부서질 거라 생각했는지, 마찬가지로 당황하고 있었다.
정하나는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고는 서둘러 이유영에게 통신을 넣고 있었다.
“야, 이유영!! 이거 철창 안 부서지는데 어떻게 해?”
이유영이 정하나에게 무슨 말을 해줬는지 김신욱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정하나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럴싸한 해결책이 나오진 않은 모양이었다.
정하나는 침울한 얼굴로 고주연에게 말했다.
“언니, 이거 그냥 부서질 때까지 둘이 합공하라는데 어떡해요?”
“넌 공격 스킬은 없지?”
“윽, 여기서 쓸만한 건 딱히….”
정하나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리자, 고주연은 위로라도 하듯이 철창 안으로 손을 뻗어서 정하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이런 상황에서 훈훈한 분위기를 유지하려는 게 싫어 김신욱은 입을 열었다.
“야, 원숭이. 이유영이 뭐래?”
“누가 원숭이야? 너도 빨리 이거 부숴. 대책 없대.”
이유영 녀석, 뭐라도 해결책을 내놓을 줄 알았더니 그 녀석도 사람이었나보다.
부수는 것 말고는 대책이 없다면 김신욱도 가세해야 했다. 고주연의 힘만으로는 부족해 보이니 어쩔 수 없었다.
고주연이 안 되는 걸 자신이 거든다고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김신욱은 스킬을 발동해, 빛의 창을 뽑아 들었다.
시험 삼아 고주연이 폭격을 날렸던 곳에 창을 내질러보았으나, 철창은 크게 울리기만 할 뿐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괜히 손만 아플 뿐, 이걸 부수는 건 무리였다.
“안 되겠다, 포기.”
“뭔 포기야? 빨리 부숴!!”
정하나가 화를 내며 김신욱의 멱살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김신욱은 슬쩍 뒤로 물러나며 약 올리듯 혀를 내밀었다.
정하나는 씩씩거리며 김신욱에게 화를 내고, 김신욱은 그런 정하나를 약 올리는 와중에도 고주연은 묵묵히 화살을 만들고 있었다.
‘진심으로 저걸 부술 작정인 건가? 이유영이 어떻게든 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지 않나?’
그러나 고주연은 활에 화살을 걸며 말했다.
“물러서. 정하나, 너도 방어막 쓰고 있어.”
정하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스킬을 발동해 본인을 보호했다.
정하나의 안전을 확인한 고주연은 활을 들어 올려 다시 묵묵히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한 곳만을 집중 공략해볼 생각인지, 고주연은 반복해서 같은 곳에만 화살을 날렸다. 하나쯤은 빗겨 쏠 만도 한데 완전히 똑같은 자리에 화살이 맞는 건 꽤 신기한 장면이었다.
철창은 요란하게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부서질 법한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창은 고주연이 알아서 할 것 같아서, 김신욱은 뒤에 가로막힌 벽을 바라봤다.
정하나를 구출한다고 해도 이게 떡하니 버티고 있는 이상 합류할 방법이 없었다.
김신욱은 시험 삼아 창을 벽을 향해 내질러봤다.
탕!
큰 소리가 울렸지만, 철창과 마찬가지로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체감상 저 철창보다 더 단단한 것 같았다.
이유영은 이 성의 벽이 공략대가 모두 합심해서 공격해도 부서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다고 했었다.
김신욱은 안 되는 걸 붙들고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괜히 바보같이 붙잡고 있는 것보단 포기하는 게 나았다.
그냥 기다리고 있으면 이유영이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널브러져 있자, 철창을 향해 화살을 쏘고 있던 고주연이 김신욱에게 말했다.
“너도 도와.”
약간 무서울 정도로 차갑고 강압적인 목소리였다.
일단은 비적비적 일어났지만, 김신욱은 고주연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부서지지도 않는 걸 왜 저렇게 미련하게 공격하고 있는 거지?
안 그렇게 생겼는데 사실 머리가 나쁜가?
김신욱은 별별 생각을 다 하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철창을 향해 창을 던졌다.
그러자 고주연이 활을 잠시 내려놓고는 김신욱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성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김신욱은 빠르게 변명했다.
“그쪽이 하도 화살을 쏴대서 나도 멀리서 공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 계속 던져.”
그 대화 이후로 고주연은 말 한마디 없이 다시 화살을 쏘는 데에만 집중했다.
김신욱은 하는 수 없이 고주연을 따라 계속해서 창을 던졌다.
빛의 창은 끊임없이 창을 만들어낼 수 있는 스킬이어서, 일회용으로 쓰고 버려도 상관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단시간에 창을 많이 만들어본 건 처음이었다.
만들 때마다 창의 모양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걸 김신욱은 이제서야 처음 알았다.
시험 삼아 창을 만들면서 모양에 집중해보자, 원하는 대로 창끝의 모양이 변형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신욱은 최대한 철창을 파괴하기 좋아 보이는 형태로 창끝을 변형시켰다.
만들 때마다 더 효과적으로 철창을 두드릴 수 있는 창을 만들어 던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김신욱은 200개 이후로 수를 세기를 포기했다. 그 정도로 많은 수의 창을 철창을 향해 던졌다.
고주연은 화살을 한 번에 5개씩 만들어댔으니, 못해도 1,000개는 만들어서 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철창은 얄미울 정도로 멀쩡했다.
“아! 못 해 먹겠네!!”
김신욱은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렇게 공격했는데도 철창에는 고작 작은 흠집밖에 나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이건 부술 수 있는 물체가 아니었다. 뭔가 다른 방법으로 정하나를 탈출시키는 게 맞았다.
그러나 고주연은 김신욱이 드러눕든 말든, 아직도 묵묵히 화살을 쏘고 있었다.
고주연은 김신욱처럼 설렁설렁 던지는 게 아니라, 한 번 쏠 때도 최대한 집중해서 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지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고주연도 지쳤을 게 분명한데도 여전히 활을 쏘고 있었다.
단순히 성실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지독함이었다.
김신욱은 누워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런데 아까부터 암흑 뒤에 숨어있던 정하나가 조용한 것 같았다.
설마 졸고 있기라도 한 건가? 자기 구해주겠다고 개고생을 하고 있는데?
김신욱은 정하나를 깨우기 위해 큰소리로 외쳤다.
“원숭아, 자냐?”
이러면 정하나가 벌떡 일어나서 화를 내야 하는데, 이상하게 조용했다.
고주연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지 활을 내리고는 철창 쪽으로 다가갔다.
“정하나.”
고주연의 부름에도 정하나는 대답이 없었다.
그때, 정하나를 감싸고 있던 암흑이 일렁거렸다.
암흑이 스르륵 흩어지자, 그 뒤에 숨어있던 정하나의 모습이 드러났다.
정하나는 그대로 풀썩 엎어졌다.
“정하나!”
김신욱과 고주연은 정하나의 이름을 외치며 철창 가까이 다가갔다.
어째서인지 정하나는 기력이 쭉 빨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야….”
정하나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귀에 꽂혀있던 통신기를 빼더니, 김신욱이 있는 방향으로 힘없이 던졌다.
김신욱이 그걸 주워 드는 사이, 고주연은 정하나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정하나, 정신 차려.”
“….”
정하나는 말할 힘도 없는 건지 숨만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고주연은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정하나에게 다친 곳이 있는지 살피고 있었다.
김신욱은 정하나에게 받은 통신기를 귀에 끼며 급하게 이유영을 불렀다.
“이유영! 들리냐?”
『들려. 천리안으로 상황 파악했다. 철창을 빨리 부숴야 해. 그 철창이 생명력을 흡수하는 것 같아.』
생명력을 흡수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철창을 빨리 부숴야 한다는 건 이해했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설렁설렁해선 안 되는 것이다.
김신욱은 통신기에 대고 소리쳤다.
“무슨 방법 없어? 저걸 어떻게 부수냐고!”
『….』
이유영은 대답이 없었다. 뭔가 이상해서 통신기를 두드려봤지만, 잡음만 들려오고 들려야 할 이유영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고장 난 건가?
“야, 이유영! 들려?”
들린다면 대답 안 할 리가 없는데, 통신기에서는 이제 잡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김신욱이 착잡한 마음으로 통신기를 귀에서 빼자, 고주연이 물었다.
“이유영이 뭐래?”
“저거 빨리 안 부수면 정하나가 위험하다는데요.”
“그럼 부숴야지.”
고주연은 김신욱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활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김신욱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까처럼 공격하면 정하나가 위험할 텐데요?”
아까 같은 폭격은 정하나가 스킬로 스스로를 보호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정하나가 스킬을 펼칠 힘도 없는 이상 방금과 같은 방법은 너무 위험했다.
고주연도 이해한 건지, 화살을 하나 만들어내 철창을 치기 시작했다.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저것밖에 방법이 없긴 했다.
“너도 도와. 나 혼자만으론 부족해.”
김신욱도 급히 창을 하나 만들어내서 고주연과 나란히 서서 철창을 쳤다.
조급한 마음에 강하게 쳐낼수록 손까지 진동이 울려왔다.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옆에 있던 고주연은 손바닥이 까져서 피를 흘릴 만큼 열심히 하고 있었다. 김신욱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철창은 여전히 작은 생채기밖에 보이지 않았는데도 김신욱의 손은 점점 아파 오고 있었다. 정하나의 목숨이 위험한 것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다.
김신욱은 옆에서 묵묵히 철창을 치고 있는 고주연이 신기했다.
지금도 그렇고, 몬스터를 상대할 때도 그렇고. 저 사람은 꼭 ‘진짜’ 헌터 같았다.
전직 국가대표였던 사람이 화끈하게 은퇴 선언을 하고 헌터가 되더니, 마치 평생을 헌터로 살아온 사람처럼 행동했다.
저 사람도 김신욱이랑 사정이 비슷할 텐데도, 고주연은 김신욱과 마음가짐이 전혀 다른 것만 같았다.
김신욱은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국가대표까지 했던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바쳐온 일을 강제로 그만뒀음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헌터 일에 적극적일 수 있는 걸까?
김신욱은 손에서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화살로 철창을 치고 있는 고주연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양궁 선수 왜 그만뒀어요?”
고주연이 곧바로 답하지 않은 탓에, 잠깐의 적막이 생겼다.
두 사람이 철창을 치는 소리만이 울릴 뿐이었다.
채석장마냥 시끄럽게 철이 울리는 소리 속에서 고주연이 입을 열었다.
“나는 화살을 쏘는 걸 그만둔 건 아니야.”
“화살만 쏘면 된다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뭐예요?”
헌터 활동을 하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화살만 쏘면 된다는 건가?
고주연이 몬스터에게 10점짜리 퍼펙트 골드를 쏴도 이제 박수 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예술적인 궤적을 그리며 화살이 날아가도, 그냥 몬스터를 죽인 화살밖에 되지 않는다.
세상은 더 이상 양궁 선수인 고주연을 인정해주지 않을 텐데도, 화살만 쏘면 된다는 걸까? 그런 게 정말 가능한 걸까?
고주연은 김신욱을 한 번 쳐다보더니,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너 몇 살이니?”
김신욱은 잠시 당황해서 고주연을 쳐다봤다.
나이를 묻는 건 보통 꼰대 발언을 하기 위해서인데, 고주연이 그럴 것 같진 않았다.
“스물셋인데요.”
“헌터 되기 전엔 뭐 했어?”
“피아노 쳤습니다. 앞으로도 칠 거고.”
김신욱은 ‘헌터 되기 전’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각성하고 싶어서 각성한 것도 아니다. 헌터 따윈 되고 싶지 않았다.
김신욱은 언제까지고 피아니스트이고 싶었다.
이런 영문 모를 상태창 따위에 인생을 빼앗기고 싶진 않았다.
“이유영이 너 때문에 피아노 안 버렸나 보다.”
김신욱은 당황한 채로 고주연을 쳐다봤다.
보통 김신욱이 앞으로도 피아노를 칠 거라고 하면, 다들 아직 어려서 뭘 모른다는 말만 들었다. 그리고는 헌터가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을 거라고 헛소리나 해댔다.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김신욱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주변 사람들도, 생물학적 부친도 말이다.
하지만 이유영도, 고주연도, 이상할 만큼 김신욱에게 태클을 걸지 않았다.
‘둘이 같은 길드라서 그런가.’
고주연은 지쳤는지 손이 완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런 손으로도 철창을 계속 치다가, 화살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 화살을 다시 줍더니, 다시 철창을 쳤다.
김신욱은 그 모습을 보면서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가 스킬 쓸 테니까 빠지세요.”
“이제 와서? 뭔 스킬인데?”
김신욱은 서브 스킬, 독주를 쓸 생각이었다.
고주연이 설명해달라고 쳐다보고 있었지만, 김신욱도 이 스킬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어봐도 설명해준 적 없었다. 어차피 물어봐도 비웃을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고주연에게는 그냥 있는 그대로 설명해도 될 것 같았다.
“피아노 치는 스킬이요.”
“센 거야?”
“뭐, 지금보다는….”
대충 설명했는데도 고주연은 더 묻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유영이랑 똑같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이라면, 헌터도 괜찮지 않을까 잠깐이나마 생각했다. 곧 미친 생각이라며 부정했지만 말이다.
김신욱은 서브 스킬을 발동하며, 고주연을 자기 뒤로 보내기 위해 팔을 잡았다.
그런데 그 순간, 김신욱 앞에 푸른 창이 떠올랐다.
[ 스킬이 진화합니다. ].
.
.
[ 진화 완료 ] [ 스킬이 개화합니다. ]느닷없이 스킬이 진화했다는 알림과 함께, 김신욱이 혼자 오르던 무대에 고주연과 함께 오르게 되었다.
이 서브 스킬 속 공간에 타인과 함께 온 것은 처음이었다.
무대나 텅 비어있는 관객석은 똑같았다.
피아노와 악보가 준비된 것도 똑같았다.
다른 것은 딱 한 가지.
무대에 준비된 의자는 한 개가 아닌, 두 개였다.
“네 스킬이야?”
김신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주연은 갑자기 공간이 바뀌었는데도 크게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잠시 당황했지만, 진화한 스킬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는 저절로 깨달을 수 있었다.
김신욱은 피아노 앞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고주연에게도 따로 준비된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피아노 연주할 줄 알아요?”
“잘 몰라.”
몰라도 상관없었다. 고주연이 무대에 오른 이상, 이미 합주는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앉아서 보고 있어요. 여태 날린 화살보다 대단한 걸 쏘게 될 겁니다.”
김신욱은 자신만만하게 악보를 훑었다.
고주연은 김신욱의 옆자리에 앉았고, 김신욱은 악보를 확인했다.
악보에는 여전히 김신욱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 같은 음계가 적혀있었다.
평소에는 이걸 따라서 쳐야 하는 게 기분이 나빴다.
나만 볼 수 있는 악보에 나만 들을 수 있는 연주라니.
애초에 예술이란 관객이 있어야 성립하는 법이다.
이 스킬은 사실상 피아니스트 김신욱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한 명이라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서일까.
연주하는 데도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
쾅!!!!!
엄청난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김신욱은 철창을 부수고 정하나를 들쳐 업고 있었다.
그 단단하던 철창이 미사일이라도 맞은 것처럼 우그러진 채 부서져 있었다.
고주연 쪽을 바라보자, 고주연도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
가끔 연주를 통해 육체가 버티지 못할 만큼 움직이면, 정신이 날아가 버릴 때가 있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정하나를 업고 있는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고주연도 힘이 빠졌는지, 일어서다 말고 자꾸 넘어지고 있었다.
혹시 정하나한테도 영향이 있었나 싶어 급하게 살펴보았으나, 다행히 큰 상처는 없었다. 합주 스킬이 어떻게 잘해준 모양이었다.
‘이유영 이거 천리안을 봤겠지? 어떻게 부순 건지는 걔한테 물어봐야겠다.’
문제는 이제 벽을 뚫고 이유영한테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통신기는 여전히 작동하지 않아서, 이유영한테 길을 찾아달라고 할 방도가 없었다.
‘한 번 더는 못 쓸 것 같은데….’
고주연도 김신욱도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였다.
적어도 이 벽만큼은 이유영이 어떻게든 해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