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iary is an SSS-class reward RAW novel - Chapter 185
185화. 태풍 (5)
우리는 잘 말린 옷을 입고 절벽을 향해 걸어갔다.
절벽에는 꼭대기에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다만 계단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만큼 가파르고 험난해서 사실상 암벽 등반에 가까웠다.
절벽의 코앞에 도달하자,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 나타났다.
발끝만 디딜 수 있을 정도로 불편해 보이는 계단이었지만, 그냥 민둥한 암벽을 오르는 것보다야 나을 것이다.
나는 절벽을 오르기 위해 준비운동을 했고, 일행들도 몸을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쟈는 까마득한 절벽 위를 올려다보고 질색하며 말했다.
“설마 여길 오르자는 건 아니지? 응? 아니라고 말해, 제발…!”
“오를 겁니다.”
“하…!”
나쟈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나쟈는 키가 작고 팔다리가 가늘긴 했지만, 못해도 종합 능력치 A에 달하는 헌터다.
우리만큼 신체가 단련되어 있으니, 이 정도는 충분히 오를 것이다.
그런데도 나쟈는 어지간히 오르기 싫은지, 마르코를 닦달했다.
“마르코, 분신 써서 나 좀 업고 가면 안 돼? 나 고소공포증 있단 말이야.”
“그것참 이상하군. 인별그램에 있던 고층 아파트에서 와인 마시는 사진은 공포에 떨며 찍은 건가?”
“아우 깐깐해! 그냥 좀 업어주면 안 돼? 떨어지는 거 무섭다고!”
“네가 내 딸로 다시 태어난다면 생각해 보지.”
마르코의 단호한 거절에 나쟈는 타겟을 바꿔, 구지상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순진한 구지상이라면 나쟈를 업고 암벽 등반도 해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지상은 심각하게 절벽을 보며 얘기했다.
“확실히 이 절벽은 위험하긴 하네요. 제가 스킬을 써서 안전하게 발판을 만들어 볼까요?”
“그냥 날 등에 업고 오르면 되잖아! 나 별로 안 무겁단 말이야.”
“그것보단 위험 요소를 아예 없애버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구지상은 상쾌하게 웃으며 스킬을 발동해, 절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절벽을 움직이자마자, 절벽 꼭대기에서 엄청나게 큰 돌이 떨어져 내려왔다.
구지상은 다급하게 그 돌을 막으며 말했다.
“이 절벽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되나 봐요!”
“그래 보이네요. 그냥 오릅시다. …나쟈 씨도 무리한 부탁 그만하시죠. 여기 있는 사람은 당신이 튼튼한 거 다 압니다.”
“됐어! 이 치사한 남자들아. 너네 손은 안 빌려.”
나쟈는 앞장서서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오르는 걸 보면, 큰 문제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나쟈를 따라서 절벽을 올랐다.
내 뒤로 마르코가 따라왔고, 김신욱도 투덜거리며 절벽을 올랐다.
구지상은 낙상 사고를 대비하겠다며 맨 뒤에서 따라왔다.
우리는 위를 향해 묵묵히 올라갔다.
위로 갈수록 밑은 멀어졌지만, 절벽의 끝이 가까워진다는 느낌은 없었다.
언제까지 올라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멀리서 봤을 때 분명히 이 절벽에는 끝이 있었다.
인내심을 가지고서 올라야만 했다.
다행히 우리 다섯 명의 신체 능력은 비슷비슷하다.
서로 사정을 봐줘 가며 올라갈 필요가 없었다.
나쟈는 맨 앞에서 빠른 속도로 위를 올랐고, 나는 속도를 조정하며 나쟈의 뒤를 따랐다.
처음부터 너무 빠르게 가면 중반에 가서 지치기 때문이다.
나쟈는 내가 따라오지 않으면 알아서 속도를 늦췄고, 내가 바짝 쫓아가면 일부러 날 향해 돌을 떨어트리면서도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한참을 지루하게 올라가던 중, 앞서가던 나쟈가 말했다.
“이유영, 이거 언제까지 올라야 해? 나 지루한데 노래라도 불러줘.”
“전 노래를 못 부릅니다. 차라리 김신욱이나 구지상 씨한테 시키시죠.”
“하긴 넌 얼굴부터 노래를 못 부를 것 같은 얼굴이야.”
졸지에 얼굴만 봐도 노래를 못 부르는 놈이 되었다.
마르코는 뒤에서 우리 얘기를 듣고 있다가 김신욱에게 그 얘길 전달해 줬다.
그러자 김신욱은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야, 나쟈가 노래 불러준댄다! 다들 박수!”
“와 정말요?”
구지상은 뭣도 모르고 박수를 쳤고, 마르코도 박수를 쳐줬다.
김신욱 때문에 결국 나쟈가 노래를 불러야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나쟈는 김신욱을 향해 소리쳤다.
“네가 하라고, 피아노맨!”
“저게 지금 누구 보고 피아노맨이라는 거야?”
“어머, 피아노 관둬서 이젠 노래도 못 하는 거야? 저런, 안타까워라!”
나쟈랑 김신욱은 말다툼하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심심했는지 말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그 탓에 둘 사이에 껴있던 나랑 마르코의 귀만 아팠다.
“넌 얼굴이랑 키는 괜찮은데 성격이 그래서야 어디 여자를 만나기야 하겠니?”
“내가 왜 그런 말을 매국노한테 들어야 하지?”
“너 지금 마르코까지 욕한 거니?”
괜히 중간에 낀 마르코만 괴로워지는 듯했다.
두 녀석이 점점 날카롭게 싸워대는 탓에, 절벽을 올라가는 속도도 느려지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말했다.
“이제 그만 싸우시죠. 노래는 제가 불러드리겠습니다.”
당연하지만 나는 노래를 못 부른다.
노래방 점수는 길드원들이랑 노래를 부르던 때 그 점수고. 학창 시절에는 노력이 가상해서 B를 받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런 내가 노래를 부르면 나쟈도 다신 노래 불러달라는 소리를 못 할 것이다.
다행히 내 말에 나쟈와 김신욱이 싸움을 멈췄다.
나쟈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야, 진작에 불러주면 좋았잖아. 뭐 불러줄 건데?”
“우리나라 국가를 불러드리겠습니다.”
“엥?”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군대에서 부르던 것처럼 우렁차게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오랜만에 부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노래를 부를수록 김신욱과 구지상이 웃는 소리가 커졌다.
마르코는 황당해하는 것 같았고, 나쟈는 말없이 절벽을 오르다가 2절을 부르려고 할 때 결국 못 참고 외쳤다.
“알겠어, 내가 미안해!! 그러니까 이제 그만…!”
“왜 그러십니까? 4절까지 부를 수 있습니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괜한 짓 안 하면 되잖아, 얌전히 절벽이나 오르겠다고!”
나쟈는 얌전히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4절까지 완벽하게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부를 수 있었지만, 노래 불러달라던 녀석이 하지 말라고 해서 관뒀다.
나쟈는 이후로 정말 조용히 절벽만 올랐다.
뒤에서 김신욱이랑 구지상이 종종 투덕거리던 걸 제외하면, 우리는 정말 조용하게 절벽을 올랐다.
그렇게 한참 오르다 보니, 슬슬 대원들의 체력이 떨어진다는 게 느껴졌다.
밥도 먹지 못했고 벌써 몇 시간이나 오르며 시간도 저녁때가 되었다.
다행히 던전의 시간대도 현실과 비슷한 건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마침 이 절벽에 유일하게 쉴 만한 장소에 가까워지고 있기도 했다.
나는 멈춰서서 대원들에게 말했다.
“이 근처에 절벽에 난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은 거기서 쉬고, 아침이 되면 이어서 갑시다.”
그제야 다들 한숨을 돌리는 게 보였다.
우리는 조금 더 절벽을 오른 뒤, 내가 찾아뒀던 동굴을 향해 아슬아슬하게 벽 타기를 하며 들어갔다.
동굴은 다섯 명은 충분히 누울 만큼의 공간이 있었고, 불 하나 정도는 피울 여건이 됐다.
나쟈는 동굴 안에 들어서자마자 몸을 눕혔다.
김신욱도 마찬가지였다.
마르코는 그런 둘을 억지로 일으켜서 침낭을 깔고 눕게 만들었다.
나는 목단의 줄기와 열풍을 이용해서 불을 피웠고, 구지상은 동굴 주변에 몬스터가 있는지 소리로 탐색했다.
“이 주변에는 몬스터가 없는 것 같네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불침번은 서는 게 좋겠어요.”
“불침번은 저랑 구지상 씨가 서죠. 나머지 세 분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좋아요!”
구지상은 이번 특훈으로 나만큼 비상식적인 체력을 키운 건지, 지친 기색이 없었다.
반면 나머지 셋은 쉬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불침번에서 제외되어 신난 것 같았다.
우리는 에너지바랑 통조림으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은 뒤 김신욱은 곧바로 누워서 잠들었고, 마르코와 나쟈 역시 침낭 위에 몸을 눕혔다.
나는 구지상과 번갈아 가며 동굴 밖을 감시하거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장작을 넣었다.
그렇게 조용히 밤이 찾아온 뒤로, 몇 시간이 흘렀다.
문득 나쟈가 마르코에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르코, 자?”
“안 잔다.”
“그럴 것 같았어. 가만 보면 스파이 애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잔다니까.”
나는 불을 지피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게 됐다.
내가 엿들으려고 한 게 아니다.
두 녀석이 내가 있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서 이야기를 나눈 탓이다.
“마르코, 당신 딸은 어떻게 할 거야? 만성에서 가만두질 않을 텐데. 류차오는 아마 우리가 자기네들을 배신했다고 생각할걸?”
“그렇겠지. 그 녀석들이라면 내 딸이랑 아내를 찾아가서 남편을 데려오라고 협박할 테니까. 하지만 그건 어떻게든 막았어.”
“어떻게 막았는데?”
신경을 안 쓰려고 했는데, 둘이 계속 뒤가 궁금해지는 얘기를 나누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나도 귀를 기울였다.
마르코는 착잡한 목소리로 나쟈에게 말했다.
“미카엘한테… 부탁했다. 내 딸이랑 아내를 보호해달라고.”
“뭐? 미카엘이 순순히 그걸 들어줬어?”
“그럴 리가. 미카엘의 말에 순순히 따르면 딸이랑 아내는 보호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던전에서 살아나가면 에덴의 헌터로 받아주겠다더군.”
미카엘이 그런 선의를 베푸는 놈인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나쟈는 나랑 생각이 달랐는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답했다.
“그건 그냥 만성에서 에덴으로 옮겨가서 잡혀 사는 거잖니.”
“만성에서 탈출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는 걸 너도 알잖아. 우리가 스파이라는 신분을 세탁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래, 알지. 아니까 네가 그 선택을 하는 게 싫은 거야. 나도 그 방법밖에 없다는 게 실감 나잖아.”
그래도 만성에서 스파이 짓을 하는 것보단, 미카엘의 길드원으로서 헌터 생활을 하는 게 나을 것이다.
이 녀석들이 하는 짓은 국가의 인재를 빼돌려 매매하는 매국노 짓이나 다름없다.
반면 미카엘은 용서 없이 헌터 일을 시키기는 해도, 헌터 일만 시키는 놈이다.
두 생활은 비교할 게 못 된다.
하지만 나는 이 녀석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이 녀석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 내가 모르는 만성의 무언가가, 이 둘을 옭아매고 있는 듯했다.
“여기서 살아나간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냥 잠이나 잘래. 당신은 어떻게든 살아나갈 생각만 해.”
“그럴 거야.”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나는 불을 지피고서 조용히 구지상의 옆으로 갔다.
구지상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 건지, 씁쓸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구지상과 나는 말없이 동굴 밖을 보며 있었다.
아마 구지상 역시 나처럼 만성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것 같았다.
그런데 한 30분이 지났을 때쯤, 마르코가 조용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잠이 오질 않아서 같이 불침번을 서겠다.”
“피곤하실 텐데 저희한테 맡기고 조금이라도 누워계세요.”
구지상이 나름 배려하려고 대답했지만, 마르코는 가라앉은 낯으로 잠시 동굴 바깥을 내다봤다.
누워있으려니 별생각이 다 들어서 온 것 같은데, 다시 누우라고 하는 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나는 마르코에게 말했다.
“마르코 씨는 왜 만성의 스파이가 된 겁니까?”
내 질문에 마르코가 잠시 나를 쳐다봤다.
답하기 어려우면 알아서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생각이 복잡하긴 했는지, 순순히 답했다.
“처음엔 돈 때문이었지. 내 아내는 고등학교 때부터 만난 여자야. 우리는 졸업하자마자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다. 나는 열심히 일해야 했어. 딸을 잘 키우고 싶었거든.”
“그럼 처음부터 스파이 짓을 하게 될 걸 알고 만성에 들어간 겁니까?”
“아니, 다른 곳과 다름없는 헌터 활동인 줄 알았어. 어느 곳보다도 더 많은 액수의 금액으로 연봉을 협상해 줬는데, 나는 그게… 드디어 내 능력을 인정받은 거라고 어리석게 생각했지.”
마르코는 침울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녀석은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길드장과 만나고 난 뒤로 모든 게 망가지고 말았다.”
“길드장이 당신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습니까?”
“그건 말할 수 없어…. 그런 제약에 걸렸거든.”
헌터가 헌터에게 걸 수 있는 제약은 다양하다. 내가 정하나와 했던 디케의 언약 증명처럼, 아이템으로도 할 수 있고 스킬로도 제약을 걸 수 있다.
아마 만성 길드장쯤 되는 녀석은 디케의 언약 증명보다 더 강하고, 갑과 을이 명료한 제약을 걸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 캐물을 수 없었다.
그때 구지상은 침울한 마르코의 등을 탁탁 치면서 말했다.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아이돌 연습생을 해서 여자친구가 없었어요. 그래서 마르코 씨가 너무 부럽네요! 이유영 씨는 고등학교 때 여자친구 있었어요?”
“없었습니다.”
“와, 그럼 마르코 씨가 연애 썰 풀어주세요! 어차피 잠도 안 오잖아요?”
전직 아이돌이어서 그런지, 죽어가는 분위기도 발랄하게 살리는 재주가 있었다.
마르코도 다 죽어가던 얼굴을 펴고 아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내 얘기는 점점 자랑이 되었고, 어쩌다 보니 학창 시절 이야기로 번졌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 서로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며 떠들었다.
이렇게 던전 브레이크가 터지기 전의 이야기를 해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고 주변은 고요해서, 우리는 동이 틀 때까지 떠들기나 했다.
폭풍전야 같은 시간이었다.